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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기우 Dec 21. 2021

20대 남자 넷이 반지하에 살았었다.

가난했던 운동권 대학생 넷은 반지하방에서 에어컨 없이 폭염을 났다.


  그 해 여름 더위는 말 그대로 살인적이었다.


  나는 2018년, 뚝섬역 부근 성수동 유수지 근처의 반지하방에 살았다. 남자 넷이 살았다. 부총학생회장에 단과대 학생회장까지 거쳤던 10학번 선배를 필두로, 나와 다른 단과대 후배 둘까지 해서 네 명이었다. 16학번이었던 후배는 옆 단과대의 학생회장, 15학번 후배는 집행위원장이던 것 같다.


  이미 고학번들이었던 우리 넷은 다 같이 운동권이었고, 다 같이 가난했다. 대학생들은 가난하지만, 운동권들은 유독 더 가난했다. 모두 그런 것은 아니지만 아무래도 좀 못 살아봤어야 세상 불공평함을 깨닫고 운동판에 뛰어들기가 쉬워서 그랬을까?(그때 우리네 말로는 그런 걸 '계급성'이라고 불렀었다.) 실제로 넷 중에 나와 15학번 후배는 집이 징그럽게 가난해서 늘 집 앞에서 만나면 돈 얘기뿐이었다. 우리 둘은 정말 징그럽게 가난했다. 징그럽다는 말 말고는 달리 표현할 길이 없었다.


  뿐만 아니라 이미 졸업해야 했을 시기를 넘겨 학교에서 '헛짓'을 하는 마당에, 여유가 좀 있는 집안이더라도 본가의 경제적 지원을 기대하기는 어려웠고, 우리들은 과외와 알바를 전전하며 재정대책에 목을 매야만 했다. 그러니 돈을 좀 줄여보자고 동지들끼리 모여 살자 해 본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주방을 포함한 거실 하나와 작은 방, 큰 방 하나씩이 있는 반지하방으로 모여들게 되었다.


  계약을 하고 이사를 가던 날 우리는 들떠있었다. 이제 지긋지긋한 월세 부담에서 어느 정도 좀 자유로워질 수 있다는 기대와 행복. 하지만 300에 60짜리 그 반지하방은 처음부터 만만치 않았다. 입주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찾아온 혹한에, 예고도 없이 어느 날 아침 수도가 꽁꽁 얼어버렸다. 그날은 룸메 넷이 다 같이 가야 하는 전국적인 규모의 큰 대학생 행사가 있던 날이었고, 우리는 결국 세수도 하지 못한 꾀죄죄한 꼴로 행사장에 나타나야만 했다. 장마철이 되자 도대체 어디서 어떻게 들어왔는지 집 안에서 어린애 주먹만 한 개구리가 나왔고, 방음이 잘 안 되는 모양이었는지 우리가 조곤조곤 대화만 해도 옆방의 혼자 사는 여자는 신경질적으로 벽을 두드려댔다.


  하지만 더 큰 문제는 장마가 끝나고 찾아온 무더위였다. 그 해 폭염은 지금도 검색하면 데이터로 확인할 수 있는 아주 기록적인 수준이었고, 한 낮 거리에 서면 에어컨 실외기 앞에 서 있는 느낌이었다. 낮의 더위는 밤으로도 이어져 끔찍한 열대야가 계속되었고, 나는 밤마다 땀을 세숫대야만큼 쏟으며 악몽에 시달려야 했다. 그때 그 집에는 무려 에어컨이 없었던 것이다! 당시 나는 여러 가지 이유로 학생운동에 대한 회의와 절망에 빠져 마음이 건강치 못했다. 그 상황에서 살인적인 열대야와 열악한 주거환경은 내 몸까지 병들게 만들었고, 내 몸과 마음은 급속도로 야위어만 갔다.


  하도 더워서 적신 수건을 얼려 두르기도 해 보고, 큰 냄비를 구해와서는 얼음을 부은 뒤 선풍기 뒤에 둔 채 잠을 청하기도 해 봤지만 그걸로 폭염을 이겨낼 수는 없었다. 결국 후배 둘은 각각 인천과 상계동의 본가에서 자고 오는 횟수가 잦아졌다. 나는 더위를 잊으려 술을 먹었다. 그때 친하게 지내던 같은 과 한 학번 후배지만, 나이는 삼수생이어서 한 살 위인 형이 있었는데 그 형 살던 학교 기숙사 앞에서 모기에 뜯겨가며 소위 '노상을 까던'기억이 선하다. 더위와 함께 학생운동에 대한 회의도 함께 잊혔으면 하는 바람이었을까? 나는 자꾸만 애꿎은 술을 먹었다.


  술을 먹지 않는 날에는 외박을 자주 했는데, 그 장소는 학교였다. 어쨌든 학생회에 감투가 있었던 나는 사무실같이 쓰던 공간이 학교에 있었고, 격무를 핑계로 밤을 새우며 학교 업무에 몰두하다가 한여름 이른 새벽 동이 틀 쯤에서야 몇 시간 의자에서 쪽잠을 청하고 집에 돌아왔다. 동영상 제작이나 유인물 편집처럼 한번 몰두하면 시간을 끝도 없이 잡아먹는 작업을 골라 집중하면 여름밤은 빠르게 지나갔다. 나는 그때 삼성역 고급 쇼핑몰에 입점한 식당에서 아르바이트를 했는데, 풀타임으로 12시간 근무를 하고 나서도 퇴근하고는 밤 10시에 학교로 향했다. 결국 그 짓을 계속하다가 지하철에서 쓰러져 우리 학교 대학병원 응급실로 실려가게 되고서야 그 해 여름이 끝났다. 그게 아마 9월쯤이었을 거다.


  어땠든 그 여름은 그렇게 갔다. 사실 그 집에 살던 기억이 그렇게 좋게 남아있진 않다. 당시에 학교 활동가들끼리 갈등을 빚는 과정이 있었고, 10학번 선배와는 결국 관계가 틀어졌다. 후배 둘은 나보다도 훨씬 먼저 학생운동을 접었고 나는 혼자 남아야 했다. 그래도 그 후배 둘과는 아주 가끔 만나 소주 한 잔 하는 사이는 된다. 1년에 한두 번이나 될까. 만나면 우리 얘기는 돌아 돌아 그 시절 그 집 얘기로 간다. 그때 정말 더웠다고, 그때 진짜 힘들었다고.


  그 반지하방은 우리를 마지막 세입자로 결국 재개발 예정지가 되어 철거되었다. 이사하고 1년 뒤, 갑자기 생각 난 김에 찾아가 본 그 동네는 공터가 되어 재건축을 앞두고 있었다. 그렇게 덥고 힘들어 지긋지긋했는데도 문득문득 그 집 살던 시절이 떠오르는 걸 보면 사람 기억이란 게 참 알다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 추억인지, 악몽인지 시간이 흐르면 구분이 잘 안 될 때가 있다.


2021.12.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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