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년 전 내 아버지 장례식에 못 왔던 게 미안했다고 친구가 고백했다.
요새 군대는 병사들 휴가 나가기가 꽤나 어렵다. 부대마다 조금씩 차이는 있겠으나, 휴가 후 복귀하면 기본적으로 열흘 가량 격리를 해야 한다. 격리를 하며 PCR 검사를 두 번 통과해야 부대로 복귀할 수 있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한번 휴가를 나가면 기본 3주 정도는 자리를 비워야 한다. 도저히 휴가를 자주 나가기가 어려운 상황. 결국 다 쓰지 못한 휴가는 미복귀 전역, 이른바 '조기(早期) 전역'의 형태로 소진시킨다. 팬데믹이 바꾼 병영생활의 한 단면이다.
나 역시 신병 위로휴가 이래 두 번째 휴가를 상병 3호봉이 되어 6개월 만에 나갔다가 왔다. 격리 3일 차가 넘어가자 슬슬 좀이 쑤셨다. 커튼으로 격벽을 만든 생활관 침대는 병실을 연상케 했고, 하루에 주어지는 세 번의 산책시간 외에는 휴대폰 말고 할 게 없었다. 친구라도 많으면 여기저기 연락이라도 했을 테다. 하지만 대학 다니며 한 거라곤 데모 다니고 학생회 한 것 밖에 없는 데다가, 그마저도 중도하차해버리고 영 쓸모가 없는 상태로 20대 후반이 되어 입대한 내 곁에 연락할 친구가 그리 많지는 않았다.
그래서 좋아하는 작가가 쓴 드라마들을 찾아 몰아보는 중이었다. 그런데 이게 웬 걸, 통 울릴 일이 없는 카톡알람이 떴다. 확인한 나는 눈을 의심했다. 잊고 살던 이름. 중학교 때 친구였다. 처음에는 이게 누구지? 싶다가 3분 정도 지나고서야 내 중학교 시절 절친했던 친구란 사실을 깨달았다. 10년도 더 전의 인연이니 나도 모르게 그에 대한 기억이 희미해지고 있었던 모양이다. 카톡을 보내자 친구는 출근 중이니 저녁에 자기가 전화를 하겠다고 했고, 저녁식사를 마치자 친구로부터 전화가 왔다. 설레는 맘으로 전화를 받았다.
10년 전 그 목소리 그대로였다. 친구는 나와는 달리 아주 건실히 살고 있었다. 그는 초임 교사였고, 당진의 한 고등학교에서 과학을 가르치게 되었다고 했다. 임용이 되었구나. 최근에 친했던 고등학교 후배도 지리교사로 임용이 되었단 소식을 들었는데, 다들 그 어려운 시험들을 어찌 척척 붙는지. 대단하다고 생각하면서도 잊지 않고 연락해줘서 고마웠다. 내가 이 나이에 현역 병사라고 하자 그는 매우 놀랐고, 그간의 복잡했던 사정을 다 설명할 자신이 없었던 나는 "돈 벌고 공부하고 하다 보니 졸업도 입대도 늦었다."라고 대충 둘러대고 말았다. '뭐 완전히 거짓말은 아니지' 따위의 구차한 변명을 스스로에게 대며 상황을 설명하면서, 또 입에 쓴 맛이 돌았다.
친구가 내게 이렇게나 오랜만에 연락한 건 다름 아닌 한 TV 예능 프로그램 덕분이었다. 혼자 사는 셀럽들의 삶을 조명한다는 그 프로그램. 등장하는 한 연예인이 10년 전 친구와 조우하는 뭐 그런 내용이 방영된 모양이었다. 그걸 보며 문득 내가 떠올랐다고, 그래서 전화를 했다고 한다. 30분 안 되는 통화 동안 나는 내가 얼마나 많은 기억을 잊고 살았는지 떠올렸다. 어쨌든 운동을 한다는 건, 다른 곳에 마음을 줄 여유를 갖기 어려운 것이었다. 특히 나처럼 경제적으로 곤궁한 운동권은 더더욱. 그러다보니 어렸을 때 기억을 실제로 '잃어버렸다'. 기억이 오락가락 하기엔 내 나이가 너무 젊은데... 고등학교 시절 같은 반 친구들 이름이 기억해내려 애를 써 봐도 잘 떠오르지가 않는다. 잊고 산다는 게 이렇게나 무서운 것이었다니.
입대 몇 달 전에는 그런 일도 있었다. 마트 마감조 폐점 점검을 마치고 퇴근하면 11시가 넘은 늦은 밤이다. 그 늦은 밤에 같이 일하던 동료 두세 명과 치킨집에서 간단히 치맥을 하고 헤어지기로 했는데, 치킨집에서 중학교 동창을 만났다. 중학교 때 제법 친했던 친구였는데, 우연히 같은 대학에 왔다. 단과대가 다른 그와 오며 가며 마주치면 간간히 인사 정도는 하는 사이었다. 그래서 뭐 이번에도 가볍게 인사 정도만 했는데, 그와 동석한 사람이 어딘가 눈에 익었다. 나와 그가 눈이 마주치자 우리는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서로 "어?!" 하며 놀라고 말았다. 또 다른 내 중학교 동창이었다. 그 둘은 여전히 교류를 계속했던 것이고, 그날 마침 우리학교 근처에서 만나기로 했던 것이다. 그날 결국 그렇게 합석해 소주를 한 병은 넘게 먹고 해어졌는데, 마찬가지로 거의 잊어가던 친구와 만나 그 시절 이야기를 하다 보니 "아 맞아. 그때 그런 일도 있었지." 하는 기억이 새록새록 떠올랐다.
소주를 한두 잔 나누자 더 깊은 이야기가 나왔다. 나는 중학교 3학년 때 내 아버지와 사별했다. 그때 학교 친구들이 단체로 문상을 왔었지만 그 친구는 오지 않았었다.(아니 솔직히 난 기억하지 못했다. 그가 얘기해주고서야 알았다.) 본인은 가고 싶었는데, 부모님이 못 가게 하고 학원을 보내셨다고. 그래서 그것 때문에 부모님과 크게 싸웠고, 아직도 그게 어린 기억 속 상처이자 부모님에 대한 원망으로 남아있다는 이야기. 그게 두고두고 아직까지도 내게 미안한 기억이었다고 했다. 나도 기억하지 못하는 걸 그는 10년 동안이나 내게 미안한 기억으로 품고 살았다. 난 그게 더 미안하다고, 그리고 그 미안함을 간직한 채 날 여전히 기억해줘서 고맙다고 전했다. 월급 타던 시절이라 지갑이 비교적 무거웠던 난 그날 술을 샀다.
대학교 저학년 시절에는 친했던 고등학교 동아리 후배들과 동아리 동창회를 조직해 정기적으로 모임을 갖고 총회도 열고 했었다. 그런 것들 마저도 내가 운동을 시작하고, 후배들이 입대를 하자 흐지부지되어 버리고 말았던 것이다. 그렇게 대학 이전에 만났던 사람들과의 교류가 점점 사그라들었고, 마침내는 아예 기억 속에서 사라지는 수준에 이르러버리고 말았다. 그리고 운동판을 나오자, 그들을 다시 찾으려고 해도 이제는 기억이 나지 않게 되어버리고 말았다.
대학 시절 가장 사람들 속에서 주목받고 빛날 때, 내 주변에는 정말 사람이 많았다. 그게 운동하는 사람으로 내가 가진 태도와 자세 덕분이었는지, 운동하다 보니 얻어 쓴 작고 사소한 감투 덕분이었는지는 잘 모르겠다. 하지만 내가 학교에서 슬슬 사라져가자 어떤 이들은 날 외면하거나 뒤에서 씹을 안주로 삼았고, 어떤 이들은 내 뒤통수를 쳤다. '끗발 떨어진 학생회 선배'의 최후였는지, 아니면 내가 못난 탓이었는지 난 아직도 그 답을 찾는 중이다. 여튼간에 학교에 만들어 놓은 인맥들 덕에 '알고 싶지도 않은' 그런 소식들까지 내 귀에 들어오고야 말았다. 애당초 운동이란 게 빛나고 주목받으려 하는 게 아니고, 그럴 수도 없는 것이라 배웠다. 그런데 꼬꼬마 학생운동권들이 학생회를 하면 종종 빛나고 주목을 받는다. 그걸 알고, 또 그런 것에 매이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었는데도 슬프다. 내가 사랑했던 사람들이었어서 그런 걸까. 인간관계의 무상함을 느낀다.
이제 학생운동과 완연히 멀어지고 나니, 학교 활동 이전의 친구들을 기억해내려고 해도 기억해낼 수 없게 되어버렸다. 대학 후배들도, 고등학교 친구 후배들도 이름을 듣고 얼굴을 떠올리기까지 너무 많은 시간이 걸린다. 그게 너무 슬프다. 한때 가족보다 더 믿고 사랑했던 학교의 '동지'들이 다 떠나버리고, 나도 떠난 사람이 되었단 것도 슬픈데 말이다.
내가 놓치고 잃어버린 인연들, 그리고 체에 거르듯 흩어지고 남은 한 줌의 인연들. 군대에 있으면서 그들을 떠올리며 가끔 다짐하곤 한다. 내게 남은 소중한 인연들은 더 이상 놓치고 잃어버리지 않게 노력해야겠다고. 내게 남은 인연들이 소중함을 깨달았지만, 이미 너무 많은 것들을 잃어버렸다.
2022. 01. 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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