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바닥이 찢어져 피를 본 덕에 그와 나는 친구가 되었던 것 같다.
그 형은 입학할 때부터 솔직히 좀 괴짜였다. 나이는 나보다 한 살 많은데, 재수를 해서 동기였다. 2학년 때 전과를 해서 유사한 계열의 다른 학과로 넘어갔지만 그리고도 몇 년은 우리 과에서 학과 생활을 했다. 그래서 사실상 우리 과 구성원이었다.
갓 스무 살 성인으로 인간관계를 처음 만들어가며 모든 게 어색했던 나와 달리 그는 나보다 훨씬 능구렁이 같고 능숙한 사람이었다. 성격 좋은 그의 곁에는 동기들이 많았고, 특유의 여유를 바탕으로 선배들과도 잘 지냈다. 그는 전공인 정치학을 사랑하는 것처럼 보였다.(아마 본인한테 물으면 손사래를 칠지도 모른다.) 나는 원래 사람을 잘 안 가리는 편이었지만, 사실 그와는 거리가 좀 있었다. 친해지려고 시도해 보았는데 어딘지 모르게 가시 돋친 것 같은 말투, 좀처럼 예상되지 않는 그의 괴짜스런 행동 패턴은 때로 날 당혹스럽게 했다. 아 이런 사람이구나. 그냥 그러려니 했다. 그게 그와 나의 1학년이었다.
이듬해가 되자 그는 전과생의 신분임에도 학과 학생회 집행부를 자처했다. 전과한 그의 자격 문제를 놓고 이야기가 많았지만 어쨌든 잘 일단락이 되었다.(하겠다는 사람 많으면 좋지 뭘 그렇게들 빡빡했는지.) 우여곡절 끝에 집행부가 된 그와 4월 초 해오름제를 맞았다. 해오름제는 일종의 학생회 출범식 행사였는데, 단과대 단위로 진행하는 그 행사에서 우리는 실외 가설무대에 새내기들의 공연을 올렸다. 그리고 인준과 출범을 마친 각 학과 대표자와 집행위원들이 무대에 올라 학우들 앞에 인사하는 그런 행사였고, 행사를 마치면 우리는 가설무대 앞 노상에서 막걸리를 나누어 마셨다. 지금 다시 하자고 하면 학내 여론에 밀려 잘 안 될 것도 같은데, 그때 우리끼리는 좋아서 했다.
새내기들 공연을 마치고 자리를 펴고 앉아 막걸리를 한두 잔 나누자 얼굴이 금세 붉어졌다. 4월의 서울 밤. 가까운 곳에 청계천이 흐르는 캠퍼스는 제법 쌀쌀했다. 추워서일까, 술은 금세 올랐다. 자리를 정리하고 학교 앞 2차 자리로 옮길 준비를 슬슬 해야 했다. 화장실을 다녀와야지. 근처에 있던 복지관 화장실을 쓰려고 건물로 들어섰는데, 복도 저만치서 그 형이 오는 게 보였다. 아마도 화장실을 다녀온 모양인 것 같았는데, 이 형이 또 장난기가 발동했는지 취기가 돈 상태로 나를 향해 돌진해 오는 것이 아닌가? 놀란 나는 나도 모르게 그를 밀쳐냈다. (그는 제법 덩치가 있고, 6년 전 그땐 지금보다도 덩치가 더 컸다.) 그런 그는 내게 부딪힌 뒤 고꾸라져 옆으로 넘어졌다.
문제는 그가 넘어지면서 손으로 짚은 것이었다. 복지관 1층에는 문구점, 안경점, 복사집 등등이 입점해있었고, 시간이 야심했으니 모두 폐점해 줄줄이 출입문의 셔터(흔히들 '샷다'라고 부르는 그것)를 내려놓은 상태였다. 넘어지면서 손바닥으로 그가 짚은 건 그 셔터 끝이었다. 정신을 차리니 손에 피가 낭자했다. 정신이 아찔했다. 술이 확 깨는 느낌이었다. 일단 상황을 수습해야 했다. 우리 과 학생회장 형에게 보고했지만 그는 행사 진행과 아이들 인솔로 여념이 없었다. 일단 병원비를 댈 학생회비 카드를 받아서 그를 데리고 걸어서 우리 학교 대학병원으로 향했다.
응급실 접수를 어떻게 했을까. 오래 전인 데다가 술도 좀 올라 있었고 당황했어서 기억은 정확하지 않지만 암튼 내 기억으로는 그렇다. 담당의는 손바닥이 심하게 찢어져 꿰매야 할 것 같다고 했고, 2차 병원으로 이송이 필요하다고 했다. 대형병원 응급실에서 처치하기보다는 그게 나을 것 같단 판단이었을 것이다. 급하게 엠뷸런스를 타고 병원을 옮겨 급한 처치를 마쳤다. 술이 깨야 추가적으로 조치가 가능하다고 했었나? 암튼 나는 그의 회복을 기다리며 병실 복도에서 밤을 새웠다. 소식을 들은 그의 부모님이 새벽같이 서울로 올라오셨고, 부모님께 죄송하다는 인사와 함께 교대를 하자 지하철 첫 차가 다닐 시간이었을 것이다.
온전히 내 책임만은 아닌 일이라고 해도, 분명 내 책임이 있는 일이었다. 마음에 부채감이 컸다. 게다가 그는 야구 광팬이었다. 나와 같은 충청도 출신으로, 팬이 되는 것만으로도 몸에 사리가 생긴다는 그 프로야구팀을 좋아했던 형. 학과 야구 소모임의 정기 출석 멤버이기도 했다. 그가 공을 잘 못 잡게 되면 어쩌나. 맘이 너무 불편했다. 다행히 그렇게 되지는 않았지만 그는 손을 몇 바늘이고 꿰매야 했고, 한동안 붕대 신세를 면치 못했다.
나는 그에게 병원비라도 내가 지불할 수 있게 해 달라고 이야기했지만 그는 한사코 거절했다. 그렇게 계기가 생기고서야 그와 좀 더 마음을 트고 대화할 수 있게 되었는데, 나보다 고작 한 살 형이었던 그는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어른이었다. 그의 괴짜스러움 뒤에는 배려심과 사려 깊음이 있었다. 나는 성인이 되고 그를 만난 것이 경험이 되어, 보이는 것 뒤에 더 많은 것들을 가진 사람들이 있음을 알았다.
박학다식하고 말도 잘했던 사람이었다. 전공분야를 사랑했던 그는 나와 학회에서, 학과 학술행사에서 아주 치열하게 토론했다. 학과 집행부를 하면서 과도한 책임의식으로 고생하던 나를 위로하는 좋은 친구이기도 했다. 학기 후반부에 내가 슬슬 운동권 물이 들 무렵 그는 공군으로 자원입대했는데, 운동권인 나를 놀린답시고 북한에서 지령 보내듯 장난친 편지 한 장을 포함해 3장짜리 손편지를 빽빽하게 써서 내게 보냈다. (벌써 6년도 더 전이지만 나는 아직도 그 편지를 간직하고 있다.) 그래도 그는 내가 하는 일을 묵묵히 지켜보며 응원했고, 그만두는 과정에서는 별다른 말 없이 그저 내 곁에서 나를 위로했다. 우리의 인연은 참으로 우습게도 몇 년 뒤 내가 지하철에서 쓰러졌을 때, 이번에는 그 형이 나를 엠뷸런스에 태웠고 곁에서 응급실을 지켰다. 사는 게 서로 바쁘단 핑계로 그에게 자주 연락하진 못했지만, 언제나 만나면 곁에 있는 것만으로도 위로가 되는 고마운 사람이었다.
그 해오름제가 있고 이듬해였나. 그는 축제 때 학과 주점에서 깨진 소주병을 밟아 또 병원 신세를 졌다. 하여간 오며 가며 사건 사고가 그를 따랐다. 군대에 다녀와서는 학과 학술행사에 세미나 팀장을 맡아 다시 나와 함께했다. 나는 그 행사 준비위원장이었는데, 그의 적극적인 추동과 추천이 없었으면 아마 그걸 못 했을 것이다. 이제는 훨씬 차분해져서 고시생 신분으로 마지막 학기를 마무리하고 있다. 그도 이제 나이가 많다. 해가 바뀌었으니 스물아홉이 되었을 텐데. 내가 복학을 할 때는 아마도 졸업생이 되어있을 그와 다시 학교생활을 함께 할 수 없다는 것이 아쉽다. 나는 언제나 그 형의 앞날을 응원한다.
2022. 01. 02
사진 출처: https://m.moneys.mt.co.kr/article.html?no=2021111110198082053#_enlipl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