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기우 Dec 27. 2021

"학우 여러분, 제가 잘못했습니다."

OT에서 일어난 '음주강권' 사건. 사과문은 곧 신문기사가 되었다.

  2010년대 대학문화와 학생자치를 관통하는 키워드를 꼽으라면 무엇을 골라야 할까. 복지? 축제? 탈-정치? 무관심? 모르긴 모르지만 사람들마다 분석도 진단도 제각각일 거라고 생각한다. 워낙 학교마다, 단위마다(운동권들은 학과 학생회, 단과대 학생회 이렇게 한 그룹들을 구분해 부를 때 '단위'라는 표현을 쓰곤 한다.) 워낙 현황이 다 달랐을 거라서, 각기 다른 관점으로 그 시절을 분석하고 결론지을 거라고 생각한다. 뭐 결국 그 끝은 코로나라는 뜻밖의 복병 앞에 백지상태라는 허무한 결론으로 이어지는 모양새가 되어버렸지만 말이다.


  누군가 내게 같은 질문을 던진다면 나는 '꼰대'를 꼽는다. 2010년대 대학 학생사회의 문화. 꼰대 문화로 촉발된 갈등들로 시작해, 그 꼰대 문화에서 벗어나는 과정으로 끝났다. 소위 MZ세대네 뭐네 하며 20대를 분석하고, 90년대생들을 해석한 책이 베스트셀러에 등극하는 그런 세상이다. 바로 '그 세대'가 처음 대학 문턱을 넘던 시기. 그게 내가 학교생활에 가장 열렬하던 시절이었다.




  내가 대학에 입학했을 당시, 우리 과와 단과대의 술 문화는 정말 어마어마했다. 선배들은 OT(우리는 그걸 새내기 새로 배움터, 새터라고 불렀다.)에서부터 술을 강권했다. 선배가 주는 술에 '밑잔'을 남기는 건 대단한 죄악이었다. 아직도 기억나는 내 새터의 기억. 같은 방으로 배정받은 두 학번 위의 여자 선배는 자기 휴대폰 번호 11자리를 한 번호씩 맞추라고 했다. 물론 틀릴 때마다 나는 벌로 소주를 한 잔씩 마셔야 했다. (주변의 만류에 어색한-아니 사실은 비굴한-웃음으로 때우며 한 대여섯 잔으로 마무리했던 것 같긴 하다.) 우리는 겁에 질렸고 술의 무서움을 실감하며 새터를 보냈다. 도대체 이 양반들의 간에는 무슨 기계장치를 달았길래 술이 끊임없이 들어가도 저래 멀쩡한 것인가! 소주병을 들고 덤비는 선배들의 음주강권보다, 끊임없이 술을 밀어 넣는 그들의 주량이 더 무서웠다. 대학생이 된다는 건 이런 거구나... 


  하여간 워낙 술이 약했던 나는 거의 대부분의 시간을 술에 취해있거나, 혹은 술병으로 몸져 있었던 바람에 멀쩡한 기억이 별로 없게 되었다. 그리고 개강이었다. 3월이 되자 선배들을 학과 행사에 우리를 동원해 행사의 '규모'를 키우려 부단히 노력했다. 본디 행사를 조직하려면 사업이 매력적이어야 하고, 사람은 그것보다 더 매력적이어야 한다.(이것은 운동권 시절 내가 선배들에게 배웠던 '기풍'이기도 했고, 내 나름 철칙으로 삼았던 사상이기도 했다.) 그러나 학과사업에서 선배들이 새내기를 동원하는 방식은 좀 달랐다. 우리는 누가 시킨 적도 없지만 이유도 모른 채 행사에 안 가려면 '허락'을 구해야 하는 것만 같은 느낌을 받았다. 일종의 압박이었다. 


  행사를 마치면 뒷풀이 조의 술자리가 자연스레 이어졌다. 물론 이런 술자리는 한 달 30일 내내 하루도 거르지 않고 연달아 있었고(주말의 비공식을 포함해서), 한번 모였다 하면 사람을 줄여가며 3차 4차까지 했던 술 값은 선배들의 몫이었다. 물론 꾸준히 자리를 나온 후배들은 은근한 예쁨과 챙김을 얻었다. 자연스레 더 친해질 기회가 많아지는 측면도 물론 있었겠지만 하여튼 그랬다. 술도 약했던 나였지만 어쨌든 나는 그 '은근한 예쁨'을 받는 후배의 축에 들고 싶었다. 이듬해에는 나도 모르게 그걸 후배들에게 똑같이 답습하는 학과 학생회 간부가 되어가고 있었다. (뭐 사실 나도 그 문화가 처음에 싫었지만 그 선배들을 좋아하게 되어버렸건 게 문제가 아니었을까. 그리고 그들 중 몇몇은 심지어 지금도 좋아하는 것 같기도 하고.)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뭔가 문제가 있단 생각을 떨칠 수가 없었다. 2학년 학과 집행부가 되자 고민은 더 깊어졌다. 아래로는 불만을 제기하는 후배들과 위로는 '꼰대'문화가 관성이 되고 습관이 된 선배들 사이에 끼인 내 동기들은 하나둘 지쳐 떨어저나가기 시작했다. 신입생들의 감수성과 문제의식은 해가 다르게 커져만 가는데, 공동체는 점점 삐걱거리며 구조적인 모순들을 드러내고 있었다. 운동권 꿈나무였던 내가 이듬해 단과대 학생회장이 되어 집권하고 임기를 시작하며 현황을 분석했을 때 나와 운동 선배들은 "이 상황을 해결해나가지 않으면 더 이상 공동체랄 게 남아있지 않을 것"이란 위기의식에 공감하고 있었다. 계속 이런식으로 하다간 후배들은, 신입생들은 학생사회를 외면할 게 뻔했다.(이런 대학사회의 폭력적인 문화들이 우습게도 운동권 선배들의 유산이었고, 후배인 우리들이 그걸 청산하는 것으로 업보를 치르고 있단 걸 알게 된 건 몇 해가 지나고 나서였다.)


  그러나 그런 문제의식과 당면 현황에 비해 내 능력과 권위는 턱없이 모자랐다. 그 즈음 우리 단과대 학생회장은 학과 학생회장 출신의 4학년들이 맡는 것이 관행이었는데, 나는 모종의 사정으로 과 회장을 건너뛰고 3학년에 최연소 단대 회장이 되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그 해 학과 학생회장들은 대부분 나보다 나이가 많거나 학번이 높았다. 나는 그들을 이끌고 그 해 새터를 준비하는 것으로 임기를 시작해야 했다. 도대체가 말 한마디 씨알이 먹혀들지를 않았다. 당시 우리 단과대 학생회는 몇 년간 그 역할이 부실해 입지가 대폭 축소되어 있었고, 나이 어리고 경험없는 대표자와 몇 년간 부실했던 역할이란 콜라보레이션으로 단과대 학생회의 권위는 이미 땅바닥에 떨어져 있었다.


  더욱이 학과 실무자급이었던 상당수의 2학년들은 1년 만에 훌륭한 '젊은 꼰대'로 성장했다. 나는 과짱(과 학생회장)들과 2학년 과 집부(집행위원, 집행부 실무자)들을 데리고 "술 강권하지 말고, 상식적인 술자리를 하자"는 것을 어렵게 빙빙 돌려 설명하는 인권 교양을 진행했지만 내가 돌아서면 들려오는 건 냉소와 비웃음이었다. 나는 그때 어렸고, 능숙하지 못했고, 실력도 경력도 없으니 현장에 대한 장악력도 없었으며, 사람들을 설득하는 법도 잘 모르던 풋내기 학생운동가였다. 좌절의 시간들이었다.




  사건은 새터가 끝나고 돌아와서 터졌다. 새터는 험난했다. 부랴부랴 어렵게 꾸린 단과대 실무자들 몇몇이서 온갖 시행착오를 겪으며 버겁고 힘겹게 행사를 치렀다. 나보다 한 학번 아래의 2학년 부학생회장은 학과 대표자들과 의견 갈등으로 이미 행사장에서 한 대거리를 한 터였다. 우리는 목표한 바에 얼마나 못 미쳤는가! 입에 쓴 맛이 돌았다. 그런 기분으로 돌아와 맞은 주말의 무슨 집회 자리였다. 서울 시청광장이었는데 그때 뭐 때문에 집회를 하고 있었는지는 기억도 안 난다. 두 학번 위의 12학번 집행위원장 누나(보통 집장은 단위사업을 지도할 만한 선배 격으로 세우곤 했다. 당시로선 우리 단대에 거의 유일하게 남은 운동권 선배였다.) 얼굴이 사색이 되었다. 학교 커뮤니티 게시판에 고발글이 연달아 올라오기 시작했다. '그 단대' 선배들은 술을 먹이고, 후배들을 괴롭혔다는 것이다. 특정 학과가 지목되었다. 돌아오는 버스에서 선배 이름 외우게 시키며 못 외우면 술을 먹였단다. 그 술의 이름은 '총명탕'. 아, 도대체 얼마나 총명하고 비상한 두뇌를 가진 자의 네이밍 센스인가! 5년도 더 된 이야기지만 나는 아직도 가끔 이 생각을 하면 맘이 숙연해진다.


  일단 집회 장소를 빠져나와 긴급회의를 했다. 사실관계 확인이 필요했다. 제보되는 내용들은 거의 다 사실이었고, 사실 빙산의 일각이었다. 그래 솔직히 내가 목격한 것도 솔직히 한 두 개 있었던 것 같다. 입이 열 개여도 할 말이 없었다. 아니, 사실 입이 한 개지만 100마디도 더 하고 싶었다. "나는 억울해요. 난 하지 말자고 했어요. 애들이 제 말을 안 듣는데 어떻게 합니까?" 아주 어리고 유치한 생각들이 내 머릿속을 맴돌았다. 몇 시간이 흐르자 그 제보들은 신문기사가 되기 시작했고, 또 몇 시간이 지나자 어떻게 알았는지 기자들은 내 번호를 알아내 휴대폰으로 전화를 걸기 시작했다. 허 참. 정신이 아득해졌다.


  우리는 사과문을 썼다. 아마 초고 기안은 부학생회장이 했던 것 같다. 무엇을 왜 잘못했고, 무엇이 문제여서 이런 문제가 생겼다. 우리가 앞으로 이렇게 하겠다. 정말 죄송하다. 따끔하게 짚어주셔서 감사하다. (다 저희의 잘못이고 불찰입니다 학우 여러분. 한 번만 용서해 주시고, 학생회를, 학생사회를 떠나지 말아 주세요.) 담담하게 글을 쓰고, '그래 이게 책임지는 위치의 책임지는 자세지'라고 생각하다가도 잠깐 숨을 돌리면 부아가 치밀었다. 나는 그때 다짐했다. '내가 대학에서 운동인지 학생횐지 하여간 이 짓거리를 한다면, 이 꼰대 문화랑 싸워서 이겨야겠다." 내가 문제의식이 있었을지언정, 나는 그 문화에서 얼마나 자유로웠겠나 싶다. 어쨌든 그 때 나는 그렇게 다짐했다. 여하튼 그 독기로 쓴 사과문은 그대로 다시 기사가 되었다. 며칠 뒤 개강을 하고 학과 개강총회를 돌아다니며 '재발방지 대책'같은 느낌의 PPT를 띄우고 열심히 고갤 숙이고서야 그때의 그 사단은 일단락이 되었다. 단과대 학생회장이 되어 학우들 앞에서 내가 가장 먼저 한 일은 그러니까, 사과문을 쓰고 고개를 숙인 것이었다.




  임기 초의 그 경험은 어쨌든 큰 자산이 되었다. 고개를 숙이는 일은 나날이 더 쉬워졌다. 물론 '고개를 숙이는'것 뿐 아니라 어떤 상황이든 겸허하게 받아들이고 인정하는 데 좋은 자양분이 되었다. 안타깝게도 내 학교생활 커리어를 통틀어 고개를 숙여야 할 사건사고는 그게 끝이 아니었다. 어느 해에는 축제에 취한 누군가가 단과대 복도에 소화기를 뿌린 사고를 수습해야 했고, 또 어느 해 행사를 마치고는 술에 취한 구성원들이 저지른 실수를 수습하는 데 사용한 비용을 두고 공개적인 자리에서 책임을 추궁받았다. 하지만 유약했던 내 멘탈은 강철이 되어 한 3년차 쯤 되자 어지간해서는 기세가 꺾이지 않았고, 그 와중에도 사이보그마냥 "이건 잘못이고 저건 평가해 볼 지점이지"라고 주절대며 필요하다면 언제든 사과에 인색하지 않았다. (물론 그러는 사이 나도 모르게 내 속은 썩어 문드러지고 있었고, 주변이들은 공감능력이 고장났다고 욕했다. 그것도 문제였다.)


  한 3년쯤 뒤에, 내가 고이다 못해 썩은 물 소리를 듣는 학생회 간부가 되어 단과대 학생회를 다시 개척하던 때, 우리 단위의 문화는 정말 많이 달라져 있었다. 나 혼자 만든 성과는 아니었지만 정말 지난하고도 힘겨운 시간들의 결과였다. 물론 운동 그만 두던 즈음에는 "본질을 잃은 지나친 PC에 빠졌다", "학우대중들과 괴리된 거 아니냐" 따위의 평가들도 나오고, 그런 것 때문에 새로운 양상의 어려움을 겪는 단위들도 많단 얘길 종종 전해듣기도 했었지만 분명 문화가 바뀐 건 성과였다. 나는 운동을 그만두고 나서 지난 대학생활을 평가하며 무력감과 허탈감에 빠질 때마다 그런 소소한 성과로 스스로를 위로하곤 했다.


  그 문제의 새터로부터 3년 뒤에 나는 "단과대 학생회 비상대책위원회 산하 새내기 새로 배움터 정상화위원회 전문위원"이라는 말도 안 되게 긴 직책을 달고 단과대 학생회를 다시 세우는 데 함께했다. 눈 쌓인 강원도 평창의 수련원에서 후배들과 눈싸움을 했던 그 해 새터. 나한테 눈덩이를 던지던 후배들은 새내기들에게 술을 강권하지 않았고, 스스로 만든 인권규약을 지켰다. 물론 나한테는 좀 예외였지만.


2021. 12. 20.

매거진의 이전글 20대 남자 넷이 반지하에 살았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