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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미인 saga

화려함의 상징이자 매국노라 불렸던 이자보 여왕

by 무체

이자보는 중세 말기 프랑스 샤를 6세의 왕비다. 그녀는 나름의 권위와 위엄을 강조하기 위하여 귀족적 유행을 이끌었고 왕실에서 화려함과 우아함의 상징적 이미지를 주었지만 프랑스 국민들은 그녀를 좋게 보지 않았다. 그녀는 분명히 남편 찰스 6세가 반한 아름다운 외모의 소유자였음에도 대중의 미움이 극에 달한 탓인지 사람들은 그녀에 대한 신체 묘사를 혐오스럽고 뚱뚱하고 추하다고 묘사했다.


하지만 실제로 그녀는 감각이 남달라 아름답고 값비싼 것을 볼 줄 알았으며 유행을 선도하는 데 일조한 여성이었다. 이자보 입장에서는 살아남기 위해 과시용으로 그러니까 왕실의 위엄과 왕실의 부를 과시하기 위해 필요한 꾸밈이었다고 본다.



바이에른에 왕을 배출한 명문가 집안인 비텔스바흐 가문의 딸로 태어난 이자보는 15세 때 프랑스의 샤를 6세와 결혼하여 왕비가 되었다. 당시 11살이던 샤를 6세가 이자보의 초상화를 보고 반해서 3일 만에 청혼했다는데 이자보는 다소 작은 키에 까무잡잡한 피부를 지녔지만 상당히 아름다운 미인이었다고 한다. 이자보는 결혼하면서 지참금을 전혀 가져가지 않았는데 이는 결혼 자체가 양국의 동맹과 우정의 상징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었기 때문이다. 물질적 조건보다 결혼을 통한 정치적 유대에 더 큰 가치를 두었다는 것인데 실제로 당시 프랑스와 영국과 극도로 긴장 관계였기에 바이에른과 동맹을 강화하는 측면에서는 얻은 것이 많았다. 그렇게 둘의 결혼으로 겉보기에 프랑스 재정은 회복되는 것 같았고 정치적으로는 안정된 기미가 보여 전망을 밝게 내다보았다.


하지만 이 어린 커플은 다른 문제에 직면해야 했다. 1348년 페스트가 유럽 전역에 퍼지면서 통제 불능의 상황에 놓였고 인구는 절반 가까이 줄었다. 당연히 프랑스 사람들은 심리적으로 불안과 공포에 떨게 되었고 이들은 원망의 대상을 찾게 된다. 게다가 어린 왕에게는 통제 불능의 간섭하는 친족들까지 설치고 다녔다. 그의 삼촌들은 자신들만의 세력을 구축하고 치세를 하고 탐욕과 부패를 저지르며 나라를 더욱 혼란에 빠뜨렸다. 이로 인해 정부 재정은 더욱 악화되었고 돈 많은 귀족들은 더욱 부와 권력을 휘두르며 왕권을 좌지우지했다.


이런 상황들로 인한 극도로 스트레스가 원인이 되었던지 샤를 6세는 1390년 초반에 정신 이상 증세를 보이기 시작한다. 이자보는 아픈 왕 대신 6명의 딸과 6명의 아들과 나라를 지키는데 집중하였다. 처음에는 멀쩡했으나 광기가 극에 달한 샤를 6세는 지속적인 편집증과 환각 및 망상에 시달리며 변덕을 일삼아 정세를 볼 수 없는 지경에 놓인다.


영국과 프랑스의 냉전을 비롯해 프랑스 귀족 사이의 파벌 싸움 그리고 원망의 대상에 목마른 대중들은 미친 남편을 대신해 섭정을 하고 있는 이자보에게 모든 책임을 덧 씌워 나갔다. 그러다 보니 구설수는 덤으로 따라붙었는데 사치를 일삼고 귀족들과의 불륜 등이 난무했지만 그중에서 남편 샤를 6세의 동생인 오를레앙 공작 루이와 친밀한 관계라는 소문이 가장 치명적이었다.


1415년에는 왕위 계승자인 장남 루이가 장티푸스로 18세에 요절하면서 내우외환은 극에 달하였고 루이가 죽으면서 당시 12세의 차남 존이 왕위 계승자가 되었으나 알 수 없는 요인으로 그도 2년 뒤 사망하였다. 그래서 1417년 막내아들이 14세의 나이로 왕위 계승자가 되었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실질적인 통치를 이자보와 귀족들이 나뉘어하게 되면서 급기야 1418년 부르고뉴 공작 가문이 이끄는 세력이 프랑스 왕실과 경쟁하며 반란을 일으키며 프랑스 수도 파리를 장악하였다.


결정적으로 이자보 여왕이 프랑스에서 매국노 배신자로 불리며 비난의 대상이 된 데에는 1420년 트루아 조약 때문이었다. 이자보 여왕 딴에는 프랑스 내부 혼란을 해결하기 위한 방법이었으나 이는 오히려 분열만 가중시켰고 그녀는 프랑스 국민들로부터 매국노, 배신자라는 비난을 피할 수 없었다. 조약은 다름 아닌 백년전쟁 기간 중 프랑스를 잉글랜드의 지배하에 두는 내용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샤를 6세가 사망하면 잉글랜드 왕 헨리 5세가 프랑스와 잉글랜드를 다스린다는 것이니 한국의 을사조약과 기시감이 든다. 그렇게 이자보는 약속을 공고히 하기 위해 딸 캐서린과 헨리 5세가 결혼까지 하여 사위로 맞았지만 공교롭게도 1422년 샤를 6세와 헨리 5세가 연달아 사망했다. 이후 헨리 6세가 프랑스를 통치하려 했지만 왕권 쟁탈 의지가 강했던 샤를 7세는 잔다르크의 도움으로 프랑스를 재건하고 프랑스 왕으로 즉위하면서 트루아 조약은 무력해졌다.


1435년 9월 24일 65세로 사망한 이자보를 평하자면, 남편을 대신해 어수선한 국정을 정리하기 위해 나름 여성 통치자로서 최선을 다해야 할 의무가 있었다고 본다. 그녀는 나름 균형과 순응을 유지하면서 정치력을 보여주려 하였고 여왕으로서의 특권과 어머니로서의 특권 그리고 섭정의 특권으로 그녀는 자신의 아이덴티티를 강조하려고 애썼다고 보인다. 자신과 가족을 지키기 위한 노력은 했지만 정작 국가의 정체성을 지키지 못한 것은 심각한 패착이었으니 매국노란 소리를 들을 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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