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만 무료

할까 말까 망설일 때, 디시 응시하기로 했다

도전

by 엘리스

작년에 승진 역량평가에서 보기 좋게 떨어졌다.

그 뒤로는 관련 자료를 들춰보기도 싫었다. 몇 차례 더 응시할 기회가 있었지만 포기했고, 올해도 한 차례는 그냥 지나쳤다. 지난해 근무평정 결과도 좋지 않았다. 마음이 많이 꺾여 있었다.


오늘 또 인사부서로부터 전자우편이 도착했다.

이번 평가에 응할 것인지, 이번만 포기할 것인지, 아니면 퇴직 때까지 응시하지 않을 것인지 선택하라는 메일이었다. 세 가지 선택지 앞에서 오래 망설일 줄 알았는데 뜻밖에도 손은 빨랐다. 나는 다음 달 시험에 응하겠다고 답했다.


그래, 승진할 자격을 부여하는 시험이라면 한 번쯤 더 해보자 싶었다.


작년에 응시했을 때 나는 너무 긴장한 나머지 우황청심원까지 먹고 시험장에 들어갔다. 반드시 통과해야 한다는 마음이 나를 짓눌렀다. 그런데 이번은 조금 다르다. 물론 여전히 떨리고 부담도 있다. 하지만 작년처럼 인생 전체를 걸고 들어가는 기분은 아니다. 이 결과가 내 삶 전체를 바꾸지는 못한다는 것을 이제는 안다.


나는 서른둘에 9급 공무원이 되었다. 늦깎이였다.

주변의 같은 직급 공무원들에 비해 적게는 여섯 살, 많게는 열 살쯤 많았다. 그래서 설령 이번 역량평가를 통과한다 해도, 승진 후 그 직급으로 직장생활을 할 수 있는 시간은 길어야 1년 남짓일 것이다. 실제로 내 앞선 선배도 퇴직을 1년 앞두고 승진했고, 올해 6월 퇴직을 한다.


나는 그런 선택을 하지 않을 줄 알았다.

이제 와서 굳이, 싶었다.

남은 시간을 생각하면 승진이 아주 결정적인 의미를 갖는 것도 아니다. 그런데도 여전히 조금 아쉬웠다. 이미 다 정리한 줄 알았던 마음 한구석에, 아직 덜 접힌 마음이 남아 있었다. 대단한 각오를 한 척했지만, 사실은 나도 여전히 아쉬운 사람이었다.


곰곰이 생각해 보니 내가 부담스러운 것은 시험의 난이도만은 아니었다.

한 달 동안 다시 목적 있는 시간을 살아야 한다는 압박감, 다시 평가받는 자리에 선다는 감각, 작년의 낙방을 또 한 번 떠올려야 한다는 사실이 더 버거웠다. 시험 자체보다 그 시험을 둘러싼 기억과 감정이 더 큰 짐이었다.


그런데 이번에는 문득 다른 생각이 들었다.

이 과정을 꼭 비장하게만 통과해야 할까.

조금은 다르게 해 볼 수 없을까.


작년 평가에서 떨어진 뒤, 내게 남은 것이 하나 있다. 러닝이다.

실패는 왔지만 각성도 함께 왔다. 낙방은 아팠지만, 그 일 이후 나는 달리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마음을 추스르기 위해서였고, 어느새 그 시간이 내 일상이 되었다. 그렇게 시작한 러닝을 지금까지 이어오고 있다.


생각해 보면 삶은 늘 이런 식이었다.

실패가 오는 자리마다 뜻밖의 다른 것이 시작되곤 했다.

무너졌다고 생각한 자리에서 오히려 몸이 살아나고, 자존심이 상한 뒤에야 비로소 내 마음의 실체를 보게 되는 일. 작년의 실패도 꼭 그런 종류의 사건이었는지 모른다.


얼마 전 수영장에서 크게 놀란 뒤 한동안 물이 무서웠다.

한 번 겁을 먹고 나면 몸은 쉽게 기억한다. 물은 여전히 물인데, 한 번 놀란 몸은 그 물을 전과 다르게 받아들인다. 그런데도 나는 다시 수영장에 갔다. 더 안전한 곳에서, 내 몸이 버틸 수 있는 범위 안에서, 조금씩 다시 물에 들어갔다. 그리고 어느 순간, 그곳은 공포의 장소이기만 한 곳이 아니라 다시 운동하는 장소가 되었다. 무서움이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지만, 그 무서움을 다루는 법을 조금 배우게 된 것이다.


이번 승진 역량평가도 어쩌면 비슷한 일일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시험은 단지 승진을 위한 절차만은 아닐지 모른다.

내가 한 번 크게 주눅 들었던 자리, 그래서 한동안 외면했던 자리로 다시 걸어 들어가는 경험일 수도 있다.


그러니 이번에는 꼭 이겨내겠다는 마음만으로 준비하고 싶지 않다.

반드시 증명하겠다는 각오보다, 다시 들어가 보겠다는 쪽에 마음이 간다. 합격하면 좋겠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예전처럼 회피하지 않는 것이다. 도망치지 않고 다시 한번 책상을 펴고, 다시 한번 입을 열어 말하고, 다시 한번 평가받는 자리에 앉아보는 것. 어쩌면 이번 한 달은 승진시험 준비 기간이 아니라, 내 안의 오래된 주저함을 다르게 다뤄보는 실험의 시간이 될지도 모른다.


할까 말까 망설일 때 무조건 해야 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그렇지만 두려움 때문에 오래 미뤄온 일이라면, 언젠가는 다시 손을 대보는 편이 좋을 때가 있다. 이번의 나는 그 사실을 조금 알게 되었다. 젊을 때처럼 무턱대고 돌진할 수는 없지만, 그래서 오히려 더 내게 맞는 속도로 들어갈 수 있게 되었다.


예전의 나는 결과에 너무 큰 뜻을 걸었다.

이번에는 과정에 조금 더 마음을 두어보려 한다.

붙든 떨어지든, 나는 이번에 다시 한번 나를 시험장으로 데려갈 것이다. 그곳에서 확인하고 싶은 것은 내 점수만이 아니다. 실패 이후에도 사람이 다시 시작할 수 있는지, 겁이 난 뒤에도 다시 들어갈 수 있는지, 나이 든 도전이 젊은 날의 도전과 어떻게 다른지를 천천히 지켜보고 싶다.


이번 한 달을 나는 너무 심각하게만 보내고 싶지 않다.

놀이처럼 해보고 싶다.

물론 놀이라고 해서 가볍다는 뜻은 아니다. 오히려 끝까지 해보겠다는 뜻에 가깝다. 겁이 나도 중간에 뛰쳐나오지 않고, 부담스러워도 다시 책을 펴고, 시험을 인생 전체의 판결문이 아니라 한 번의 훈련으로 받아들이는 것. 그 정도의 마음이면 충분하지 않을까.


생각보다 오래 돌아왔지만, 나는 결국 다시 응시하기로 했다.

망설임 끝에 내린 결론은 늘 대단한 문장으로 오지 않는다.

어떤 날은 그저 메일 한 통에 답장을 보내는 손끝으로,

어떤 날은 “그래, 한 번 더 해보자”는 짧은 마음으로 온다.


이번에는 그 마음을 믿어보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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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 사람 곁에서 일했습니다.그 시간은 늘 보이는 문제보다 보이지 않는 마음을 먼저 생각하게 했습니다. 일과 삶의 틈에서 건져 올린 질문들, 상처와 회복의 시간을 천천히 적어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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