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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튤립 Aug 02. 2021

너의 사랑을 말해줘

서평: 가슴 뛰는 소설


"단편 로맨스 소설 모음집?"

 나는 사랑에 회의적인 사람이었고, 단편소설 모음집을 싫어했다. 아마 처음 접한 단편 모음집이 「한국 단편소설 베스트 39」였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입시에 찌든 고등학생의 몸으로 근현대를 배경으로 한 잔뜩 암울한 이야기들을 읽고 있자면 나도 모르게 울적해져 하루 종일 물에 젖은 빨래처럼 무겁게 흐느적거렸다. 그리고 시간이 흐르고 흘러 어른이 된 지금, 진열대에 놓인 강렬한 마젠타 핑크에 시선을 빼앗기고 말았다. 읽을 것인가 말 것인가.


 무려 제목은 「가슴 뛰는 소설」. 홀린 듯 집어 든 책엔 익숙한 이름이 눈에 띄었다. 정세랑 작가였다.「시선으로부터」,「보건교사 안은영」 등을 쓴 그녀의 단편 소설은 154쪽부터라고 했다. 서점 한 구석에 서서 짧은 이야기인 '웨딩드레스 44'를 읽었다. 그리고 아무렇지도 않게 다시 책을 덮고, 계산을 하고, 근처 카페로 향했다. 그날은 이상하게도 이 작은 사랑이야기들에 흠뻑 젖어들고 싶었다. 아홉 개의 이야기 중 내 마음을 빼앗은 건 최진영 작가의 '첫사랑'이라는 작품이었다.


p.18
  교실 뒷문에서 누군가가 J를 불렀다. 나를 부른 게 아닌데도 나는 고개를 들었다. 창가에 앉아 있던 J가 고개를 돌려 저를 부른 아이를 쳐다봤다. 그리고 환하게 웃었다.

  아름다웠다.

  가슴이 뛰었다. 머릿속 굵은 핏줄 하나가 터져 버린 듯 심각한 두통이 밀려왔다. 손발이 저렸다. 나도 모르게 발을 굴렀다. 몸이 둥실 떠올랐다. J가 웃을 때마다 콩콩, 머리로 교실 천장을 박았다.


 책장을 넘기면서, 켜켜이 쌓인 먼지 아래에 잊고 있던 기억이 떠올랐다. 다시 돌아갈 수 없는 시간의, 구겨져버린 한 페이지에 자리하고 있는 사람. 이야기는 참으로 신기하다. 분명 다른 삶의 장면을 읽고 있음에도 나의 인생으로 불쑥 들어와 옅은 손으로 기억을 들춰내게 한다.

 나도 항상 창가에 앉는 걸 좋아했던 이를 알고 있었다. 그는 수업시간 내내 흘러가는 구름과 운동장을 바라보곤 했다. 가끔은 코끝에 땀방울이 송글 맺히기도 했다. 햇살이 따가워서 피부가 타버릴까 걱정했지만, 이상하게도 늘 뽀얗고 창백한 게 신기해서 나는 반쪽만 보이는 그의 얼굴을 더 오래 바라보기 일쑤였다. 그리고 그가 웃을 때, 나도 똑같이 콩콩, 몸이 둥실 떠올라 창문 언저리로 향했다.


p. 22
  적막한 운동장 한구석, 서로를   없는 어딘가에서 나는 커피를 마시고 J 담배를 피웠다. 그렇게     동안, 우리는  시간  장소의 바람과 햇살과 고요를 공유했다. 가끔 J 뒷모습이 보이지 않을 때도 있었다. 그럴 때면 초록색을 칠하지 않은 풍경화처럼 나의 감각은 미완으로 남아 버렸다.
 J 나는 같은 반이었지만 서로  한마디 나눠   없었다. 가까워지고 싶은 마음이 클수록  곳으로 도망가게 되는 경우가 있다. 나는 일부러 J 피했다. 아무 감동도 느낌도 없이 시시껄렁한 농담이나 주고받는 애들  하나가 되고 싶진 않았다.


 누구나 사랑하는 사람에게 특별한 존재가 되고 싶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상대방에게 내가 그런 존재가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되는 순간, 낱낱이 해체되어 좌절하고 슬퍼한다. 우리는 왜 서로가 서로에게 가장 첫 번째의 존재가 될 수 없는 걸까? 누군가에게 소중한 존재가 된다는 사실을 모두가 중요하게 여겨줬으면. 하찮게 여기지 말아 줬으면. 가까워지고 싶은 마음이 너무나도 커져버려 도망치지 않게, 붙잡아줬으면.


p.28
  그날 역시 죽고 싶다는 내용과 J에 대한 이야기로 일기장을 채웠다. '아름답다'란 단어를 반복해서 쓰기도 했다. '아름답다'와 '사랑'은 지구와 달처럼 늘 함께 움직였다.


 가장 처음의 마음으로 누군가를 사랑하게 된다는 건 아주 멋진 일이기도 하지만 고통스러운 일이기도 하다. 마음이 널을 뛰고, 이성이 녹아내려 머리가 아닌 가슴으로 생각을 하게 된다. 그래서 그 사람의 행동 하나에, 말 한마디에 눈물을 흘리고, 기뻐하고, 상처 받는 하루하루를 보내게 된다.


 지구와 달처럼 늘 함께 움직이는 단어들을 종이에 빽빽하게 옮겨 적으며,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말이 공책을 까맣게 뒤덮을 때까지, 그렇게. 사랑의 원형에 대하여 고뇌를 거듭한다. 시간이 흐르고 흘러 그 빛이 바래 추억 한 귀퉁이에 자리하게 된다면, 아마 나도 이렇게 담담하게 이야기를 적어 내려갈 수 있을까?


 최진영 작가의 복잡 미묘한 첫사랑 이야기를 지나 누군가에게 필요한 사람이기에 사랑에 빠진 박상영 작가의 '햄릿 어떠세요?'와 사랑하는 사람에게 숨기고 싶은 콤플렉스에 대해 이야기한 최민석 작가의 '괜찮아, 니 털 쯤은'을 읽고 나면 이지민 작가의 '그 남자는 나에게 바래다 달라고 한다'를 만날 수 있다.


 사랑의 방식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는 이 작품은 읽는 내내 연애에도 부등식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깨닫게 했다. 마음의 크기가 가져오는, 서로에 대한 관심의 크기가 가져오는 간극. 그걸 알고 있으면서도 놓지 못하는 여자. 그래서 마지막으로 얻은 기회에 최선을 다 하는 여자.


p.129
  그가 혼자만 보며 갖고 놀았던 마리오네트는 바로 나였다는 사실을. 그의 장인에 가까운 손짓 아래 나는 앉았다 일어났다 웃었다 울었다 하며 살아 있는 척을 했다. 그래도 나는 행복했다. 인형은 자신과 주인을 연결해 주는 몇 개의 줄이 얼마나 가는지 알 수 없는 법이니까.
p.141
  그와 다시 시간과 공간을 나눌 수 있게 되었다는 것만으로도 나는 만족했다. 거창하게 나를 위로하자면 그건 그와 함께 어떤 작은 우주를 공유하게 된 것이니까.


 남들이 뜯어말리는 관계에도, 먼지만큼도 동등하지 못한 관계임에도 그녀는 만족한다. 아마 마지막까지 최선을 다하면, 최소한 후회는 남지 않을 테니까. 그래서 그녀는 함께 공유하게 된 하루의 짧은 조각에 그녀의 전부를 건넨다.


p.143
  어쩌면 자신이 사랑하는 방식을 이해하는 것이 사랑의 전부 인지도 모르겠다. 이미 상대는 정해졌고 마지막은 어차피 알 수 없다. 그 불안한 과정을 견디거나 즐기거나, 선택은 각자의 몫인 것이다. 사실 나도 나의 판단에 확신이 넘치는 것은 아니었다. 단지 그를 바라보는 것으로 만족한다. 이것은 내가 할 수 있는 최고의 위선과 가식의 말이었다. 그러나 그런 한심한 연애를 펼치고 있는 나였지만 한 가지는 자신할 수 있었다. 적어도 나는 나 자신의 위선은 알고 있었다. 행복한 연애와 편한 연애를 착각할 염려는 없었던 것이다.


 행복하지도, 편하지도 않은 연애임에도, 그녀는 계속 같은 곳으로 걸음을 옮긴다. 으레 지치기 마련인, 집으로 돌아가는 길을 걷고, 또 걷는다. 아마 이 글을 읽는 누군가는 바보 같다고, 미련하다고 비난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는 그런 마음이 조금은 이해가 갔다. 사랑을 하면 누구나 바보가 되곤 하니까. 아직 그녀의 마음에 그에 대한 사랑이 활활 타오르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최선을 다해서 연소하면, 아마 그녀는 미련 없이 뒤돌아설 수 있을 것이다. 그러면, 그녀는 다시 바보가 아닌 사람으로 돌아올 테니, 걱정하지 않아도 좋다.


 그다음의 이야기는 정세랑 작가의 '웨딩드레스 44'였다. 사랑과, 결혼 사이의 무수히 많은 다양한 모양과 결에 대해 이야기하는 이 이야기는 마흔네 커플의 이야기를 담고 있었다. 그중 가장 마음에 남은 커플의 이야기는 바로 이것이다.


p. 176
주말이 좋았다. 따뜻한 빵 위에 차가운 잼. 각자의 노트북을 무릎에 펼치고 샤워를 건너뛰었다.


아무렇지도 않게 평범한 일상을 공유하고, 샤워를 건너뛰고 조금 엉망인 머리카락을 하고 앉아 각자의 일을 해도 전혀 어색하지 않은 그런 삶. 아마 부부가 공유해야 하는 삶은 이런 모습이 아닐까, 하고 생각하게 만든다.


 웨딩드레스가 다 낡아 수명을 다할 때까지의 이야기를 읽고 나면 백수린 작가의 '폭설'이 기다리고 있다. 결혼 이후에 새로운 사랑이 찾아온다면 어떻게 해야 할지, 그 원망과 상처를 어떻게 치유할 수 있는지에 대해 엄마와 딸의 이야기로 풀어낸다.


 눈이 잔뜩 내린 도로를 지나 일곱 번째 이야기인 권여선 작가의 '봄밤'을 읽다 보면 삶의 마지막 순간까지,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견뎌내는 삶들도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타인을 위해 나의 고통을 숨기고 버텨낸다는 것을, 사랑이 아닌 다른 어떤 단어로 설명할 수 있을까.


 여덟 번째 이야기는 홍희정 작가의 '앓던 모든 것'이다. 우리가 나이를 들어서도 누군가를 사랑할 수 있는지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는 이 짧은 소설은 조금 민감할 수도 있는 주제를 군더더기 없는 문장들로 풀어냈다. 마지막 문장을 읽고 나면, 한참을 생각하게 만든다.

 

 마지막 이야기는 조금 특별한, 죽음 너머의 사랑을 다룬 황정은 작가의 '데니 드비토'였다. 유도씨를 사랑한 유라씨가 죽어서도 그의 곁에 맴도는 이야기는 우리가 흔히 말하는 "다음 생에도 널 사랑할게."에 대한 답변을 주는 것 같다.


p.313
 그거 봐. 쓸쓸하다느니, 죽어서도 그런 걸 느껴야 한다면 가혹한 게 맞잖아. 나는 이생에 살면서 겪는 것으로도 충분하니까, 내가 죽을 때는 그것으로 끝이었으면 좋겠어. 이왕 죽는 거, 유령으로 남거나 다시 태어나 사는 일 없이, 말끔히 사라졌으면 좋겠다는 얘기야.
그건 너무 덧없다고 내가 말하자, 덧없는 편이 낫다, 라는 것이 유도씨의 대답이었다. 죽어서도 남을 쓸쓸함이라면 덧없는 것만 못하다는 것이었다.


 아홉 편의 이야기를 다 읽고 책장을 덮으면, 사랑이 무엇인지 조금쯤 알 것 같기도, 하나도 모르는 것 같기도 하다. 사랑이란, 완전한 타인인 누군가를 알아가고, 그 사람에게 가는 길을 찾는 과정이 아닐까.

어쩌면 사랑은, 우리의 평생을 견디게 하는 아주 긴 기다림 인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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