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기우 Mar 23. 2022

보내지 못한 DM

후배는 먼 길을 떠나버렸고, 전하지 못한 DM만 야속하게 남았다.

  나는 카톡 메시지 같은 것들의 답을 매우 늦게 하는 못된 버릇이 있었다. 사실 지금도 좀 남아 있는 것 같긴 한데 확실히 예전보다는 좀 많이 좋아지긴 했다. 지금은 최대한 바로바로 답장하려고 노력하곤 한다. 몇 해 전 학교에서 구르던 시절에는, 어찌나 정신이 없고 자기 관리가 안 됐던지, 밀려드는 연락에 답을 했는지 안 했는지조차 헷갈리곤 했다. 그런 정신머리로 어떻게 학교 활동을 했는지 지금 생각해도 희한한 노릇이다. 그때 그런 문제로 선배들에게도 자주 혼나기도 했다. 하지만 그런 나를 주변 이들은 좀처럼 가만 두지를 않았다. 대표자던 실무자던 간부로서의 삶이 일상이었으니 나는 하루에도 수없이 많은 연락 속에 파묻혀 살았고, 가끔 번아웃이 올 때면 밀려드는 연락이 지긋지긋해 휴대폰을 보는 것조차 두려울 때도 있었다. 요새는 하루에 카톡 한두 개라도 오는 날이 별난 날인 수준이니 그 시절이 참 새삼스럽다.


  하여간 내가 답장 늦던 습관을 그나마라도 좀 고치게 된 계기가 있다. 오늘은 문득 그때의 일, 그리고 그 후배 녀석이 생각나 글을 쓴다. 나는 어떤 후배와의 이별 때문에 오늘 내게 안부를 묻는 이들의 소중함을 배웠고, 가슴이 미어지도록 아픈 경험으로 이를 배웠으니 내 나름으로는 수업료를 혹독하게 치른 셈이다.




  4년 전, 이 나라에서 올림픽이 열리고, 남북 정상이 만나던 그 해에 나는 학과 학술제 준비위원장이었다. 전년도 총학생회 선거 낙선으로 학과단위로 백의종군했었던 때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학내 활동가들의 내부 문제까지 터져 동료 학생 활동가들마저 샅샅이 흩어져버렸고 학교에는 나 혼자 덜렁 남겨진 상황이었다. 수권한 단위 학생회도, 함께 토론하고 도움을 받을 활동가들도 없이 학과로 돌아온 나는 필사적이었다. 애당초 학과에 대한 애정도 커서였겠지만, 절박했던 나는 과로로 쓰러질 정도로 몸 상하는 줄도 모르고 절박하게 학교일에만 매달렸다.


  그때 어떤 후배를 만났다. 지방에서 상경한 우리 과 새내기였던 그 친구는 인상적이었다. (탄핵정국을 고등학교 때 겪은 그즈음 학번 친구들의 정치사회화 수준이 대체적으로 상당히 높은 편이었지만) 유달리 사회문제에 대한 관심과 이해도, 인권감수성도 상당히 높았다. 본인 스스로 남성이었지만 여성문제와 젠더 문제에 대한 관점도 상당히 진보적이었고, 진보정당에 대한 관심과 애정도 있었다. 꿈은 (당시 잘 나가던 닷페이스같은) 인권 관련 미디어 플랫폼을 운영하는 것이라고 말했던 것을 기억한다. 그야말로 "뭐 이런 새내기가 다 있어?"란 말이 절로 나오는 후배였다. 성격도 적극적이고, 사회성도 좋아 주변에 친구도 많았다.


  그랬던 그 녀석이 2학기에 돌연 휴학을 했다. 반수를 할 느낌도 아니었는데 갑자기 휴학을 하니 우리는 다들 좀 의아해했다. 나도 좀 아쉬웠다. 개인적으로 정도 많이 줬던 좋은 후배였다. 2학기에는 그 해 내가 준비하던 학술제 행사를 진행할 예정이었는데 꼭 같이 하고 싶었던 녀석이 학교를 안 나와버리게 되니 아쉬울밖에. 집도 지방이라 어찌 방법이 없어서 아쉬운 맘을 누르고 사업을 진행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막상 사업이 시작되고 나는 해 뜬 낮에는 사람들을 만나고, 해진 밤에는 돈을 벌거나 사업 실무를 하는 정신없는 일상에 파묻혀 후배를 슬슬 잊어가고 있었다.




  그 해 새내기들은 유달리 자기들끼리 잘 뭉쳤고, 술도 어지간히 좋아해 날 당혹스럽게 했다. 그날도 여느 날처럼 그 새내기들이 좋아하던 학교 근처 싸구려 지하 포차 집에서 자기네들끼리 술판을 벌렸다더라. 그런데 녀석들이 (어떤 계기였는지는 정확하게 기억도 잘 나지 않지만) 날 그 자리에 초대했고, 나는 그날 후배들의 공세에 잘 먹지도 못하는 술에 떡이 되어 택시를 타고 도망치듯 집으로 실려갔다. 그냥 그런 술자리였다.


  그런데 그 술자리는 사실 그 후배의 생일로 만들어진 자리였다. 생일을 맞아 지방에서 동기들과 자리를 가지겠다고 약속해 자리를 만들고 기다렸지만, 연락도 되지 않고 자리에도 나타나지 않았던 것이다. 그래서 아이들은 "00이 없는 00이 생일파티"조로 자기들끼리 모여 술자리를 즐긴 것이고 나는 얼떨결에 그 자리에 꼽사리를 끼게 된 것이다. 그러고도 이튿날에도 연락이 되지 않던 녀석의 안부를 다들 궁금해했다. 이렇게 갑자기 잠수 탈 놈이 아닌데.


  비보는 며칠 뒤 우리 앞에 전해졌다. 오지 않던 후배는 병원에 있었다. 전말은 듣고도 믿기지가 않았다. 그러니까 그 후배는 어렸을 때부터 희귀 암을 앓았고, 전이와 재발이 반복되는 과정에서도 항암을 견디고 이겨내며 회복해 입시를 마치고 우리 학교에 입학한 것이었다. 2학기에 돌연 휴학을 한 것은 그의 병세가 다시 위중한 상태에 접어들기 시작해서였다. 그런데 그날, 그 아이의 생일날, 그 아이는 서울에서 자기를 기다릴 친구들을 만나기 위해 컨디션이 좋지 않음에도 기차에 올랐다. 그리고 결국 서울에 도착해 역에서 내렸지만 그만 역에서 쓰러지고 만 것이다. 엠뷸런스에 실려 가까운 병원에 이송되었지만, 회복이 묘연하고 이송조차 위험한 상태였기에 그는 결국 세브란스 암센터 중환자실에 입원하게 된 것이었다.


  이게 무슨 청천벽력 같은 이야기란 말인가. 나는 처음에는 이 전말을 듣고도 현실성이 전혀 없는 얘기처럼 느껴져서 믿기지가 않았다. 당장 진행해야 하는 사업 일정에 이미 몸을 담은 후배들도 비통해하고 있었다. 어떻게든 대책을 세우고 사업도 진행해야 하니 스스로 중심을 잡긴 잡아야 했다. 그런데 너무 마음이 참담해 뭘 해야 할지 솔직히 앞이 깜깜했다. 사업을 같이 준비하던 친구들한테는 최대한 내색 않고 침착하게 대책을 토론했지만, 그때 난 사실 몹시 힘들었다.


  연락 채널이 되어 준 후배의 고등학교 동문은 임종이 임박한 상황이라고 했다. 우리들은 되는 대로 삼삼오오 중환자실로 문안을 갔지만, 면회도 어려운 병세의 위중함에 먼발치에서 지켜보는 게 다였다. 당장 무너져도 이상할 게 하나 없는 상황이지만 자식을 위해 힘겹게 버티고 계시던 그 아이 부모님들. 손 한번 잡아드리는 것 말곤 할 수 있는 게 없었고, 그마저도 부담이 될까 황급히 병원문을 나서고 말았다.


  학생회 대표자와 학년 대표를 포함해 당시 학과 운영의 주체들이었던 몇몇 소수가 모여 조용히 회의를 가졌다. 아무도 그런 상황을 바라지는 않았지만 어쨌든 우리는 이별할 준비를 해야 했다. 누군가는 그 준비를 해야 했다. 그러지 않으면 아무 준비도 없이 그를 보내게 될 터였다. 당시 학술제 준비로 졸업한 선배들을 만나러 다니며 술자리를 많이 가졌는데, 선배들께 양해를 구하고 일정을 중단하기로 했고, 우리는 상황이 생겼을 때를 대비해 비상연락체계를 가동하기로 했다. 만일의 상황에 설치할 기구의 구성과 운영, 필요한 실무사항까지 모두 준비를 마쳤다. 단, 그날 회의와 연락체계는 대외비로 하기로 했다. 우리가 이런 준비를 하고 있단 것을 굳이 학우들에게 알릴 필요가 없었고, 사실 이 기구가 기능을 시작하지 않게 되기를 우리 모두가 간절히 바라고 있기도 했다.


  병원에서는 1~2주를 이야기했다. 조금씩 호전되는 것도 같단 소식이 들렸고, 생각보다 녀석이 잘 버티고 있었다. 부디가 혹시가 되고, 점점 희망이 보이는 듯했다. 병원이 얘기했던 기간을 넘기고도 무탈해서 우리는 점점 느슨해지고 있었고, 한편으로 안도하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주말 아침, 후배는 우리를 떠났다.



  대절했던 버스에 학과 아이들을 다시 실어서 서울로 올려 보내고, 나는 상황이 괜찮은 예닐곱 명과 함께 공주에 있는 식장에 남아 발인을 지켰다. 짧은 1일장이었다. 다시 서울로 올라오는데 어찌나 마음이 허하고 비통하던지. 가뜩이나 애끓던 학교 속 내 상황과, 추한 꼴을 보이며 도망친 '자칭 운동권' 선배들 모습까지 겹쳐보였다. 그런 인간들도 지금쯤 어디서 잘 먹고 잘 잘 텐데 꿈 많고 열정적이던 스무 살 후배는 왜 이리 말도 안 되게 일찍 가야 하는가. 야속해서 가슴이 터져버릴 것만 같았고, 그날은 세상이 다 원망스러웠다. 화장장에서 먹은 몇 잔 소주 기운에 식을 치른 피곤까지 더해져 서울 올라오는 차에서 자다 깨다를 반복했는데, 깨 있을 때마다 속으로 올라오는 욕지거리를 다스리느라 애를 먹어야 했다. '이 망할 놈의 세상, 진짜 망해버리라지.'


  나중에서야 안 사실인데, 후배는 내게 페이스북으로 DM을 보냈었다. 그걸 그 아이가 쓰러지고 나서야 알았고, 뒤늦게 답장을 했지만 휴대폰은 보지도 못하고 그 녀석이 떠나버렸다. 그게 지금도 미안함으로 남았다. "(학술제) 같이 하겠다고 했었는데 같이 못해서 죄송해요. 행사하는 날 꼭 올라올게요." 카톡도 전화도 두고 왜 페북 메시지를 보냈는지는 영원히 알 수 없을 의문으로 남았다. 답을 전하지 못하게 된 게 지금도 정말 미안하고 속상하다.


  후에 부모님께 들은 얘기로 추측컨데, 그 생일날 전에 이미 후배 스스로도 본인에게 남은 시간이 얼마 없다는 걸 대충 알고 있었던 것 같다. 특히 대학에서의 첫 학기를 보내며 항암을 비롯해 몸 관리를 잘 못 한 것도 병세 악화에 영향이 컸던 모양인데, 부모님 반대에도 서울로 대학을 가겠다고 고집을 부렸다고. 그래도 그 아이의 마지막 1년은 의미 있고 값진 시간이었을 거라고 나는 확신한다. 짧지만 길었던 그 한 학기, 우리도 그 친구 덕에 정말 많은 걸 배웠다. 내가 기억하는 그 친구는 그 짧은 시간에도 주변이들에게 많은 배움을 주고 간, 그런 친구였다.


  몇 달 후 학술제를 마치고, 학과 친구들이 단과대 건물 뒤편 전망 좋고 양지바른 곳에 그 친구를 기억하는 의미로 나무를 한 그루 심었다. 그 친구가 떠난 지 3년 반이 넘게 지났다. 해마다 기일이 되면, 혹은 가끔 그 친구가 생각날 때면 거길 찾았다. 전해지 못했던 그 DM이 그 친구에게 닿았으면 좋겠다. 가끔 생각이 나고, 미안하고, 다시 만나고 싶다.


2022. 03. 21.

매거진의 이전글 내 운동은 액세서리였을까.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