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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미인 saga

루이 15세의 총애를 받은 평민 출신 퐁파두르 부인

by 무체

지성과 미모 그리고 화려한 헤어스타일로 유명했던 잔느 앙투아네트를 소환해 보자. 그녀는 루이 15세의 총애를 받던 후궁이자 프랑스 궁정에서 정치적 문화적 막대한 영향을 미친 여인이다. 프랑스 정치와 외교에 깊이 관여하며 베르사유 조약 그리고 7년 전쟁과 군사 지원 등의 업적은 물론 뛰어난 미모와 세련된 퐁파두르 헤어 스타일을 유럽 전역에 알린 인물로 유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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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21년 12월 29일 비록 평민 출신이지만 부유한 가정에서 태어난 잔느는 다섯 살 때 당대 최고 교육을 받기 위해 우르술린의 수녀원에 들어가게 된다. 그러나 그녀 아버지는 사업 실패로 도망자 신세가 되어 그녀 인생에서 사라졌다. 게다가 그녀는 유년 시절 건강마저 좋지 않아 9살 때 집으로 다시 돌아왔다. 그리고 거의 대부분 엄마 손에서 자라게 된다. 한 번은 그녀 엄마가 그녀를 유명한 점술사에 데려간 적이 있는데 점술사가 그녀를 보고는 훗날 왕의 심장 위에 군림할 것이란 예언을 하였고 이것이 그녀의 운명을 결정하게 된다.


이후로 그녀는 작은 여왕이란 의미의 르넷으로 불리게 되었다. 그녀 엄마는 그녀가 왕의 총애를 받기 위한 관리에 들어간다. 여기서 잠깐, 근세 유럽 왕실에는 코르티잔이란 제도가 있었다. 이는 귀족 사회와 왕실의 후원을 받으며 공인된 정부를 일컫는다. 그리고 잔느는 19세에 샤를 기욤과 결혼하였는데 이 역시 왕의 정부가 되기 위한 나름의 전략이었다. 샤를 기욤은 부유한 금융가 집안 출신이었기에 잔느에게는 안정적인 사회적 지위를 확보하기 최적의 조건이었기 때문이다.


잔느는 남편 사이에서 아들과 딸을 낳았지만, 아들은 어린 나이에 사망하였다. 결과적으로 그녀는 결혼 생활이 행복하지 않았고 점차 파리의 유명한 살롱을 드나들며 수많은 귀족들과 교류하게 된다. 그리고 그녀는 이내 사교계 여왕으로 등극하였다. 요즘 사람들이 부르는 퐁파두르 헤어스타일과는 사뭇 다르지만, 당시 그녀의 부드럽게 뒤로 넘겨 풍성한 볼륨을 주며 각종 장식물을 단 헤어 스타일은 고급스러운 패션 감각을 돋보이게 하며 크게 유행하였다.


당연히 루이 15세도 그녀를 주목하였고 잔느는 그의 정부가 되었다. 당시 평민 출신의 유부녀가 왕의 총애를 받는다는 것은 매우 이례적인 일이었을 테고. 잔느는 남편의 절규에도 미련 없이 이혼하였다. 하지만 결정적으로 잔느는 신체가 너무 허약한 단점이 있었다. 그녀는 백일해와 잦은 감기, 기관지염 그리고 반복된 유산을 했다. 당시 왕의 정부가 출산을 하지 못하고 건강이 좋지 못하다는 것은 버림을 당한 것과 마찬가지였다. 1750년 잔느는 왕과의 육체적 관계를 종료하고 조력자 역할만 하게 되는데 그녀 입장에서 자신의 총명한 두뇌를 이용해 정치적 관여도 하고 채홍사 역할도 하면서 왕을 만족시키는 역할에 최선을 다했다. 그렇게 육체적 관계없이도 평생 자신의 위치를 확실하게 유지한 최고의 애첩이 되었다. 그런 덕분인지 그녀는 퐁파두르 후작이라는 귀족 작위를 부여받았다. 그녀는 왕비와도 사이가 나쁘지 않아 왕비의 행정 전반의 일도 맡아서 잘 수행하였다.


글도 잘 쓰고 춤도 잘 추고 남다른 안목으로 집안을 꾸미는 것부터 옷 입는 스타일이 남다른 것은 물론 세브르 도자기 공장 설립과 로코코 양식 후원 등 문화예술면에서 그녀의 센스를 따를자가 없었다. 하지만 타고난 능력에 비해 건강이 좋지 않아서 43세의 나이에 사망하였다. 그녀의 장례식에 많은 비가 내렸고 왕은 비를 맞으며 눈물을 흘리면서 이 눈물이 그녀에게 줄 수 있는 마지막 선물이라며 비통해할 정도로 몹시 슬퍼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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