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00권 읽은 아빠가 아들에게 전하는 독서이야기
독서를 시작하면서 나는 큰 실수를 했다. 베스트셀러 목록에 있는 책, 사람들이 추천하는 명저, 어려워 보이는 고전을 무작정 집어 들었다. '이런 책을 읽어야 똑똑해지겠지'라는 생각이었다. 하지만 결과는 참담했다. 한 페이지를 읽는데 삼십 분이 걸렸고, 읽고 나면 아무것도 남지 않았다. 그저 활자만 눈으로 훑었을 뿐이었다.
그렇게 몇 달을 헤매다가 우연히 '스키마'라는 개념을 알게 되었다. 그 순간 모든 게 이해됐다. 내가 책을 읽지 못했던 이유가.
스키마란 우리 뇌 속에 저장된 지식의 틀이다. 마치 서랍장처럼, 새로운 정보를 분류하고 저장하는 정신적 체계다. 우리가 무언가를 이해한다는 건, 새로운 정보를 기존 스키마에 연결시키는 과정이다. 그런데 만약 그 서랍장 자체가 없다면? 새로운 정보는 그냥 공중에 떠돌다 사라진다.
내가 어려운 책을 읽지 못했던 이유가 바로 그것이었다. 스키마가 없었던 것이다.
예를 들어보자. 경제학 책을 처음 읽는다고 가정해보자. "중앙은행의 양적완화 정책이 자산시장에 미치는 영향"이라는 문장이 나온다. 경제학 배경지식이 있는 사람은 이 문장을 읽는 순간 머릿속에서 여러 개념이 연결된다. 중앙은행, 통화정책, 금리, 유동성, 자산가격. 이 모든 게 하나의 그림으로 그려진다.
하지만 스키마가 없는 사람은? 각 단어의 뜻은 사전에서 찾을 수 있다. 하지만 그게 전부다. 단어들이 연결되지 않는다. 문장을 열 번 읽어도 이해가 안 된다. 왜냐하면 그 정보를 담을 서랍장이 애초에 없기 때문이다.
이게 바로 많은 사람들이 독서에서 좌절하는 이유다. 자신의 수준을 고려하지 않고 무작정 어려운 책부터 집어 든다. '난 똑똑하니까 이 정도는 읽을 수 있겠지.' 하지만 독서는 지능의 문제가 아니다. 스키마의 문제다.
나는 이걸 깨닫고 나서 전략을 완전히 바꿨다. 어려운 책을 포기하고, 쉬운 책부터 읽기 시작했다. 경제학 전문서 대신 경제 입문서를 읽었다. 철학 원전 대신 철학 해설서를 읽었다. 처음엔 자존심이 상했다. '이런 쉬운 책을 읽다니.' 하지만 결과는 놀라웠다.
쉬운 책은 술술 읽혔다. 이해가 됐고, 재미있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머릿속에 남았다. 한 권을 읽고 나니 기본 스키마가 생겼다. 그 상태에서 조금 더 어려운 책을 읽으니 이번엔 그 책도 이해가 됐다. 새로운 정보가 기존 스키마와 연결되기 시작한 것이다.
그렇게 단계적으로 읽어 나갔다. 입문서 → 중급서 → 전문서. 각 단계에서 스키마가 쌓이고, 그 스키마가 다음 책을 읽을 수 있는 발판이 되었다. 1년 후, 나는 처음에 읽지 못했던 그 어려운 책을 다시 펼쳤다. 그런데 이번엔 달랐다. 읽혔다. 이해가 됐다. 같은 책인데, 내 스키마가 달라진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착각한다. '좋은 책'을 읽어야 한다고. 명저를 읽어야 한다고. 하지만 그건 반쪽짜리 진실이다. 중요한 건 '좋은 책'이 아니라 '내 수준에 맞는 책'이다. 아무리 명저라도 내 스키마 수준을 훨씬 넘어선 책이라면, 그건 나에게 좋은 책이 아니다.
초등학생에게 대학 교재를 줘봐야 아무 소용없다. 그 아이에겐 초등학생 수준의 책이 필요하다. 독서도 마찬가지다. 지금 당신의 스키마 수준에서 한 계단 위의 책을 읽어야 한다. 너무 쉬우면 지루하고, 너무 어려우면 이해가 안 된다.
그렇다면 어떻게 내 수준에 맞는 책을 고를 수 있을까? 간단한 방법이 있다. 책을 펼쳐서 아무 페이지나 읽어보라. 한 페이지를 읽었을 때, 70~80% 정도 이해가 된다면 그게 당신 수준에 맞는 책이다. 100% 이해된다면 너무 쉬운 책이고, 50% 이하라면 너무 어려운 책이다.
7080%가 중요한 이유는 이렇다. 대부분은 이해되니까 읽을 만하다. 하지만 2030%는 새로운 정보니까 배울 게 있다. 그 새로운 정보가 기존 스키마와 연결되면서 당신의 지식은 확장된다. 이게 바로 성장하는 독서다.
독서는 건물을 짓는 것과 같다. 1층 없이 2층을 지을 수 없고, 2층 없이 3층을 지을 수 없다. 많은 사람들이 1층도 없는 상태에서 10층을 지으려 한다. 그래서 무너진다. 책을 읽다가 포기한다. 그리고 말한다. "나는 독서에 소질이 없나 봐."
아니다. 소질의 문제가 아니다. 순서의 문제다.
나는 이제 새로운 분야의 책을 읽을 때 절대 서두르지 않는다. 제일 쉬운 입문서부터 찾는다. 그 책이 너무 쉽더라도 상관없다. 그 쉬운 책으로 기초 스키마를 만든다. 그리고 천천히 올라간다. 급할 게 없다. 어차피 독서는 평생 할 일이니까.
당신이 지금 어떤 책에서 헤매고 있다면, 그 책을 잠시 내려놓아라. 그리고 물어보라. "내게 지금 필요한 건 이 책이 아니라, 이 책을 읽기 위한 스키마가 아닐까?" 그 질문이 당신을 더 쉬운, 하지만 더 필요한 책으로 이끌 것이다.
독서는 스키마를 쌓는 과정이다. 한 권 한 권이 쌓여 당신의 지식 체계를 만든다. 그러니 조급해하지 마라. 지금 당신 수준에 맞는 책을 읽어라. 그게 가장 빠른 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