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제의 <아가씨> 사진집 제작과 팝업 전시 기획 후기
2016년에 개봉한 박찬욱 감독의 영화 <아가씨>. 저는 개봉했을 때 극장에서 두 번, 나중에 OTT를 통해 한 번 이렇게 세 번 관람했어요. 거기에다 전반적인 프로덕션 과정이 담긴 <아가씨 아카입> 책도 읽어봤으니 네 번 본 셈이나 다름없네요. 저처럼 <아가씨>를 지금까지도 애정하는 관객들이 많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저에게도 지난달 텀블벅에 올라온 <아가씨> 공식 사진집, <아가씨의 순간들>에 쏟아진 관심은 정말 놀라웠습니다. 공개 16분 만에 목표금액 1억을 달성했거든요.
지금까지 다수의 프리미엄 블루레이/DVD를 제작해 온 플레인아카이브가 품질에 대해서라면 그 어떤 타협도 없이 가장 크고, 가장 두껍고, 가장 소장 가치 높은 사진집을 기획한 것이었는데요. 정가 13만 원, 텀블벅 후원가 11만 7천원이니 국내 영화 사진집으로는 전례 없는 출판 프로젝트입니다.
"영상도 아니고, 영화의 사진집을 소장하고 싶은 건 왜일까요?" 제 옆자리 동료가 순수한 궁금증을 담아 제게 물어보았습니다. 그러게요. 어떤 힘이 있어서 <아가씨>와 플레인아카이브는 이렇게 2,000명의 마음을 사로잡았을까요? 마침 사진집 출간을 기념하는 팝업 전시가 열린다기에 그곳에서 직접 물어보기로 했습니다.
유독 눈에 띄게 아름다운 벚꽃나무 아래 전시 포스터가 붙어 있었기에 초행길이었음에도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었다. 전시를 보기도 전인데 영화 속 한 장면이 머릿속에 스쳐 지나갔다. 히데코가 벚꽃나무에 목을 매려던 순간, 숙희가 달려드는 그 명장면. “숙희야, 내가 걱정돼? 난 네가 걱정돼"라고 심장을 후벼 파는 히데코의 목소리가 들릴 것 같았다면 과장일까.
<아가씨>의 김민희, 김태리 배우가 담긴 스틸 사진이 대문짝만 하게 걸려 있는데 ‘미쳤다’는 말 외에 다른 할 말이 있을까? 함께 갔던 동료를 슬쩍 돌아보니 미동 없이 한 사진 앞에 머물러 있더라. ‘어라, 이 목소리 어디서 들어봤더라’ 하고 고개를 돌렸는데 좋아하는 배우님이 나와 같은 마음으로 열심히 전시 곳곳을 카메라에 담고 있었다.
〈아가씨의 순간들〉 숙희 버전 샘플에는 65년간 해외 최고급 아트북 제작자들이 사랑해온 TALAS사의 북클로스, 옛스러운 일본식 옷감 텍스쳐가 살아있는 ‘ASAHI POPPY RED’ 천이 사용됐다. 이번 아가씨 사진집의 표지는 일반 종이 표지가 아닌 해외에서 공수해 온 독특한 패브릭 표지다. “이게 실제 표지인가요?”라고 물으며 조심스럽게 천의 결을 만져본 뒤 전시장을 나서는 사람들의 뒷모습에서 설렘과 기대감에 달뜬 기운이 느껴졌다.
영화 팬들을 온라인에서 오프라인으로 자석처럼 끌어당기는 플레인아카이브와 인터뷰를 나눴다.
독자 분들을 위해 자기소개를 부탁드린다.
백준오(이하 ‘백'): 2012년 회사 '플레인아카이브'를 만들어 영화 블루레이/홈비디오 제작을 10년 정도 지속해오고 있고, <들개> 각본집을 시작으로 현재까지 14종의 영화 도서를 출간했다.
임유청(이하 ‘임’): 주로 각본집이나 영화 관련 책들 기획하고 편집하는 일을 담당한다. 지금은 아가씨 사진집 <아가씨의 순간들> 제작에 박차를 가하고 있고 다음 주에 실물로 나올 <고양이를 부탁해: 20주년 아카이브> 기획/편집을 맡았다.
장지선(이하 ‘장'): 영화 관련 프로젝트를 담당하고 있다. 최근 텀블벅에서 <셀린 시아마 성장 3부작>과 지금 진행 중인 <크리스티안 페촐트 컬렉션> 등 두 개의 감독 컬렉션 블루레이 프로젝트를 담당했다.
아름다운 전시에 초대해줘서 감사드린다. 팝업 전시는 어떻게 진행하게 된 건가
임: 사실 전시를 진행해보고 싶은 마음은 몇 년 전부터 있었다. 플레인아카이브의 결과물이 좋다는 건 많은 분이 알고 계시지만 결과물이 어떤 과정을 거쳐 나오는지 보여 드릴 일이 없어서 늘 아쉬웠다. 이번 아가씨 사진집 프로젝트가 예상보다 훨씬 많은 사랑을 받게 되면서 텀블벅 펀딩 300% 달성 기념으로 팝업 전시를 처음 진행했다. 많이 알려진 영화를 전시한다는 건 생각보다 어려운 일이다. 실무적으로 공간 대여, 액자 제작 등 공간을 구성하는 일 외에 영화관계자분들께 연락하고 동의를 얻는 작업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이렇게 고퀄리티로 아름답게 제작하고 있다는 걸 보여주고 싶었고, 사진집이 탄생하는 과정을 후원자 분들과 함께하고 싶었다.
<아가씨>와 굉장히 잘 어울리는 전시 공간이 아니었나 싶다.
임: 전시 장소로 여러 곳을 고민했다. 비교적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대형서점에서 해볼까 하는 생각도 했는데 나 또한 <아가씨>를 사랑하는 입장으로서 작품과 잘 어울리는 공간에서 진행하고 싶었다. 4월에 벚꽃이 가장 아름답고 많은 분들이 접근하기 편리한 서촌의 미뗌바우하우스로 결정했다.
관객들의 반응은?
임: 사진집이 출간되기 전 미리 볼 수 있다는 것에 비교적 호평을 해주신 것 같다. 전시장에 매일 있으면서 반응을 보는데, 많이 걱정했던 것에 비해 반응이 대부분 긍정적이라 관람객들에게 감사했던 기억이 있다. 전시된 사진은 20장 정도로 많지 않았는데 아무래도 이재혁 작가님이 직접 인화 과정에 참여하신 고퀄리티의 대형 액자 몇 점이 있어 다들 좋아해 주신 것 같다. 깜짝 놀랐던 게 이주영 배우님, 박수연 배우님이 전시 첫날 직접 예매하고 오셨더라. ‘여기서 나가기 싫다’면서 무척 좋아하셨다.
플레인아카이브는 DVD/블루레이 제작을 주로 해왔다. <아가씨> 사진집 프로젝트를 진행한 이유는?
백: 박찬욱 감독님이나 봉준호 감독님처럼 규모 있는 영화를 만드는 감독님들의 블루레이 제작을 대행하는 경우가 많다. 당시 <아가씨> 블루레이 제작을 준비했을 당시, 자료를 조사하는 과정에서 이재혁 스틸사진가가 찍은 <아가씨> 스틸 사진의 원자료를 보게 됐다. 하드에 무려 사진만 6테라가 있더라. 만 장이 넘는 아름다운 사진들을 우리만 보기에는 아까웠다. 프로젝트 스토리에 ‘이 아름다운 사진을 우리만 보는 것은 어쩌면 비윤리적인 일이 아닐까?’라고 적은 건 순도 100%의 진심이다.
프로젝트 공개 16분 만에 1억을 달성했다. 조금은 예상했을까
백: 제일 마음 졸였던 유청 팀장님이 설명해 주시면 좋을 것 같다.(웃음)
임: 16분 만에 1억은 전혀 예상 못했다. 사진집 가격을 공개했을 때 아무리 팬덤이 많은 영화라고 해도 개봉한 지 6년 (2016년 개봉)이 넘은 영화가 잘 될지 주변에 우려의 목소리가 컸다. 게다가 <아가씨> 이미 블루레이도 있고, 아가씨 아카입, 아가씨 각본집 등 굿즈들도 많이 나왔다. 그것들과 차별점이 없었다면 안 했을 거다. 영화 <아가씨>를 사랑하는 팬이라면 선명한 고화질의 아름다운 현장 사진들을 좋아해 주실 거라고 생각했다. 방대한 분량과 큰 판형, 소장 가치를 높이기 위한 고급 제본, 고급 패브릭 북클로스, 고급 후가공까지 엄청난 제작비가 들어도 절대 포기할 수 없었던 이유다.
아가씨 프로젝트는 2년간 오픈 소문만 무성했다. 준비 과정에서 어떤 시행착오가 있었는가?
임: 종이, 북클로스, 내지 편집 등 기획 과정에 시간이 많이 소요됐다. 평소에 종이를 많이 보는 우리도 헷갈릴 정도로 비슷해 보이는 종이를 섬세하게 비교하면서 치열하게 결정했다. 기획도 여러 번 바뀌었다. 처음 버전은 미공개 사진들만 구성해서 기획했다가 나중에 익숙한 컷들이라도 <아가씨>를 대표하는 중요한 사진들도 있어야 한다고 의견이 모아져서 지금 버전이 됐다. 사진 순서를 결정하는 과정에서는 박찬욱 감독님이 감수자로 많이 봐주시면서 의견을 적극적으로 주셨다. 영화 관계자 분들과 소통하는 건 오히려 오히려 수월했던 것이, 관계자분들도 이 영화를 굉장히 사랑했기 때문인 듯하다. 박찬욱 감독을 비롯해 CJ ENM, 모호필름과 용필름, 스태프와 배우 분들 소속사의 도움을 많이 받았다.
백: 경영적인 측면에서는 지양해야 하는 것인데, 디자인과 제품의 완성도를 포기하면서까지 생산 전에 사전 견적서를 치밀하게 내지 않는 편이다. 판매가격 대비 제작 원가가 높아지더라도 디자이너가 원하는 책의 판형이나 제본 방식, 특수 후가공 등을 대부분 수용한다. 특히 이번 사진집에서는 북클로스에 굉장히 돈이 많이 들었다. 국내에도 북클로스를 만드는 회사들이 있지만 우리가 원하는 색, 질감에 딱 들어맞는 게 없어서 어쩔 수 없이 해외업체를 알아봤다. 샘플을 받아서 테스트를 해봐야 하는데 수차례 여러 샘플을 해외에서 공수하는 데에 들어간 비용이 샘플 구매비용을 제외하고도 운송료만 100만원이 넘더라. 여러 국제 정세로 인해 재고 유무와 운송 상황도 유동적이라 텀블벅 펀딩 전후 진행하던 시점으로 시간 안에 북클로스를 들여오는 과정이 굉장히 힘들었다.
지금은 <크리스티안 페촐트 컬렉션> 프로젝트를 진행중이다. OTT서비스로 어디에 있든 핸드폰으로 클릭 버튼 한 번만 누르면 영화를 볼 수 있는 시대에 블루레이와 DVD라는 매체가 현재의 시네필들에게는 어떤 의미가 있을까?
백: 지금 시네필들의 연령대가 어떨지 모르겠는데 내가 어렸을 때만 해도 영화를 소장하는 게 그렇게 특별한 일이 아니었다. 나의 경우 부모님이 비디오가게를 하셔서 자유롭게 영화를 볼 수 있었는데 그때만 해도 영화를 보기 위해서는 비디오가게에서 비디오를 대여하거나 구매해야 했다. 영화뿐만 아니라 뭐든 모으는 게 당연했던 시절이다. 지금은 대부분 OTT서비스를 이용할 텐데, 서비스를 이용하다 보면 영화가 뭉텅이로 몇십 편씩 내려간다. 내가 좋아하는 영화가 언제 어떻게 사라질지 모르는 상황에서 블루레이와 DVD를 소장하는 건 영화를 사랑하는 가장 적극적인 행위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라스폰트리에 감독의 <멜랑콜리아>부터 <크리스티안 페촐트 컬렉션>까지 플레인아카이브는 주로 아트하우스 영화 혹은 독립 영화로 분류되는 영화에 집중하는 거 같다. 블루레이/DVD 제작할 영화들을 어떤 기준으로 선정하고 있나
백: 보고 나면 영화의 여운이 남아 인터넷에 검색해 보게 되고, 시간이 지나도 계속 보고 싶은 영화를 선정한다. 그런 의미에서 평론가들이 만장일치로 호평한 영화만을 선정하지 않는다. 대중의 호불호가 갈리는 영화라도 배우들의 연기나, 연출, 미술, 음악 등 한 가지에서 특출 난 매력이 있으면 선정한다. 최근 출시했던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아무도 모른다> 예약판매 반응 중 ‘영화가 어둡고 보기 고통스러운데 굳이 블루레이로 사서 두 번 세 번 볼 일 있을까’ 하고 고민하는 분들이 계시더라. 생각할 거리를 던져주는 영화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선정했고 코멘터리나 부가 영상을 더욱 신경 써서 만들었다.
한편 한 감독의 영화를 컬렉션으로 구성한 건 셀린 시아마 감독이 처음이었다.
장: 독립예술영화로 분류되지만 그 안에서도 화제가 된 영화들이고 작품성이 있는 영화들이기 때문에 꼭 소개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국내에서 셀린 시아마 열풍의 시작이라고 볼 수 있던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이 국내에서 엄청난 인기를 끌면서 이 영화를 사랑하는 팬분들에 대한 믿음을 확인했다. 어느 한 감독의 컬렉션을 단일 패키지로 모으는 게 쉽지 않은 일이다. 예를 들어 봉준호 감독의 경우 <괴물>은 청어람이라는 영화사에 권리가 있고, <옥자>는 넷플릭스에 있으며, 다른 작품들은 CJ ENM에 권리가 있는 식으로 판권이 여기저기 흩어져 있다. 그런데 이번 셀린 시아마 감독의 세 작품들은 이른바 '성장 3부작'으로 묶이는 영화를 한 수입사에서 묶어서 한번에 계약하여 국내에 소개했기 때문에, 우리가 바라던 첫 번째 감독 컬렉션으로 너무나도 적절했다. 페촐트도 비슷하다. <운디네>라는 영화를 보고 우리도 관심을 가지고 있던 중에, 페촐트 감독 작품의 권리를 다수 보유하고 있는 수입사에서 먼저 <운디네>의 블루레이 제작 의향을 물어왔고, 총 네 편을 묶은 감독 컬렉션을 역제안하여 성사되었다. 셀린 시아마와 페촐트 컬렉션 모두 ‘세계 최초 출시’라는 메리트가 있다 보니 감독님들도 흔쾌히 허락해주셨다.
백: 셀린 시아마, 크리스티안 페촐트 컬렉션 같은 경우 한 편이 아니니까 제작비도 많이 들고, 판매가격이 그에 비례해서 올라가니까 구입하는 분들도 부담이 될 거다. 온라인 도서몰같은 도매상들 입장에서도 이런 작품들은 마블, 디즈니 등 대중적인 상업영화 블루레이와 비교할 때, 판매에 부담을 느껴 발주에 소극적인 점도 어려운 점이다.
그런 상황에서 고가의 감독 컬렉션 블루레이 박스세트를 거친 광야에 내던지듯 덜렁 출시만 해서는 판매 경쟁력이 없을 수밖에 없다. 이 같은 어려움에 대한 고민과 두려움을 줄여주고 프로젝트 강행에 용기를 주는 플랫폼이 텀블벅이지 않을까 싶다. 특히 주류가 아닌 카테고리로 분류되는 문화 콘텐츠를 후원하는 데에 보다 적극적인 분들이 모여 있는 텀블벅이라는 공간은 다른 펀딩 플랫폼이 가지지 못한 독보적인 장점이 있다고 확신하기에, 과감하게 두 감독 컬렉션의 펀딩을 진행해볼 수 있었다.
플레인 아카이브는 패키지 디자인이 훌륭하다고 정평이 나 있다. 여러 디자이너와 협업하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 플레인 아카이브만의 느낌을 유지하기 위해 고려하는 점이 있을까?
백: 영화가 워낙 다르기 때문에 특정한 기조를 맞추긴 어렵다. 플레인 아카이브다운 디자인이라고 하면, 대중적이진 않더라도 독창적인 디자인을 선호한다. 일러스트 디자인의 경우 호불호가 많이 갈리는 경우가 있다. 패키지 디자인의 경우 오리지널 포스터를 선호하시는 분들도 계시는데, 그래도 영화를 조금은 다른 시선으로 해석할 수 있는 디자인을 보여 드리고 싶다. 이번 페촐트 컬렉션의 패키지 디자인은 일러스트는 아니지만 함께 작업한 황석원 디자이너의 아이디어로 마치 잉크를 흩뿌리듯 사진을 인쇄한 기법이 돋보이도록 이미지 가공에 공을 많이 들였다. 독일 영화답게 독일스러운 간결한 디자인을 갖게 되었다.
지금까지의 패키지디자인 중 플레인아카이브만의 느낌이 가장 잘 담긴 것은?
백: 하나만 꼽기 어렵지만, 영화라는 장르를 좋아하는 분들이 계속 특정 영화를 상기하고 떠올리며 좋은 기분을 갖게 되는 패키지를 생각한다면 아무래도 <캐롤>이다. 3~4종 정도로 다양한 패키지 디자인으로 발매했고, 구매하신 분들의 평가도 좋았다. 특히 풍성한 구성이 돋보이는 디럭스 박스 버전은 지금 봐도 만족스럽고 뿌듯하다. 고급 화장품이나 화과자 박스를 연상시키는 패키지를 열면 블루레이 외에도 금속 핀뱃지, 각본집, 영화 속의 소품을 실물로 재현한 손편지가 나온다.
<올드보이> 개봉 10주년 기념 특별판 블루레이의 부가 영상으로 다큐멘터리를 제작하겠다는 대담한 선택은 어떻게 하게 된 건가
백: 초창기에는 플레인아카이브가 주로 외화 블루레이/DVD를 제작했었다. 외화는 부가 영상을 구매해 번역하고 패키징만 하면 되기 때문에 한국 영화보다 제작하기 더 수월하다. 그러다가 조금 더 창의적이고 독창적이면서 보다 영화라는 예술에 깊게 다가설 수 있는 작업에 대한 갈증으로 한국 영화 블루레이를 제작하게 됐다. 마침 당시에 정식으로 블루레이가 출시되지 않았던 <올드보이>를 제대로 만들어보고 싶어 박찬욱 감독을 만나 제안드렸고 쉽지 않은 판권 사정을 풀어가며 계약에 성공했다. 이후 10주년을 기념하는 특별한 스페셜 다큐멘터리를 부가영상으로 만들어보자고 한선희 감독(<말하는 건축가> <만신> 프로듀서)에게 제안했는데,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더 큰 그림을 그려주셨다.
<올드보이>의 전국 촬영지에 직접 박찬욱 감독 외 주연 배우분들, 주요 스태프와 동행해 일종의 로드무비처럼 10년 전의 촬영 당시를 회상해보자는 컨셉이었다. 물론 10년이 훨씬 지나 지금은 저마다의 자리에서 최고가 된 바쁘신 분들이 이 제안에 응해주실까 걱정이 많았다. 감사하게도 모든 분들이 "<올드보이>라면 해야죠!’ 라면서 각자 바쁜 와중에도 귀한 시간을 내어 흔쾌히 참여해주셨다. 예를 들어 당시 류성희 미술감독의 인터뷰를 보면 그때 한창 영화 <암살> 작업 중이셨기 때문에 인터뷰 배경 뒤로 <암살>의 세트장이 보인다. (웃음)
<올드보이> 블루레이는 출시 소식을 알리고 발매하기까지 3년이 걸렸다. 우리의 능력으로 한계를 넘어서는 수준까지 노력했던 작품으로 기억된다. 감사하게도 완성과 동시에 전주국제영화제에 출품되어 감독님을 모시고 프리미어 상영을 가질 수 있었던 경험은 그간의 고생을 보상해주는 놀랍고 감사한 이벤트였다. 이후 뉴욕 메트로그라프 극장의 박찬욱 회고전에서도, 이탈리아 ‘우디네극동영화제’에서도 상영됐다. 또한 블루레이 부가 영상으로는 드물게 해외 배급 계약을 체결하여 지금까지 6개 나라에 수출까지 이루어졌다. 최근에는 미국의 유력 배급사에 <올드 데이즈> 판권이 판매됐다.
국내 블루레이 제작 여건이 좋지 않은 편이라고 알고 있다. 어떤 상황인지? 해외제작이라면 일정 조율이 어려울 것 같은데, 제작일정의 불확실함은 어떻게 다루고 있나.
백: 영상을 담고 있는 블루레이 디스크는 국내제작이 어려워 독일에서 생산하고 있다. 비행기타고 실물이 왔다 갔다 해야 하니까 그게 어렵다. 전쟁이나 코로나로 인해서 불가항력적인 이유로 제품이 못 들어온다거나 일정이 미뤄지기도 한다. 이밖에도 결국엔 물리적인 상품을 만들어내는 과정에서 다양한 이슈로 제작일정이 미뤄지기도 하는데, 일정을 미룰 수밖에 없을 때, 최대한 사실대로 믿고 기다리는 분들이 이해할 수 있게끔 솔직히 설명해 드리려고 노력한다.
만약 자금과 시간이 무한정 주어진다면 플레인아카이브에서 하고 싶은 프로젝트가 있는지?
백: 글쎄 너무 꿈같은 상황이라 지금 떠올리려고 하니 쉽지 않다. 아, 이명세 감독님을 좋아하는데 오래전 작품인 <첫사랑>(1993)의 복원판 블루레이를 만들고 싶다. 시대를 거스르는 이명세 감독의 독창적인 연출과 아름다운 촬영, 김혜수 배우의 매력이 보석처럼 어울린 걸작임에도 불구하고 디지털화가 되어 있지 않아 현재 영화를 볼 수 있는 방법이 전혀 없다.
사실 오래 전에 이 영화의 복원을 시도해보고자 감독님과 함께 프랑스문화원에 보존된 필름 프린트를 직접 영사해서 확인한 적이 있다. 필름 보존 상태가 비교적 양호한 편이었지만 프랑스어 자막이 박혀있기 때문에, 복원과 함께 자막을 프레임별로 일일이 지우는 CG 작업까지 이행되면 10억이 넘는 복원 비용이 예상되어 우리가 감당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니어서 흐지부지됐다. 중요한 문화유산이라 할 수 있는 작품이 자본의 부족으로 이렇게 세상에 빛도 못 보고 잠들어 있는 걸작들을 떠올리면 안타깝다. 내게 무한정의 자금이 있다면 <첫사랑>을 복원해서 4K 블루레이로 출시하고, 성대한 복원기념 상영회도 열고 싶다. 그 상영회를 열기 위한 플레인아카이브만의 작지만 아름다운 극장도 지을 수 있다면 좋겠지. 상상만 해도 행복한 바람들이다.
플레인아카이브가 궁극적으로 지향하는 것은?
백: 소장의 즐거움을 더 많은 사람에게 알리는 것. 산업적인 외형이 너무 크게 급변하고 있다. 얼마 전 디즈니가 홈비디오 시장을 철수했다고 했을 때, 예상은 했지만 직접 마주하니 박탈감이라던가 충격이 컸다. 블루레이/DVD제작 외에도 출판이나 굿즈 등 보다 다양한 물리매체를 통해 영화를 사랑하는 이들에게 영화를 소장하는 특별한 즐거움을 안겨주고 싶다.
'플레인아카이브가 아니면 안 돼!'라는 식의 대체 불가능한 회사가 되고 싶지는 않다. 그만큼 시장이 좋지 않다는 뜻이니까. 우리와 같은 회사가 더 많이 등장해서 시장이 커지고 영화 물리 매체를 소장하는 재미를 느끼는 분들이 더 많이 늘어났으면 좋겠다. OTT 플랫폼이 득세할수록 손에 쥘 수 있는 무언가를 소구하는 사람들은 더 늘어날 것이라고 생각한다.
인터뷰/편집 홍비
사진 제공 플레인아카이브
디자인 최재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