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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Organized Chaos Feb 13. 2020

로이풀러를 통해 조명하는 현대무용의 새로운 가능성

“현대무용의 창시자는 이사도라 던컨이 아닌 로이 풀러이다”

특정 예술장르를 정의하는 방식은 필연적 근거를 동반하기보다는 일정한 의도나 필요와 밀접한 관련을 맺는다. 특정한 작품을 ‘최초의 ○○작품’, 혹은 특정한 예술가를 ‘○○의 창시자’라고 정의하는 것은 객관적 사실을 바탕으로 하는 사실명제라기보다는, 발화자의 가치판단을 담은 선언에 가깝다고 볼 수 있다. 이를테면 뤼미에르 형제의 시네마토그래프를 영화의 전신으로, 작품 《열차의 도착》을 최초의 영화라고 정의하는 것은 스크리닝의 중요성에 방점을 찍고자 하는 영화계의 의도를 동반하며, 「왕비의 발레 코미크」를 최초의 발레작품으로 기록하는 것은 춤과 ‘아카데미’와의 연관을 강조하고자 하는 주류 무용계의 의도를 내포한다.


어떤 예술 사조나 양식, 장르가 한 순간에, 한 인물에 의해 돌연 탄생하는 경우는 없다. ‘분절’을 특성으로 하는 언어와 달리, 예술사를 포함한 모든 역사와 현실은 연속적인 양태를 띄고 있다는 점을 기억한다면, 특정한 작품 혹은 예술가를 ‘최초의 무엇’이라고 정의하는 것은 필연적으로 오류를 동반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때문에 ‘최초의 무엇’이라는 서술에서 발견해내야 할 것은 ‘최초’라는 타이틀을 기반으로 하는 권위가 아니라, 발화자나 저술자가 말과 글에 담아낸 개인의 의견이다. ‘최초’라는 환상에서 파생된 절대적인 권위의 작위성을 드러내고 나면, 특정 순간이나 작품, 예술가가 삭제해 온 가능성을 상상할 수 있다.


이 글을 통해 “현대무용의 창시자는 이사도라 던컨이 아닌 로이 풀러이다.”라는 논제를 제안한다. 현대무용계가 주류 무용사를 통해 이사도라 던컨을 현대무용의 창시자로 기념하면서, 현대무용의 수면 아래로 가라앉게 된 현대무용의 가능성들을 무용가 ‘로이 풀러’를 통해 호출한다.



    신체 뿐 아닌 다양한 극장의 요소를 차용한 로이 풀러


서유럽을 중심으로 하는 서양예술사에서 무용은 비교적 늦은 시기에 하나의 독립된 예술장르로 자리를 잡는다. 프로시니엄 무대가 등장하기 이전, 무용은 궁정 여흥에 동반되는 예법이나 행동양식정도로 인식되었을 것이다. 프로시니엄 무대가 등장한 이후에도 일정기간 동안 무용은 오페라 사이사이의 단막극으로 존재해왔다. 무용은 꽤 오랜 역사동안 타 극장예술의 한 부분으로 차용되며, 존재감을 확보하는 데에 어려움을 겪었다. 독립된 존재감을 얻기까지 어려움을 겪었던 만큼, 무용은 ‘신체’를 강조하며, 타 예술 요소들과의 분리를 시도했다. 무용은 점점 더 신체를 드러냈고, 신체에 대한 규율은 더 세세해졌다. 현대무용에 이르러서도 마리 뷔그만 등의 무용가들은 그들이 규정한 무용의 본질인 ‘신체’에만 의존하는 ‘절대무용’을 주장하기도 한다. 신체를 이용한 동작의 테크닉 체계를 더욱 견고히, 또 정교히 하는 것은 무용의 생존방식이었던 것이다.


현대무용이 태동하던 당시 발레는 낭만과 고전의 사조를 거치며, 아카데미적 전통을 구축하였다. 무용을 하고자 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든지 먼저 발레 테크닉을 익혔다. 테크닉 체계 습득을 중시하는 환경에서, 로이 풀러는 무용교육 경험 없이 무용작품 창작활동을 시작하였다. 이사도라 던컨 역시 독학으로 무용을 공부하고, 자유로운 표현을 중시하였다고 알려져 있지만, 당대 로이 풀러의 서술을 살피면 흥미로운 사실을 발견할 수 있다. 


“덩컨의 무용은 많은 연습을 통해 제작된 예술이고 내 무용은 자연스럽고 영감적이며 자연발생적이다. 예를 들어 덩컨은 그리스 화병에 새겨진 무용수들의 동작들을 모방하고 그녀의 제자들은 덩컨의 동작을 답습한다. 나와 내 제자들은 그리스인들이 화병을 만들었을 때로부터 영감을 받아 고유의 자연스러운 표현과 동작들을 만든다.”


풀러는 신체를 기반으로 한 테크닉에서 자유로웠던 만큼, 자신이 표현하고자하는 바를 표현하는 데 자유로웠다. 풀러는 조명이나 의상 등의 요소들을, 신체를 가리는 무언가로 생각한 것이 아니라, 자신이 표현하고자 하는 이미지를 더 극적으로 전달할 수 있는 수단으로 여겼다. 풀러에게 있어서 무용이란, 비단 신체 동작만을 통한 표현이 아니라, (신체 동작이 동반된) 무대 위 움직이는 이미지를 통한 표현이었던 것이다. 물론, 당시의 로이 풀러의 무용이 ‘신체’에서 완전히 자유로웠던 것은 아니다. 풀러는 수많은 자신의 작품들 중 「백색춤」을 꼽았는데, 그 이유는 다름 아닌 의상의 형태 뿐 아니라 신체의 실루엣을 드러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이후 「백색춤」에 대한 설명에서 풀러는 ‘동작과 의상’을 다루는 것에 중점을 두었다고 설명하며 의상을 동작과 같은 선상에서 언급한다. 여전히 풀러가 조명이나 의상 등을 무용 외적인 요소로 다루고 있지는 않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빛과 색채에 많은 관심을 두었던 로이 풀러는 조명 장치들을 끊임없이 탐구하였고, 심지어 당대의 예술가들에게 로이 풀러는 ‘실험가’로 비춰지기도 했다. 로이 풀러는 젤라틴과 환등기 등의 조명 기구를 실험하고, 또 자신의 작품에 적극적으로 이용하였다. 「불의 춤」에서는 심지어 서른 개가 넘는 조명기를 사용하였고, 검은 벨벳을 이용해 빛이 새어나가는 것을 차단한 후 유리 바닥을 설치하여 불이 타오르는 듯한 형상을 구현해냈다. 퀴리 부인과의 협업 이후 라듐을 사용하게 되었고, 풀러는 작품 「나비」를 응용해, 「라듐댄스」를 완성한다. 또한 앞서 언급한 모든 작품들을 포함해, 작품 「백합」에서는 엄청난 크기의 천을 사용해 조명 효과를 더욱 극대화한다. 풀러의 작품에서 천은 의상이기도 하지만, 때로는 중요한 소품처럼 다뤄지기도 한다. 후에 풀러의 극장예술, 극장기술에 대한 관심은 음악의 영역으로 확장되는데, 후에 사용한 현대음악들의 추상적 성격은 풀러가 구현해내는 추상적 이미지에 더욱 힘을 싣는다.


사실 풀러는 무용수라면 마땅히 ‘신체’를 표현의 도구로 삼아야 한다고 주장한 바 있다. 그러나 이는 테크닉 체계를 다루는 무용가들이 중시한 ‘신체’와는 구분되어야 한다. 풀러가 강조한 신체란 결코 피부를 경계선으로 삼지 않는다. 풀러는 의상과 조명을 적극 활용하여 신체를 확장하였다. 풀러에게 신체란 무엇에도 의존하지 않고 홀로 절정의 순간을 달성하기 위해 연마해야할 대상이 아니었다. 풀러가 놀라운 수준의 테크닉의 한 순간을 통한 희열감보다는 다양한 효과들을 통해 움직임의 흐름을 보여준 것은 우연이 아니다. 풀러에게 신체란 조명, 의상, 음악 등으로 구성된 다양한 효과들을 작동시키는 구심점이었던 것이다. 풀러가 다양한 극장요소에 가진 관심 덕에 풀러는 자신이 관심을 가진 자연 대상을 더욱 추상적이고 환상적인 이미지로 표현해내는 데 성공할 수 있었다. 


결국 풀러의 무용관은 무용수 개개인의 신체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이들이 만들어내는 전체의 형상까지를 아우른다. 아직도 현대무용계는 동작 위주의 테크닉을 중심으로 하지 않는 무용에 대해 회의적인 태도를 취하곤 한다. 그랜드 유니언 댄스 그룹, 혹은 저드슨 댄스 그룹 등의 후기 현대파 안무가들에 대한 평가는 ‘참신했으나, 한계를 가져 결국 다시 무용의 본질-역동적 신체 위주의 무용-로 돌아왔다.’는 식으로 일관된다. 이는 농당스 사조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이다. 애매한 경계에 선 무용가들은 견고한 현대무용의 벽에, 미술계에서 활동을 이어나가고 있는 사례도 허다하다. 무용가 윌리엄 포사이드는 최근 무용수가 부재한 무용작품, 혹은 퍼포먼스에 가까워 보이는 무용작품 <흩어진 군중>, <덧셈에 대한 역원> 등을 연달아 내어놓고 있다. 우리가 그의 작품을 여전히 무용 작품이라고 평하는 이유가 단순히 그가 가진 화려한 무용 커리어 때문 만이어서는 안 된다. 풀러의 무용관을 통해 바라본다면, 더 많은 움직임을 무용의 가능성으로 재평가할 수 있을지 모른다.


 

    다양한 예술장르와의 교류 및 협업


2014년 LG아트센터는 두 무용수가 등장하는 공연 <키스 앤 크라이>를 초청한다. 해당 공연에서 두 명의 무용수는 미니어처들로 가득 찬 무대를 돌아다니며 손가락을 통해 움직임을 선보인다. 그리고 이 두 무용수의 손을 촬영스태프들이 카메라를 들고 쫓는다. 촬영된 영상은 실시간으로 극장 내 스크린에 투사된다. 국립무용단의 레퍼토리 <기본활용법>에서 역시 무용수들이 카메라를 들고 객석을 비추며, 작은 움직임들을 포착해내고, 이 모습은 원형 극장 내 스크린에 실시간으로 상영된다. 영국의 컨템포러리 댄스의 상징격인 아크람 칸 역시 작품 <데쉬>에서 애니메이션을 스크린에 투사해 애니메이션과 함께 움직임을 선보인다.


타 장르와의 협업은 지금의 ‘현대무용’에 있어서 가장 큰 특징 중 하나이다. 영상, 애니메이션, 연극 등 다양한 장르와의 무용협업 사례는 무수히 많다. 그러나 여전히 해당 작품들의 다양한 요소 중 유독 ‘협업’이 강조되는 모습은, 여전히 ‘무용은 신체를 통한 표현’이라는 관념이 강하게 작동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타 장르와의 협업은 현대무용사에서 비교적 최근의 경향성으로 독해되는 경우도 적지 않다. 그러나 현대무용의 창시자라고 불리는 이사도라 던컨보다도 시간적으로 앞서 있었던 로이 풀러에게서 이미 타 장르와 현대무용의 협업사례를 살펴볼 수 있다.


‘로이 풀러’에게서 가장 먼저 연상되는 로이 풀러의 작품 「뱀의 춤」 영상은 영화사의 처음을 장식하고 있는 뤼미에르 형제에 의해 기록되었다. 이는 춤에 매료되어 다양한 민속춤을 촬영하였던 뤼미에르 형제의 촬영팀의 관심의 영향도 있었겠지만, 풀러 자신 역시 춤을 영화로 담아내는 것에 지속적인 관심을 가졌기 때문에 이뤄낼 수 있었던 성과이다. 나아가 풀러의 흐르는 듯한 움직임은, ‘움직이는 이미지’를 추구했던 초기 영화 감독들을 매료시키기에 충분했을 것이다. 후에 풀러의 「뱀의 춤」은 수많은 초기 영화감독들-멜리에스, 앨리스 가이 블라쉬 등-에 의해 영화로 만들어진다. 


그녀는 본인의 작품에 다양한 조명기술, 의상 혹은 영상을 도입하기도 하였지만, 타 예술장르의 모티프가 된 사례도 적지 않다. 풀러의 춤을 모티브로 제작된 미술작품의 대표적인 예는 쥴스 셰레가 제작한 포스터 「폴리 베르제르 무대의 로이풀러」이다. 또한 포스터 예술가 윌리엄 브래들리 역시 「뱀의 춤」을 포스터로 제작한다. 이 포스터에 대한 평을 살피면 로이 풀러 작품의 화려한 색채와 의상의 움직임은 시각예술가들에게 예술의 대상이 되기에 충분했다는 점을 알 수 있다. (로이 풀러를 주제로 한 시각예술 작품 중 빼놓은 수 없는 작품에는 라울 라르슈의 「로이풀러 램프」가 있다. 이는 실제 조명을 자주 사용하였던 로이 풀러가 램프로 형상화되었다는 점에서 의미를 갖는다.)


사실 풀러는 무용가일 뿐 아니라 퍼포머, 연극배우 등으로 불리기도 하였다. 그녀는 무용가로 활동하였지만, 그녀의 작품들은 무용이라는 장르에 국한 되지 않고 다양한 장르와 교류해왔다. 언급한 바와 같이 조명과 의상 등의 시각요소를 본인의 작품에 적극적으로 이용하기도 하였으며, 외적으로는 영화와의 협업, 그리고 미술가, 조각가, 삽화가, 석판화가 등의 시각 예술가들에게 예술적 영감을 주기도 하였다. 다양한 장르와 활발한 교류를 지속하였던 로이 풀러의 행보는 이후 오스카 슐렘머, 얼윈 니콜라이 등의 협업을 통해 무용작품을 만든 수많은 무용가들에게 역사적 근거와 토대를 마련한다.



    아르누보, 상징주의와 로이 풀러


근대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예술은 ‘예술가 개인의 개성표현의 수단’이 되었다. 근대로 넘어오면서 예술가들이 겪은 가장 큰 차이는 개개인에게 주어진 선택권의 문제일 것이다. 미의 기준은 더 이상 종교의 초월자나 귀족층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예술가 개인과 대중들 개개인의 판단에 근거를 두게 되었다. 예술의 현장에서 기대되는 것은 완벽한 기술이나 기교의 과시가 아니었다. ‘개개인의 표현’의 중요성이 급부상하던 때, 이사도라 던컨이 자신의 춤을 표현론에 입각하여 설명한 것은 그만큼 시의적절한 행보였다. 또한 견고함, 고정됨을 특징으로 하는 중세의 계급사회가 근대로 넘어오면서 ‘역동성’은 중요한 개념으로 부상하였고, 흐르는 듯한 신체의 움직임을 기반으로 하는 던컨의 작품은 더욱 주목을 받게 되었다. 이사도라 던컨이 줄곧 현대무용사의 머리에서 그 자리를 견고히 지켜온 근거 중 하나가 바로 시대상을 자신의 작품에 십분 반영하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시대의 예술사조와 맞물려 작품 활동을 전개한 것은 이사도라 던컨뿐만이 아니다. 로이 풀러 역시 아르 누보의 아이콘이 되어 다양한 장르의 작가들과 협업을 하기도 하였으며, 상징주의 예술가들이 로이 풀러의 작품을 분석하기도 한다. 실제 로이 풀러가 무용 장르를 넘어 동시대의 많은 예술가들과 교류하고 협업할 수 있었던 것은 로이 풀러의 작품 속 당대 유행하였던 사조들과 맞아떨어졌던 요소들이 풍성했음을 반증한다.  


아르누보는 19세기 후반부터 20세기 전반에 걸쳐 유럽에서 유행한 예술 경향이다. 산업 혁명의 기계문명에서 파생된 ‘예술과 산업의 분리’, ‘대량생산으로 인한 획일적 형태’ 등에 대한 대안적 움직임이었다. 영국 윌리엄 모리스가 정교한 수공예품을 통해, 조악한 기계 생산을 대체하고자 했던 미술공예운동을 전신으로, 아르누보 예술가들은 역사적인 양식들을 거부하고 ‘자연주의’라는 대안적 양식을 제안한다. 산업, 기술과 예술이 분리되던 시점에, 이들은 예술을 실생활로 다시금 불러오기 위해, 기계가 아직 완벽히 모방할 수 없었던 ‘자연’을 택한 것이다. (당시 아르누보 예술가들은 순수예술보다는 실생활에 밀접한 공예, 포스터, 건축 양식 등의 응용예술에서 두각을 드러냈다.) 이들은 고전적인 장식 대신, 자연에서 포착할 수 있는 동식물, 곤충이나 불이나 물결 혹은 풍경을 패턴으로 차용하여, 곡선적이고 유기적인 형태를 주로 사용하였다. 또한 유연하고 부드러운 아름다움의 상징으로 여성이 주된 모티프로 등장하기도 한다.


이러한 아르누보 사조에 있어서, 로이 풀러의 작품 활동은 무용계로 그 운동을 확장시키기에 더 없이 좋은 사례였다. 로이 풀러의 치마춤은 유동적이고 유기적인 동시에, 곡선적인 아름다움을 선보인다. 기계생산이 대체해버린 장인기술을 지켜내고자 했던 아르누보 작가들의 예술에서 쉬이 찾아볼 수 있는 넝쿨이나 소용돌이의 패턴은 로이 풀러의 무대에서도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다. 무엇보다 로이 풀러 역시 실제로 불, 뱀, 백합, 나비 등의 자연물을 모티프로 많은 작품을 창작했다. 나아가 여성의 신체를 모티프로 삼는 경우가 많았던 여성무용가였던 로이 풀러는 본인 자체가 아르누보의 아이콘이 되는 동시에, 아르누보에 입각한 작품 활동을 전개했다. 


물론, 아르누보는 근대의 주된 흐름을 차지하지는 못하였다. 아르누보는 기능성을 강조하였던 처음의 의도와는 다르게 지나치게 장식적인 사조가 되어갔다. 현재 바우하우스로 대변되는 모더니즘 경향의 등장으로 아르누보는 당시 ‘퇴폐미술’로까지 불리게 되는 지경에 이른다. 그러나 로이 풀러의 작품은 여전히 (아르누보가 영향을 받았으면서, 때로는 대립되기도 하는) 상징주의 사조를 토대로 해석될 여지 역시 있다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꿈과 상상력, 영성을 추구하는 상징주의 예술가들은 사실적인 기술보다는 은유와 상징적인 의미를 통한 예술 표현에 집중하였다. 인간의 생각을 신체를 통해 구체적으로 드러내고자 했던 낭만발레와 비교했을 때 로이 풀러의 작품은 오히려 실크 천과 조명을 통해 신체를 감추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좀 더 정확한 표현으로 로이 풀러는 다양한 극장예술의 요소를 통해 몽환적인 이미지를 구성해냈고, 이는 상상적인 것의 구현이 되었다. 로이 풀러의 작품은 비록 자연을 모티프로 삼았지만, 모방적이기보다는 표현적이라고 해석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상징주의 미학을 주창한 말라르메는 풀러의 작품을 “시의 극장예술적 구현”이라고도 표현했으며, ‘무’를 시각화했다고도 주장한다.


로이 풀러의 작품 세계는 던컨의 그것만큼이나 시대상과의 활발한 상호작용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비록 아르누보는 거시적인 관점에서 지속적인 반향을 이끌어내지는 못하였지만, 여전히 클림프를 비롯한 분리파 예술가들, 가우디의 건축양식, 꿈과 무의식, 비이성주의를 다루었던 후대의 작가들에게 영향을 미쳤다는 점을 기억할 때 결코 실패로 단정 지을 수 있는 움직임은 아님을 알 수 있다. 또한 로이 풀러는 던컨과 다르게 자국을 넘어 유럽에서 큰 인기를 얻었다는 점, 그리고 그녀의 작품의 사상적 토대가 되었던 아르 누보가 일본 목판화 등의 일본 양식의 유럽적 취향과 상호작용했다는 점이, 국제적인 양식들의 교류를 중시하는 지금의 현대무용에 시사하는 바는 결코 적지 않다.



    마치면서


무용수의 신체 이외의 다양한 극장예술의 요소를 무용에 도입하고, 타 장르와의 교류에도 주저함이 없었던 로이 풀러의 작품 활동은, 현대무용이라는 예술 장르가 언제나 무용수의 몸만을 그 본질로 삼아온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환기시킨다. 각각 결은 다르지만 신체를 통한 내면표현을 중시한 무용가들-이를 테면, 이사도라 던컨에서 시작해, 마리 뷔그만, 마사 그라함, 그리고 현대의 피나 바우쉬 등 까지-을 중심으로 서술된 현대무용사에서, 역동적 신체로부터 비교적 자유로운 작업을 전개한 이들의 작품은 대개 개별 사례로 다루어져왔다. 로이 풀러 뿐 아니라, 오스카 슐렘머, 그리고 비교적 가까운 역사의 얼윈 니콜라이나 필로보러스 무용단의 사례는 하나의 맥을 통해 설명되기보다는 주류 역사에 반해 드러난 단발적 성격의 사건으로 서술되어져왔다. 현대무용의 창시자로서의 로이 풀러의 작품 활동을 검토하는 작업은 위에서 언급한 주변화된 역사가 단순히 이단아적 성격의 돌발 행동들이었음이 아니라, 그것들대로 계승할 역사와 전통을 갖고 있었음을 확인하는 일이다. 


이 보고서가 제시한 “현대무용의 창시자는 이사도라 던컨이 아닌, 로이 풀러이다.”라는 논제는 “무용은 마땅히 이러해야 한다.”는 당위를 형성하기 위함이 아니다. 로이 풀러를 단일한 창시자로 기념해야 함을 주장하려는 것 역시 아니다. 로이 풀러를 통해 그간 무용으로 인정받지 못했던 작품들에 그 역사적 근거를 제시한 이 사례는 결국, 로이 풀러 뿐 아니라, 루스 세인트 데니스, 테드 쇼운 등 수많은 초기 현대무용가들을 통해서도 또 다른 현대무용의 가능성을 발견할 수 있음을 의미한다. 기억해야 할 것은 “현대무용의 창시자, 이사도라 던컨”이 아니라, 현대무용 초기에는 지금 우리가 상상하는 것보다 더 많은 가능성들이 있었다는 사실일 것이다. 



   참고문헌

김말복(2012), “로이풀러의 아르누보적 상징”, 무용예술학연구, 제36 집, 3호, 1~18p

조가영(2018), “영상미디어와 컨템포러리 발레의 융복합 공연에서 나타난 환영성 ‘초월’ 사례연구”, 한국무용과학회지, 제35 권, 제2 호, 97~111p

조은숙(2008), “아르누보적 관점에서 본 로이 풀러의 예술성향에 관한 연구”, 무용예술학연구, 제25 집, 가을, 217~235p

최유진(2008), “로이 풀러의 무대 의상에 관한 연구”. 복식문화연구, 제16 권, 제5 호, 882~884p



(성균관대학교 무용학과 2019학년도 1학기 현대무용사 수업 기말레포트로 작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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