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발적 호구의 관계관리법
지난 편까지 [자발적 호구의 표현법]을 통해, 무례한 세상에서 우아하게 나를 지키며 말하는 법에 대해 이야기했다. 그 시리즈를 함께 하다보면 이런 생각이 들었을 수 있다. "그렇게까지 해서 사람을 만나야 하나? 그냥 안 보고 사는 게 답 아닐까?"
그렇다. 요즘 서점가와 유튜브를 강타하는 키워드는 단연 '손절'이다. 인간관계에 지쳐 "그냥 나 혼자 편하게 살란다"고 선언하는 사람들이 늘어났다. 수많은 자기계발서와 멘토들 역시 입을 모아 조언한다. "당신을 힘들게 하는 사람을 과감히 잘라내라." "에너지 뱀파이어와는 상종도 하지 마라."
솔직히 말해, 듣기만 해도 속이 시원하다. 나 역시 그랬다. 사회 생활의 대부분을 '을'로 살아왔던 나는 매일 밤 다짐했었다. "내가 성공만 해봐라. 내 신경을 긁는 저 인간들부터 모조리 차단해버릴 테다."
사람은 누구나 스스로를 가장 귀하게 여긴다. 지극히 당연한 본능이다. 하지만 비극은, 나와 관계를 맺는 '타인' 역시 스스로를 우주의 중심이자 가장 귀한 존재로 여긴다는 사실에서 발생한다.
내 입장에서는 선의로 건넨 조언이 상대에게는 비수가 되어 꽂히기도 하고, 상대방의 별것 아닌 무심한 눈빛 하나에 나 홀로 밤을 지새우며 의미를 부여하고 괴로워한다.
"도대체 저 사람은 왜 내 마음을 몰라줄까?" (타인에 대한 원망)
"아, 그때 그 말은 하지 말걸..." (스스로에 대한 후회)
이처럼 '나'와 '타인' 사이의 좁혀지지 않는 간극에서 우리는 필연적으로 피로감을 느낀다. 그러니 "차라리 아무도 만나지 않으면 상처받을 일도 없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드는 것은 어쩌면 인간으로서 당연한 귀결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손절'만이 정답일까?
나는 감히 "아니다"라고 단언한다.
우리가 간과하는 냉혹한 현실이 하나 있다. 그렇게 마음에 안 드는 사람들을 모두 '손절'하고 나면, 남는 것은 과연 편안하고 행복한 '나'일까? 아니면 고립된 '섬'일까?
광고대행사에서 수많은 광고주를 상대하고, 이후 방문 판매 대리점을 운영하며 '갑'과 '을', '판매자'와 '고객'이라는 다양한 층위의 사람들을 만났다. 그 치열한 현장에서 내가 뼈저리게 깨달은 진리가 있다.
우리가 인간관계를 '포기'하는 순간, 사실은 인생의 수많은 '기회'도 함께 포기하게 된다.
내가 아직 풋내기 광고쟁이였던 시절, 나를 유독 힘들게 하던 광고주가 있었다. 그는 변덕이 죽 끓듯 했고, 무리한 요구를 당연하다는 듯이 해댔다. 우리팀의 술자리에 단골 레퍼토리는 "저 사람과 더는 못 한다", "그냥 계약 해지하자"로 시작해, 어떻게 하면 '그 인간 면상에 대고 멋지게 작별 통보를 할 것인가'를 상상 시연해보는 일이었다. 감정적으로만 보면 당장이라도 책상을 엎고 나오는 것이 '사이다'였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그 관계를 끊지 않았다.(솔직히 못 끊은 것일 수 있다.) 대신 '관리'하기로 했다. 우리의 감정을 죽이고 억지로 비위를 맞추는 '호구'가 되기로 한 것이 아니다. 전략적으로 그 사람이 원하는 것을 파악하고, 그 까다로움을 역이용해 우리의 성과로 연결하는 '자발적 호구'가 되기로 선택한 것이다.
결과는 어땠을까? 그 '진상' 광고주는 훗날 우리 팀의 수백억 원짜리 광고 수주 기회를 연결해 주는 가장 강력한 조력자가 되었다. 만약 그때 우리가 감정의 파도에 휩쓸려 그를 '손절'치고 들이받기라도 해버렸다면? 그 뒤에 이어진 기회들은 당연히 잡지 못했을 것이다. 자존심 하나 지키자고 미래를 쓰레기통에 처박는 꼴이 되었을 테니까.
이것이 내가 말하는 이른바 '손절할 수 없는 이유'다.
우리는 섬이 아니다. 현대 사회에서 모든 성공, 모든 기회, 심지어 우리가 느끼는 행복감조차 결국은 '사람'을 통해 들어온다. 돈은 사람이 가지고 있고, 기회는 사람의 입에서 나온다. 관계가 힘들다고 해서 문을 닫아거는 것은, 내 집으로 들어오는 보급로를 스스로 끊어버리고 굶어 죽기를 자처하는 것과 같다.
"그래서, 결국 마음에 안 드는 사람 비위나 맞추며 살라는 건가?"
아마 지금쯤 이런 반감이 들 수도 있겠다. 내가 앞으로 이 새로운 시리즈를 통해 당신에게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는 '억지로 참으라'는 패배주의적 조언이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다. 나는 당신이 더 철저하게 이기적이었으면 좋겠다.
관계를 끊어내지도 못하면서 속으로 끙끙 앓고, 뒤에서 욕이나 하며 스트레스를 받는 사람. 우리는 이런 사람을 '그냥 호구'라고 부른다.
반면, 감정적으로 폭발해 관계를 망치고, 그 관계 뒤에 숨어 있는 소중한 기회까지 잃어버리는 사람. 우리는 이런 사람을 '바보'라고 부른다.
우리는 이 둘 중 어디에도 속해서는 안 된다.
상처받지 않으면서, 내 몫은 확실히 챙기면서, 현명하게 관계를 '관리(Management)'하는 기술이 필요하다. 때로는 겉보기에 '착하게', 혹은 '이용당하기 쉽게' 보이는 태도가 필요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것은 내가 무지해서 당하는 것이 아니다. 더 큰 것을(매출, 평판, 정보, 기회 등) 얻기 위해 내가 판을 짜고 전략적으로 움직이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자발적 호구'의 길이다.
자발적 호구는 겉으로는 지는 것 같지만, 실속은 다 챙긴다. 엉킨 실타래를 가위로 싹둑 잘라버리는 것이 아니라, 인내심을 가지고 풀어내어 결국 황금 옷을 지어 입는 사람이다.
이제 선택은 당신의 몫이다.
매번 관계에 지쳐 사람을 잘라내고, 점점 좁아지는 인간관계 속에서 고립된 채 "나는 혼자가 편해"라고 자위하며 살 텐가?
아니면, 지긋지긋한 관계조차 나의 자산으로 바꾸어내는 '관계의 연금술사'가 될 텐가?
앞으로 이어질 [인간관계 관리] 시리즈에서는, 뜬구름 잡는 위로가 아닌 구체적인 실전 기술들을 다룰 것이다. '사람의 마음을 얻는 기술'과 '현명하게 거절하면서도 내 편으로 만드는 방법' 등, 관계 관리의 구체적인 솔루션들을 하나씩 풀어놓을 예정이다.
인간관계 때문에 더 이상 고통받고 싶지 않다면, 오히려 사람을 통해 더 많은 기회를 얻고 싶다면, 다음 글을 기대해도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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