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쨌든 배신했던 선배는 운동을 하고, 원칙을 지켰던 난 운동판을 떠났다.
예전에 학교 운동하던 시절에 선배들이 있었다. 나는 그 선배들을 좋아했고, 그 선배들 덕에 운동을 결심했다. 학생운동을 한다는 건 많은 걸 포기해야 하는 일이었고, 나아가 운동하는 삶을 산다는 건 "자기 스스로를 역사발전의 도구로 쓴다는 것."이라는 거창한 이야기들을 선배들과 나누곤 했다.
해가 가고, 학번이 높아질수록 학교 현장과 학교 활동을 하던 활동가들이 나에게 요구하는 수준은 높아져만 갔다. 어쨌든 우리의 운동은 조직적으로 함께 하는 것이었고, 방법론이든 노선이든 철학이든 단일한 사상과 방법 하에서 이루어져야 했다. 그래서 나도 자연히 거기에 맞는 사람으로 점차 개조되어갔고, 그 과정에는 선배들의 부단한 노력이 있었다.
하지만 나는 말 안 듣고 속 썩이는 후배의 축에 속했다. 학과도 정치학을 전공한 데다가, 고등학교 시절부터 아는 것 많고 이것저것 관심도 많아 운동 비스무리한 것들에 발을 담갔다 빼 본 경험이 있으니 겉멋은 겉멋대로 들었지만 속은 비었다. 아직 할 줄 아는 것도 별로 없고, 역량과 능력은 부족했으며, 태도와 '품성'에도 어려움이 많아 현장에서는 늘 사건사고와 문제를 일으켰다. 그런 와중에도 고집은 더럽게 세고, 주워들은 건 또 많으니 뚫린 입으로 입바른 소리는 멈추질 않았다. 그러니 선배들은 내가 얼마나 '다루기' 힘들었을까.
그때 우리 학교에서 최고학번 격 선배가 나를 데리고 면담을 한 적이 있다. 그 당시 선배들은 내가 가지고 있던 여러 '모순'을 극복시키냐 못 시키냐의 중대 기로에 놓여있었다. 내가 앞으로 운동을 계속할 수 있는지 여부를 가르던 굉장히 중요한 타이밍이었을 거다. 그다음 단계로 나아가 더 역할을 키울 수 있을지, 아니면 아직 더 준비가 필요한 지 판단을 해야 했다. 선배들은 내가 현장에서 '토론'이 잘 안 되고 하던 게, 당시 나를 지도하던 선배가 여성인 데다가 혼자였기 때문이라고 판단하는 경향이 있었다. 그래서 나와 무려 일곱 학번 차이가 나는, 고학번 남성이었던 데다가 주변이들에게 인정받고 실력도 있었던 그 선배에게 나를 맡겼던 건 아닐까. (나는 이런 해결책을 낸 게 오히려 그들의 젠더 감수성이 바닥이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했었지만 입밖에 꺼내진 않았다. 그리고 이런 내 판단은 슬프게도 적중했고, 나중에 이런 방식이 큰 문제가 되었다.)
나도 실제로 그 선배를 좋아했고, 또 존경했다. 그때 나는 운동하는 사람이면서 좀 착하고 괜찮은 이는 누구든 쉽게 존경해버리는 습성이 있었다. 그러질 말았어야 했는데. 여하튼 그 선배와 맥주 몇 잔을 하면서 대화를 나눴는데, 사실 그건 좀 혼나는 자리였던 것 같다. 결국 대화를 하다 하다 선배의 이야기가 결론에 다다르게 되었다.
"그래서, 나는 네 운동이 너를 장식하는 액세서리가 되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나는 운동에 진심이었다. 내가 입바른 소리를 달고 살았던 건, 내 운동의 이유가 그런 데 있기 때문이었다. 최소한 이 운동권들의 공간에서 나는 내가 옳고 정의롭다고 생각하는 것들을 상식으로 공유하며 대화할 수 있었다. 선배들은 그런 내게 무엇이 더 옳은 것인지를 알려줬고, 나는 그걸 빠르게 흡수하고 있을 따름이었다. 그런 내게 내 운동이 액세서리라니!
우리끼리 자조적으로 낄낄대던 말 중에, 실천 없이 자신을 잘난 지식인처럼 포장하고 싶어 운동과 진보적 사상을 동원하던 이들을 멸칭하는 말이 있었다. 그게 소위 '패션 좌파'였다. 뭐 내가 그렇다는 것인가? 실력도 배움도 아직 부족해 항상 옳게 실천하며 살진 못하더라도, 내 운동에 대한 관점과 입장은 늘 진심이었다. 나는 그렇게 가벼운 마음으로 거기에 함께하고 있는 게 절대로 아니었다. 선배들이 야속했다. 그 자리에서 항변하다가 결국 울음을 터뜨렸던 걸로 기억한다. 그래서 선배가 날 집에 보냈던가? 기억은 잘 안 나지만 뭐 그랬던 것 같다.
그러고 몇 년 뒤에 우리 학교 운동권이 한번 '망했다'. 아주 극소수가 결국 살아남아 다시 명맥을 잇긴 했는데, 주로 다른 공간에 파견 나가 있었거나 혹은 군 복무 중이어서 일련의 사건들을 피한 이들이 대부분이었다. 공개된 공간에 그 사건을 다루기에는 많은 사람들에게 너무나 큰 상처여서 그러기는 어렵지만, 책임도 신념도 동지애도 망각한 정신 나간 가짜 운동권들의 파렴치함 때문에 일어난 사건들이었다. 동료를 상처 입히거나 배신한 이들이 있었고, 그걸 보듬고 바로잡아야 할 이들은 숨은 동조자였거나, 혹은 잠적하고 도망쳤다.
못해도 스무 명이 넘는 선후배 활동가들이 어느 날 갑자기 뿔뿔이 흩어졌다. 그 과정에서 선배일수록, 책임이 클수록 아주 추하고 흉한 모습을 보이며 사라졌다. 가족 같던 동지에게 씻을 수 없는 상처를 입히고 사라진 이들이 많았다. 혹은 죽었는지 살았는지 무책임하게 숨어버렸다. 어느 개인의 책임만으로 일어난 일은 아니었지만, 일련의 사건들에 '그 선배'의 책임은 분명 엄중했다. 그 선배는 당시에 아주, 매우 큰 오류와 잘못을 저질렀다. 더 큰 문제는 그가 저지른 잘못을 꼭 밝혀야 했음에도 은폐하고 숨겼다는 것이다. 덕분에 일련의 상황에 올바른 방식으로 접근해 해결의 실마리를 찾을 골든타임을 놓쳤다. 그리고 이 때문에 나를 포함한 여러 활동가들은 그 시기를 겪으며 정신과적 치료를 요하는 상태에까지 이를 정도로 크게 상처입고 말았다.
그 선배와 동기였던 마찬가지의 어떤 고학번 선배는, 역시 가장 책임이 큰 사람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어디론가 잠적해버렸다. 그리고는 다른 지역의 어떤 활동가와 몰래 결혼식을 올리더니 부부가 나란히 야반도주해 운동을 떠났다. 그 와중에 운동을 그만둔 또래의 학교의 옛 운동권 친구들에게는 청첩장을 돌렸고, 덕분에 나도 그의 결혼 사실을 알게 되었다. 심지어는 학교에 몰래 숨어들어, 학생회 활동하다 보면 자연히 알게 되는 유관부서(학생처 같은)의 교직원들에게까지도 청첩장을 돌렸다더라. 이 이야기를 듣고 나는 그 결혼식장에서 소화기라도 뿌리지 못한 것을 진심으로 아쉬워했다. 미리 알았다면 가서 소화기라도 터뜨렸을 텐데. 그 선배들이 아이를 낳았다는 소식을 듣고, 그게 잘못이란 걸 알면서도 나도 모르게 진심으로 그 아이를 저주하고 말았다. 어떤 다른 학생운동 선배는 부모의 잘못된 선택으로, 축복받기는 커녕 많은 이들의 분노와 저주 속에 태어난 그 아이의 안타까운 운명을 동정했다.
놀랍게도 내게 액세서리 이야기를 한 선배는 이후에 운동판으로 다시 돌아왔다. 그리고 지금도 자신의 현장에서 '헌신적으로' 운동하는 삶을 살고 있다고 소식을 전해 듣는다. 정작 나는 이후에 홀로 지키던 학교 현장 재건을 위해 복귀했다가, 결국 돌고 돌아 운동을 그만두고 말았다. 많은 주변 이들은 그를 이해하거나, 혹은 용서하거나, 그것도 아니면 그냥 잊고 살아야 한다고 했다. 나는 내가 운동을 다시 결심했던 때에도 그것만큼은 할 수 없다고 단호하게 말하곤 했다.
나는 선배들이 족족 도망치거나 숨거나, 혹은 운동을 부정하는 방식으로 그만 둘 때도 홀로 남아 학교를 지켰다. 그리고 내 현장이었던 단위 학생회를 지키고 일궜다. 언젠가 다시 복구하고 회복할 수 있을 거란 마음으로, 말 그대로 썩어 문드러지던 정신을 붙들어가며 현장을 지키고 혈혈단신으로 학교에서 활동했다. 그러면서 후배들을 만나 무릎을 꿇고, 애원했다. "제발 떠나지 말아 달라고". 선배들에게도 부탁했다. "제발 부탁이니 이대로 가지 말라고." 많은 이들이 매몰차게 곁을 떠났고, 나는 나날이 비참해져 갔다.
거의 반쯤 미쳐버려 가던 때에는 술을 먹고 죽겠다고 난리를 피운 적이 몇 번 있었다. 그때 지내던 반지하방에서, 역시나 큰 책임이 있었던, 함께 살던 선배는 도저히 나를 어쩔 수가 없었을 것이다. 그래서 말 몇 마디 제대로 나눠보지 못했던 다른 학교 선배가 나를 진정시키러 그 반지하방에 새벽에 뛰어온다거나, 파견 갔던 우리 학교 선배가 택시를 타고 온다거나 뭐 그런 일들이 계속되었다. 시간이 지나며 나는 점차 괜찮아졌지만 아무튼 나는 그때까지도 내 운동에 진심이었다. 내가 그때 진심이었기 때문에 그랬던 것이다.
그때 그 선배는 어디서 무얼 했던가. 나는 이후에 그와 다시 대화를 나눌 자리를 만들었고, 어쨌든 열심히 다시 운동하시라고 해 주긴 했지만 마음으로 그를 용서하지는 못했다. 운동을 그만둔 지금도 마찬가지이다. 한때 존경했던 운동 선배는 결국, 자기 체면과 위신 때문에 동지들을 배신했다. 그는 내게 액세서리 같은 말을 운운할 자격조차 없었다.
여전히 학교에 남아서 운동하는 소수의 선배들이 있다. 내가 현장 복구를 위해 남아있던 시절 만났던 후배 몇 도 이제는 예전의 나와는 비교조차 할 수 없는 훌륭한 활동가가 되어 학교에서 열심히 살고 있다. 그들에게는 여러 가지 감정이 교차하는데 미안한 마음도 크다. 하지만 그들에 대한 미안함과는 별개로 나는 아직도 따져 묻고 싶은 것이 많다. 그때 잘못을 저지르고, 반성도 사과도 없이 내 앞에서 사라져 버린 많은 이들이 오늘만큼은 일말의 죄책감 속에서 잠들기를.
벌써 몇 해 전의 이야기이다. 시간이 참 빠르다. 다 괜찮아졌다고, 그런 것들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워졌다고 생각하는데도 과거의 기억이 가끔 되살아나는 날이 있다. 오늘이 그런 날이다. 서로 용서하자고, 이제 각자의 행복한 삶을 살자고 이야기하다가도 가끔은 너무 원망스러울 때가 있다. 원망의 기억이라는 건 참 어렵고도 알 수 없는 것이다. 오래도록 가슴 한편에 미움의 감정을 품고 사는 사람들을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2022. 01. 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