빅토리아 시대의 최고 스타
빅토리아 시대의 공기는 지독하게도 눅눅했다. 엄숙주의라는 곰팡이가 피어오르는 런던 사교계에서 릴리 랭트리는 우아한 성직자의 딸이라는 껍데기를 쓰고 등장했다. 대중은 그녀를 에드워드 7세의 침실 언저리에 놓인 화려한 장식품쯤으로 기억하고 싶어 하지만, 그것은 관음증에 매몰된 비루한 시선일 뿐이다.
그녀는 남성들의 욕망이 투사된 평평한 스크린이 아니었다. 오히려 그 욕망의 굴절을 정확히 계산하여 자신의 통장 잔고로 치환할 줄 알았던 영민한 해부학자였다. 그녀의 미모가 찬양받을 때, 그녀는 이미 자신을 상품화하는 시대의 메커니즘을 응시하며 비웃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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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www.youtube.com/watch?v=vRlH0wvbfvU
1874년 에드워드 랭트리와의 결혼은 가난이라는 비린내를 지우기 위한 최소한의 분장술이었다. 안정적이나 권태로운 남편의 품은 그녀에게 좁은 수조에 불과했다. 1877년, 그녀가 장식 없는 검은 드레스를 입고 런던에 나타났을 때 사교계의 속물들은 그것을 '순수'라 명명했다. 하지만 그것은 철저히 계산된 미니멀리즘이었다.
밀레이의 캔버스 위에서 박제된 뮤즈로 박수받는 동안, 릴리는 초상화가 대량 복제되는 근대의 풍경을 관찰했다. 자신의 얼굴이 상점 쇼윈도에 걸리는 현상을 보며, 그녀는 성스러운 성직자의 가르침 대신 자본의 생리를 육화했다. 사교계의 찬사는 그녀에게 경배가 아니라 이용 가치가 있는 부채에 불과했다.
에드워드 왕자와의 염문은 릴리 랭트리라는 브랜드의 가치를 폭등시킨 가장 효과적인 마케팅이었다. 호사가들은 그녀를 '세 번째 정부'라 부르며 서열을 매겼으나, 릴리에게 그 자리는 권력의 시혜를 기다리는 대기석이 아니었다. 1881년 태어난 딸 잔느 마리의 생부가 왕자가 아니었다는 사실은, 그녀가 왕실의 혈통이라는 가짜 승리에 안주하지 않았음을 증명한다. 그녀는 왕자의 총애라는 헐거운 밧줄에 생을 의탁하는 어리석은 여인들과 달랐다. 소문이 번지고 비난이 고조될수록 그녀의 이름값은 천정부지로 치솟았고, 그녀는 그 소음의 크기를 정확히 측정하여 무대 진출의 동력으로 삼았다.
1881년, 릴리는 배우로 데뷔하며 귀족적 태생이라는 마지막 자존심마저 시장 바닥에 내던졌다. 당시 상류층 여성에게 직업 배우란 창녀의 다른 이름에 불과했으나, 그녀에게 관습의 파괴는 곧 생존의 확장이었다.
"왕자의 여자가 구경거리가 된다"는 비루한 호기심을 티켓 가격에 포함시키는 담대함은 가히 폭력적이었다. 비평가들이 그녀의 발성과 무대 장악력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던 것은 그녀가 연기를 잘해서라기보다, 무대 위에서 자신의 삶을 스스로 난도질해 전시하는 그 비정한 성실함에 압도당했기 때문이다. 그녀는 영국을 넘어 미국 투어를 조직하며 대서양을 건넜다. 그것은 도망이 아니라 영토의 확장이었다.
릴리 랭트리의 진정한 결단은 분장실 밖에서 완성되었다. 그녀는 무대에서 벌어들인 돈으로 부동산을 사고 경주마를 길렀다. 빅토리아 시대의 여성들이 남편의 법적 예속 아래서 용돈이나 축낼 때, 그녀는 숫자로 이루어진 차가운 세계를 통치했다. 경마장에서 그녀가 거둔 승리는 단순한 도박의 운이 아니라, 자신을 향한 멸시를 배당률로 바꾸어버린 전략가의 전리품이었다. 그녀는 스캔들이라는 오물을 황금으로 정제하는 법을 알았다. 타인의 시선에 갇혀 부서지기를 거부하고, 스스로 그 파편들을 모아 견고한 자본의 요새를 지은 것이다.
그녀의 생애 끝에 남은 것은 위대한 예술혼도, 지고지순한 사랑도 아니다. 대신 자신의 삶을 스스로 파괴함으로써 얻어낸 서늘한 독립이 남았다. 릴리 랭트리는 빅토리아 시대가 강요한 '천사' 혹은 '요부'라는 이분법적 낙인을 비웃으며, 그 사이의 틈새를 칼날처럼 파고들었다. 그녀는 시대의 피해자가 되기를 거부하고, 기꺼이 냉소적인 관찰자이자 집행자가 되어 자신의 운명을 주물렀다. 여성이 소유물이 아닌 소유주가 될 수 있음을 증명하기 위해, 그녀는 기꺼이 아름다운 시체가 되기를 거부하고 비릿한 현실의 승리자가 되었다. 그 승리는 가짜였을지언정, 그녀가 쥐었던 돈과 권력만큼은 지독하게 실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