매거진 미인 saga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여자, 지나 롤로브리지다

by 무체


20세기를 대표하는 이탈리아의 보석, 지나 롤로브리지다. 그녀는 단순한 '섹스 심벌'이 아니었다. 조각가, 화가, 사진작가, 패션 디자이너, 가수, 정치인으로 다양한 분야에 도전한 르네상스적 예술가였다. 대중의 관심과 찬사 속에서도 "독립적이며 항상 혼자였다"는 그녀의 고백은 화려한 외면 속에 감춰진 고독한 영혼을 보여준다. 그녀의 삶은 아름다움과 예술, 열정과 자유, 그리고 자기표현의 끝없는 탐구였다. 비록 육체는 사라졌지만, 그녀가 남긴 영화와 예술 작품, 그리고 자유로운 영혼의 메시지는 영원히 우리와 함께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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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살면서 어떤 타협도 한 적이 없고 독립적이며 항상 혼자였다. 나의 힘의 원천은 자유로운 영혼에 있었고, 내 위대한 상상력은 나에게 힘과 활력을 주었다." - 지나 롤로브리지다



1927년 7월 4일, 로마 동쪽의 가난한 산악지대 수비아코에서 태어난 지나 롤로브리지다는 처음부터 예술적 감성을 지닌 영혼이었다. 2차 세계대전으로 피난 생활을 경험한 그녀는 전쟁 후 로마 미술 아카데미에서 조각 공부를 이어갔다. 학비를 벌기 위해 '다이애나 로리스'라는 예명으로 포토 소설 '포토로만치'의 모델로 활동하다 영화계 인사들의 눈에 띄게 되었다.

배우 제의에 큰 관심이 없었던 그녀는 거절의 방법으로 터무니없이 높은 금액을 요구했으나, 예상외로 제작사가 그 조건을 수락하면서 그녀의 배우 인생이 시작되었다. 이는 단순한 우연이 아닌, 그녀의 타고난 가치를 알아본 영화계의 혜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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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3년 마리오 솔다티의 '웨이워드 와이프'를 통해 스타덤에 오른 지나는 곧 할리우드의 부름을 받았다. 험프리 보가트와 함께한 '비트 더 데빌'(1954), 프랭크 시나트라와 호흡을 맞춘 '네버 소 퓨'(1959) 등을 통해 세계적 명성을 얻었으며, 로버트 Z. 레너드의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여성'(1955)이라는 영화는 그녀의 대표작이자 별명이 되었다. 당대 할리우드의 거물 험프리 보가트는 지나의 아름다움에 감탄하며 "지나와 비교하면 마릴린 먼로는 셜리 템플처럼 보인다"라고 말했을 정도였다. 35-22-36의 완벽한 모래시계형 몸매와 육감적인 매력은 그녀를 '20세기의 모나리자'로 불리게 했다.


지나의 할리우드 성공에는 당시 영화계의 실세 하워드 휴즈의 역할이 컸다. 그러나 그들의 관계는 순수한 비즈니스 파트너십이 아니었다. 훗날 지나는 휴즈가 끊임없이 남편과 이혼하고 자신과 결혼하자고 강요했다고 주장했다. 이 갈등은 결국 그녀가 할리우드를 떠나 본국 이탈리아로 돌아가는 계기가 되었다.

1949년, 지나는 유고슬라비아 출신 의사 밀코 스코픽과 결혼했다. 스코픽은 의사 경력을 접고 그녀의 매니저로 활동하며 17년간 부부로 살았다. 1957년에는 아들 밀코 주니어를 낳았다. 1960년대 초반 부부는 세금 문제로 의심받으며 캐나다 토론토로 잠시 이주했다가 3년 후 다시 이탈리아로 돌아왔다.

1971년, 이탈리아에서 이혼이 합법화되자마자 지나는 첫 수혜자가 되어 결혼 생활을 청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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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혼은 지루하고 거의 항상 장례식장 같으며, 부부는 종종 서로를 너무 많이 구속한다"는 그녀의 말은 개인적 경험인지, 제도에 대한 비판인지 명확하지 않지만, 자유를 갈망하는 그녀의 영혼을 잘 보여준다.


배우로서의 전성기 이후 지나는 본래의 예술적 열정으로 돌아갔다. 조각가, 화가, 사진작가로 변신한 그녀는 카메라를 들고 소련부터 호주까지 세계를 누볐다. 1974년에는 쿠바의 피델 카스트로와 독점 인터뷰를 성사시켜 화제가 되기도 했다.


"타인을 관찰하는 것이 관찰되는 것보다 재밌다. 다른 사람을 찾음으로써 자신에 대해 알게 된다"는 그녀의 말은 사진가로서의 철학을 보여준다. 그뿐만 아니라 그녀는 자신의 드레스를 직접 디자인하는 패션 감각의 소유자였으며, 훗날 팝스타 레이디 가가는 자신의 독특한 의상 일부가 지나에게서 영감을 받았다고 고백하기도 했다. 또한 배우로서 노래 실력도 뛰어나 뮤지컬 영화에서는 대창 없이 전곡을 직접 소화할 정도였다.


화려한 외모와 재능만큼이나 지나는 수많은 소송을 일으키는 '트러블 메이커'로도 유명했다. 뉴욕 레스토랑에서 음식의 딱딱한 물체가 이를 손상시켰다며 소송을 걸어 승소했고, 같은 시대의 이탈리아 배우 소피아 로렌과는 50년 동안 앙숙 관계를 유지했다.

2006년 79세의 나이에 34살 연하남과의 결혼 소식이 화제가 되었으나, 이후 자신과 닮은 여자를 내세워 혼인 서약을 했다며 무효 소송을 벌여 승소했다. 그녀는 이 관계를 두고 "사랑이 아닌 열정이었으며, 자신은 항상 젊은 남자들에게 약한 구석이 있다"라고 고백했다.

1999년에는 정치에 도전해 이탈리아 상원의원 선거에 무소속으로 출마했으나 1%의 득표율에 그쳤다. 그럼에도 새로운 분야에 도전하는 그녀의 열정은 식지 않았다.


말년에 지나는 예술가들의 집단인 토스카나의 피에트라산타에 여름 별장을 마련하고 첫사랑인 조각 작업에 몰두했다. 그러나 죽기 전 그녀는 자신을 위해 일한 집사에게 재산의 상당 부분을 남기겠다는 유언장을 작성해 아들과 손자와의 법적 다툼을 벌이며 "평화롭게 살고 죽을 권리가 있다"라고 호소했다.


2023년 1월 16일, 95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난 지나 롤로브리지다. 평생 앙숙이었던 소피아 로렌은 그녀의 죽음에 "깊이 슬퍼했다"라고 전해졌다. 경쟁자였지만 동시대를 살아간 예술가로서 서로의 가치를 인정했던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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