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른둘, 책 한 권을 끝까지 읽던 날

3000권 읽은 아빠가 아들에게 전하는 독서이야기

by 우노단주

서른둘이었다. 직장생활 4년 차, 일은 익숙해졌지만 마음은 늘 허전했다. 아침에 눈을 뜨면 출근하고, 저녁이 되면 퇴근하는 반복 속에서, 나는 내가 어디로 가고 있는지 알 수 없었다.


아들이 막 초등학교에 들어가던 해였다. 어느 날 저녁, 아이가 서툰 손으로 책장을 넘기며 한 글자 한 글자 소리 내어 읽는 모습을 보았다. 그 모습을 지켜보다가 문득 이런 생각이 스쳤다.


"나는 언제 마지막으로 책 한 권을 끝까지 읽어봤을까."


그 질문은 내 가슴 한가운데를 후벼 팠다. 정말로, 진심으로, 한 권의 책을 처음부터 끝까지 읽어본 게 언제였는지 기억나지 않았다. 그날 밤, 나는 스스로에게 솔직해지기로 했다. 능력이라 부를 만한 게 없었고, 내세울 만한 것도 없었다. 스스로가 너무나 초라하게 느껴졌다.


무언가를 바꾸고 싶었지만, 방법을 몰랐다. 그래서 선택한 게 '독서'였다. 사실 거창한 결심은 아니었다. 그냥 뭐라도 해야 할 것 같았고, 책은 가장 쉽게 시작할 수 있는 것처럼 보였다.


나는 서점에 가서 베스트셀러 진열대 앞에 섰다. 제목도, 저자도 중요하지 않았다. 그냥 시작하는 것이 중요했다. 집에 돌아와 책을 펼쳤다. 그런데 이상했다. 활자들이 머릿속에 들어오지 않았다. 눈으로는 글자를 따라가는데, 뇌는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다.


한 페이지를 읽고 나면 앞의 내용을 까먹었고, 책장을 덮으면 공허함만 남았다. '읽는다'기보다, 그냥 '본다'는 표현이 맞았다. 하지만 나는 포기하지 않았다. 다른 대안이 없었으니까. 그렇게 하루, 이틀, 일주일, 한 달을 버텼다.


한 달이 지나자 조금씩 변화가 생겼다. 여전히 집중은 안 됐지만, 글자들이 조금씩 의미를 갖기 시작했다. 석 달쯤 지났을 때는 출퇴근 지하철에서도 책을 읽기 시작했다. 책을 읽는 것이 일상의 일부가 되었다. 그리고 놀랍게도, 책이 더 이상 지루하지 않았다.


그리고 여섯 달쯤 지나던 어느 날이었다. 저녁을 먹고 소파에 앉아 평소처럼 책을 읽고 있었다. 그런데 그 순간, 이상한 경험을 했다. 그동안 읽던 문장들이 마음속에서 조용히 연결되기 시작했다. 한 문장이 내 안에 들어와 자리를 잡았고, 그 문장에서 또 다른 생각이 피어났다. 책 속의 이야기가 내 삶과 겹쳐졌다. 그때 깨달았다.


'아, 이제야 책이 나에게 말을 걸기 시작하는구나.'


그날 밤, 나는 평생 처음으로 책 한 권을 끝까지 읽었다. 마지막 페이지를 덮을 때, 뭔가 벅찬 감정이 밀려왔다. 그 한 권의 책은 나를 바꾸진 않았다. 하지만 그 책을 끝까지 읽은 '내 자신'을 바꿔놓았다. 나는 처음으로 내가 무언가를 해냈다는 느낌을 받았다. 아무도 강요하지 않았고,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일이었지만, 나는 스스로에게 약속을 지켰다.


돌이켜보면 변화는 결심으로 오는 게 아니었다. 변화는 매일 밤, 졸린 눈으로 한 페이지를 넘기던 그 시간들 속에 있었다. 그 꾸준함이 내 삶을 조금씩 다른 방향으로 이끌고 있었다.


책을 읽기 시작한 그날 이후, 나는 세상을 조금 다르게 보기 시작했다. 출근길 지하철에서 스마트폰을 보는 대신 책을 읽었다. 회사에서 점심을 먹고 남은 시간에 책을 펼쳤다. 그리고 책은 또 다른 책으로 이어졌다. 한 권을 읽고 나면, 그 책 속에서 언급된 다른 책이 궁금해졌다.


세상이 변한 게 아니었다. 세상은 여전히 복잡하고, 힘들고, 때로는 불공평했다. 하지만 그 세상을 바라보는 '내 안의 시선'이 변하기 시작했다. 나는 이제 좀 더 깊이 생각할 수 있게 되었고, 좀 더 넓게 볼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나 자신을 조금 더 믿을 수 있게 되었다.


그 후로 십 년이 지났다. 나는 여전히 평범한 직장인이다. 하지만 서른둘 그 날 밤, 책 한 권을 끝까지 읽은 내가 시작한 여정은 아직도 계속되고 있다. 그리고 그 여정은 내 인생에서 가장 값진 선택이었다고, 지금의 나는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