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랫동안 민주주의를 인류 정치 체제의 완성형으로 여겨왔다. 그러나 21세기에 접어든 지금, 우리 사회는 민주주의라는 정치 시스템을 넘어 문화주의를 새로운 시대의 이념으로 받아들여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다.
문화주의란 말은 문득 생각난 것인데 1950~70년대 영국 문화연구에서 등장한 용어이다. 일부 학자들은 마르크스주의적 전통 안에서 경제 결정론을 비판하며 인간의 행위와 역사적 경험의 핵심은 단순 계급에 있는 것이 아니라 문화라고 주장했다. 그들에게 문화는 단순한 상징체계가 아닌 삶의 전체 방식이며 사회 분석은 경제 구조뿐 아니라 삶의 감각과 의미 체계까지 포함해야 한다는 관점이었다.
오늘날의 맥락에서 문화주의는 이를 넘어 정치적 패러다임의 근본적 전환을 의미한다. 문화주의는 형식적 투표 절차나 제도적 장치보다 사람들의 일상적 문화 실천, 감수성, 정체성, 그리고 미적 경험을 중심으로 사회를 이해하고 변화시키는 접근이다. 이는 단순한 학문적 개념이 아닌, 현대 사회의 실질적 작동 방식을 포착하는 렌즈이자 새로운 정치적 가능성을 모색하는 시도이다.
이러한 학문적 배경과는 별개로 요즘 민주주의란 이름으로 온갖 패악질을 자행하는 정치인들을 보면서, 자꾸 비난 일색만 할게 아니라 패러다임 자체를 바꿔야 하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정치, 사회적 패러다임의 근본적인 전환이 필요할 때이다. 그리고 실제로 오히려 문화가 정치를 대체하고 있다고 보는 게 맞지 않나 싶기도 하다.
전통적 민주주의 체제에서 권력은 정당, 이념, 정책을 통해 행사되었다. 시민들은 투표를 통해 국가의 방향을 결정하는 주체로 여겼다. 그런데 결과는 권력 남용이었다. 21세기 현대인은 그런 권력자를 하찮게 여기게 되었다. 이제 사람들은 정당보다 브랜드에, 이념보다 취향 그리고 정책보다는 스토리텔링 혹은 콘텐츠에 더 강하게 반응하고 있다. 정치인의 공허한 연설보다 인플루언서의 무심한 한 마디가 더 큰 영향력을 발휘하는 시대가 되었다.
실제로 요즘 국회의원들 보면 우리 안에 갇혀있는 원숭이를 보는 것 같다. 오히려 국회 밖 민심을 담아 얘기하는 사람들의 말이 더 힘이 있고 와닿을 정도이다. 언젠가 횡단보도 위 현수막을 보면서 국회의원 누구라고 쓴 문구보다 당협위원장의 문구가 동급으로 보였다. 아니 임팩트 있는 문구를 쓴 자가 더 우위로 보였고 대체로 국회의원보다 당협위원장의 문구가 더 힘 있게 느껴졌다. 언제부터 세상이 이렇게 바뀐 건지는 모르겠으나 이제 국회의원은 별다른 의미도, 힘도 없어 보인다. 가치가 떨어지는 사람들이 대거 당선된 탓으로 봐도 되는지 모르겠지만 병신과 머저리들이 따로 없다.
이런 현상은 비단 한국만의 문제가 아니다. 전 세계적으로 전통 정치의 영향력은 줄어들고 있다. 미국의 경우 정치적 메시지보다 넷플릭스 시리즈나 유튜브 영상이 사회적 담론을 형성하는 데 더 큰 영향을 미친다. 프랑스의 마크롱이나 캐나다의 트뤼도 같은 정치인들도 전통적 정치인이라기보다 문화적 아이콘으로서의 이미지 구축에 더 신경 쓴다. 이것이 바로 문화주의적 변화의 징후다.
아무튼, 그동안 민주주의가 제도적 선택의 자유를 보장한다고 나불거렸다면 문화주의는 욕망의 기준과 어떤 틀에 갇힌 세계관 자체를 부정하거나 새로 설정한다. 이제 더 이상 투표로 세상을 바꿀 때는 끝난 것 같다. 하찮게 투표수로 몰아붙일게 아니라, 가치의 농도로 선출했으면 좋겠다는 감각적인 생각에 이르게 된다.
그렇게 문화주의 시대는 논리와 주장보다 감각과 정서가 사람을 더 강력하게 움직이는, 소위 감각의 정치학이 중요해졌다. 물론 어떤 정책이 합리적인가도 중요하겠지만 어떤 메시지가 더 와닿는가도 중요해진 세상이다. 경제적 자본이나 정치권력보다 문화적 자본, 그러니까 취향이나 미적 감각 그리고 트렌드에 대한 이해가 사회적 영향력을 결정하는 핵심 요소로 부상했다. 요즘 젊은 층은 이런 변화를 본능적으로 알고 있다.
문화주의는 다음과 같은 방식으로 작동한다:
문화적 상징과 코드를 통한 결집: 정당이나 정치적 이념보다 문화적 코드와 취향 공동체를 중심으로 사람들이 모인다. 환경운동, 페미니즘, 혹은 특정 라이프스타일 추구와 같은 문화적 정체성이 정치적 정체성보다 더 강력해진다.
미학적 정치학: 정책의 내용뿐 아니라 그것이 어떤 미적 경험과 감각을 불러일으키는지가 중요해진다. 특정 정책이 어떤 삶의 스타일, 어떤 감각적 경험과 연결되는지가 그 정책의 지지 여부를 결정한다.
문화적 매개를 통한 정치화: 정치적 메시지가 직접적이고 명시적이기보다 영화, 음악, 미술, 패션 등 문화적 형식을 통해 간접적으로 전달되는 경향이 강해진다.
탈중심화된 영향력: 중앙 권력이나 거대 조직보다 다양한 문화적 결절점(노드)들의 네트워크를 통해 영향력이 분산적으로 작용한다.
윤석열 전 대통령의 가장 큰 실수는 구태스럽게 수직적 권력 구조를 지향했다는 데 있다. 위계적 권력 구조보다 수평적 네트워크를 통한 영향력을 확산했어야 하는데, 자신보다 똘똘한 한동훈을 내치기에 급급했다. 결국 국민의 힘이 아닌 질투의 힘으로 몰락하고 말았다. 더 정확히는 앞에 제대로 나서지 못한 김건희의 질투였겠지만, 감 떨어지는 민주화 팔이 구태 세대들은 아직도 왕조 시대인 줄 알고 대통령 부부를 감싸는 데 급급했었다. 정보의 격차가 컸다고 할 수밖에. 그렇지 않고선 그렇게 어리석게 굴 수는 없는 거지. 세상이 달라졌다. 한 사람의 대통령보다 수백만 팔로워를 가진 인플루언서나 집단의 영향력이 압도적으로 커졌다. 좌파 우파 같은 이분법적 이념의 시대는 갔다. 지역감정 따위도 의미 없어진 지 오래고 친중이니 친미 이런 거 따지는 것도 의미가 퇴색되었다. 사람들은 이제 정치적 이념보다 문화적 정체성에 더 관심이 높다. 취향이 인종과 지역 그리고 이념을 앞서고 있다. 그런데 아직도 자유 타령 보수 타령 민주주의 타령하는 정치인들이 너무 후져 보이는 이유다.
이런 시대에 필요한 리더십은 어떤 것인가? 문화주의 시대의 리더는 더 이상 권위적 결정자가 아니라 문화적 흐름을 읽고 창조적으로 연결하는 존재여야 한다. 해외에서는 이미 이러한 변화가 감지된다. 뉴질랜드의 아던 전 총리는 전통적인 정치인보다 문화적 연결자에 가까웠다. 그녀의 진정성 있는 소통 방식과 감정적 지능은 정책 그 자체만큼이나 중요했다. 아이슬란드의 요한나 시귀르다르도티르 전 총리도 포용적 문화와 창의성을 강조하는 리더십으로 주목받았다.
국내에서는 검사 출신 정치인이라고 하기에는 압도적으로 감각 있는 한동훈이 이러한 새로운 유형의 리더십을 보여준다. 남편은 한동훈의 음악 취향에 반했고 나는 그의 문학 취향에 반했다. 어떤 이는 그의 Ai 혁명과 보편적 복지 등 해박한 지식에 반하기도 했고. 밀리터리 덕후에, 물리학 덕후에 심지어 기타에도 관심이 높다. 인간적으로 매력 있는 요소를 잔뜩 가지고 있다. 어른들 눈에는 가정교육 잘 받은 예의 바른 사람이고 또래의 눈에는 자기 관리 잘하고 감각 있는 멋쟁이, 그리고 그보다 어린 사람들 눈에는 취향도 비슷하고 권위가 없어서 친근하기까지 하다. 이런 정치인은 여태 본 적이 없다. 그는 기존 권력에 묶이지 않은 새로운 유형의 인간이다. 혼자 책을 읽으며 걷다가 연못에 빠졌었다는 얘기를 무심하게 할 때, 어디에서든 신발을 가지런히 놓을 줄 알면서도 세상 둘도 없는 길치라 번번이 길을 잃는 그. 국가 관료 출신 중 이렇게 말 잘하고 글 잘 쓰고 문화 예술에 조예가 깊은 사람은 본 적이 없다.
이른 나이에 검사가 된 것을 인생 제일 큰 성공을 했다며 만족할 줄 알았던 그에게 세상은 자꾸 직책을 맡겼다. 하는 일마다 잘했다. 정치인도 그가 원해서 한 일은 아니었다. 그런데 누구보다 열심히 훌륭히 잘 해냈다. 그래서 윤석열 부부의 질투가 극에 달했다. 공정하지 못하고, 구태의 권력 맛을 지속해서 누리고 싶은 인간들은 지속해서 한동훈을 까내리고 모욕을 주기에 급급했지만 한동훈은 그야말로 꿋꿋이 제 할 일을 해냈다. 사심이나 사욕이 컸다면 감당할 수 없으리만큼 굴욕적인 상황이 많았음에도. 그런데 그 흔한 정치 유튜브 따위 안 봐도, 편향된 종편 뉴스 같은 거 안 봐도 하찮은 패널들의 해석 따위 안 들어도 아는 사람들은 다 안다.
물론 문화주의가 만능은 아니다. 문화주의 시대에도 새로운 위험이 존재한다. 문화적 헤게모니를 가진 테크 기업들이나 플랫폼이 알고리즘을 통해 우리의 취향과 선호를 조작할 수 있다. 문화적 자본이 새로운 형태의 불평등을 만들 수도 있다. 감성에 호소하는 메시지가 깊은 숙의와 합리적 토론을 대체할 위험도 있다.
그러나 이러한 위험에도 불구하고, 문화주의는 보다 다양하고 창의적인 정치적 상상력을 가능하게 한다는 점에서 기존 민주주의보다 더 많은 가능성을 품고 있다. 문화주의는 기존의 제도적 장벽과 관습적 경계를 넘어, 보다 다양한 목소리와 경험이 정치적으로 표현될 수 있는 공간을 열어준다.
또한 문화주의는 단순한 이념적 대립을 넘어 공감과 감정적 연결을 통한 새로운 형태의 연대를 가능하게 한다. 기후 위기와 같은 글로벌 도전에 대응하기 위해서는 제도적 변화뿐 아니라 라이프스타일과 가치관의 근본적 전환이 필요한데, 이는 문화주의적 접근을 통해 더 효과적으로 이루어질 수 있다.
나는 한동훈과 같은 새로운 유형의 정치인을 보며 문화주의를 떠올렸다. 문화주의 부상은 피할 수 없는 시대적 흐름이다. 민주주의가 정치 제도로서 여전히 중요하지만 그것만으로는 충분치 않은 시대가 되었다. 투표로 나라를 바꾸는 게 아닌 밈과 콘텐츠로 나라가, 세상이 바뀌는 시대가 되었다. 따라서 새로운 시대에 걸맞은 사람들로 물갈이가 되어야 한다. 콘텐츠를 읽지 못하는 정치인은 이제 쓸모가 없다. 문화가 정치 영역을 장악하는 헤게모니가 되었다. 이념 일색으로 선동하는 문화예술인도 재고 대상이다. 이미지와 언어, 감정과 법률을 잇는 새로운 리더십의 문법을 새로운 유형의 정치인들이 보여주고 있다. 문화주의 시대에 걸맞은 지도자 상이다.
문화주의가 민주주의를 완전히 대체할 수는 없겠지만, 민주주의의 한계를 보완하고 확장하는 새로운 패러다임으로 자리 잡을 수 있다. 문화주의적 민주주의, 또는 민주적 문화주의라는 새로운 정치적 지평을 열어갈 때다.
문화주의에서 필요한 건 말 잘 듣는 국민이 아닌 같이 갈 동료가 필요할 뿐이다. 이것이 바로 민주주의 이후 시대, 문화주의 시대의 핵심 가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