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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기우 Jan 25. 2022

농활에는 '수입산'이 없었다.

나의 농활 이야기 ②  - 커피도 라면도 농활에선 안 된다구요.

낯선 시골에서 받은 생일상 [나의 농활 이야기 ①  - 미역국 한 그릇이 바꾼 내 20대]
농활에는'수입산'이 없었다. [나의 농활 이야기 ② - 커피도 라면도 농활에선 안 된다구요.]


선배들에게 물려받은 형식을 고집하다 농활을 말아먹고 말았다.


  농활은 어쨌든 운동권 색채가 가장 짙게 남은 학생운동의 유산이었다. 단위마다 수준은 천차만별이었겠지만 내용이나 본질보다도 형식이 더 강하게 남아 이어지는 경우도 흔했다. 과거 문화에 대한 형식적인 답습과 관성이 컸던 우리 과, 우리 단과대가 그랬다. 그러다 보니 선배 운동권들의 문화를 곳곳에서 발견할 수 있었는데 그중 하나가 먹을거리와 관련된 것들이었다.


  우리는 농활에 내려가면 교양 시간을 만들어 농활 기조에 관한 내용에 대해 짧게라도 학습하고 토론하는 시간을 가지려고 노력했다. 당시엔 "TPP 반대", "식량주권 사수", "쌀 수입 반대"같은 구호들이 주를 이뤘다. 거기에 학생 기조라고 해서 학내 현안이나 대학생 문제(이를테면 기숙사 신축이라던가, 등록금이라던가 학내 의제를 많이 채택했었다.) 같은 것도 같이 준비해서 토론했다. 어쨌든 농활을 추진하는 중앙도, 또 단과대도 아무 내용도 방향성도 없이 농활을 추진할 수는 없다. 그 시간과 노력을 들여 그런 사업을 추진할 이유가 없기 때문에. 하지만 학생회 활동가가 없는 단위 학생회에서도 교양과 학습이 잘 뿌리내릴 수 있게 하기 위해서는 많은 고민과 설득이 필요했다. 어쨌든 학우들도 바보는 아니니 이게 운동권 사업이라는 건 당연히 다들 알았고, 그럼에도 동의하고 농활로 이야기하려는 방향성과 가치에 최소한의 동의를 이루는 과정이 꼭 필요했다.


  무엇보다도 개방된 열린 사업이니, 반운동권 정서가 강한 재학생들이 오는 걸 막을 순 없다. 오는 사람을 가려 받을 순 없었다는 뜻이다. 당연히 여러 가지 반론이나 불만이 현장에서 제기되곤 했다. "너무 정치적인 것 아니냐.", "농활에 와서 왜 이런 걸 해야 하냐." 등등. 그러니 농활 사업 주체들은 실력적으로 어느 정도 준비되어있어야 했고, 현장에서 나오는 다양한 불만들을 능히 넘길 수 있어야 했다. 때문에 선배 활동가들은 자기 단위가 아니라 주변 단위로 지원사격을 많이 갔다. 내가 2학년 우리 과 농활주체일 때 당시 단과대 학생회장과 총학생회장이 우리 과로 농활을 왔고, 나는 3학년 이후 갔던 농활에서 적어도 30% 이상의 기간은 우리 단과대의 다른 과에 지원을 갔다. (아주 정확하게 맞는 상황은 아니지만, 이렇게 상위 단위 간부가 아래 단위로 내려가는 걸 운동권 말로 하방이라고 했다.)




  2학년 때는 정말 (학과) 선배들한테 배운 대로 투철하게 원칙을 지키며 농활을 준비했다. 당시엔 우리가 흔히 수입해 들여온 것으로 아는 먹을거리는 먹지 않았다. 주로 라면(수입산 밀가루)이나 커피 같은 것들. 여러 정치적 의미와 메시지를 품은 원칙이었지만, 농활기간 만이라도 우리 농산물로 구성된 식단을 지켜보자는 취지이기도 했다. 나는 지금도 이 취지 자체는 나쁘지 않았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당시 우리 과는 원칙에 지나치게 경도된 나머지 농활 오는 학우들과 생각의 괴리는 점점 커져만 갔다. 농활에서는 커피도, 라면도, 콜라도 일절 금지였다.


  여러 가지 규율 중에는 휴대폰 사용 제한이라던가, 비속어/외국어 남용 금지 같은 것들도 있었다. 본디 취지만 놓고 보면 타당하고 좋은 것들도 많았다. 하지만 납득하기 어려운 것들도 있는 데다, 납득하지 못하는 새내기들을 선배 권력을 동원해 강제하니 불만과 문제가 곳곳에서 터져 나왔다. 심지어는 벽에 등을 기대지 못하는 원칙 같은 것도 있었다. 입대하고 보니 군대 훈련소에서 이걸 시키더라. 그래서 그때 기억이 떠올라 뜨악했다. 하지만 당시엔 기껏 2학년이었던 난 문제의식을 갖고, 고민을 품고, 판단하고 조치할 재량도 권능도 생각의 폭 조차도 없었다.


  나는 정말 원칙대로, 정말 배운 대로 농활을 철저하게 진행했다. 조금만 퍼져있고, 잠깐 벽에 등만 기대고 앉아도 새내기들을 다그쳤다. 휴대폰은 개인 시간 외에 통제,  평가회의는 무조건 형식을 철저히 지켜 족히 두 시간은 넘겼다. 우리 과 농활을 도와주러 온 10학번 총학생회장 형은(이미 운동권이었고, 당신 새내기 시절 농활까지도 겪어봤었지만) 우리 과 농활에 질려 고개를 저었고, 새내기들은 결국 여름농활 때 모조리 도망쳐 농활을 가지 못할 지경에 이르고 말았다. 저학년 학생회 간부였던 내가 겪은 최대의 실패는 바로 그 농활이었다.




변하려 노력했지만… 후배들은 '고학번 운동권 선배'인 내 눈치를 봤다.


  그 실패를 겪고, 이후에 단과대에서 농활 일을 보면서 점차 나는 내 나름대로 원칙을 수정해 나갔다.(다른 단위 활동가 선배들은 내가 진작 그랬어야 했다고 했다.) 결국 새내기들의 현황은 계속 변화는데, 아무 의미도 내용도 본질도 없이 형식만 고수하는 방식을 택해서 사업을 말아먹은 것이었다. 사실 당시 우리 단과대 기풍이 그랬고, 언제든 일어날 일이 하필 그 해 일어난 것이기도 했다. 사실 사업이나 기풍 자체의 혁신이 필요한 상황이었지만, 내 개인적으론 '유도리'를 교훈으로 얻었다.


  농활 사업이 '살아남기' 위해선 대수술이 필요했다. 내가 한 것도 있고 자연스럽게 없어진 것도 많지만, 농활에서 등 기대기 금지 같은 아이들이 납득치 못할 만한 것들은 빠르게 사라져 갔다. 하지만 어쨌든 선배인 데다가 단과대 간부가 된 내 눈치를 보는 이들은 여전히 많았다.


  이듬해였나, 단과대 간부로 있을 때였다. 옆 과가 농활 출발 전 필요한 물건들 장을 보고 학생회실로 나르고 있는 것을 우연히 마주쳤다. 그래서 얼른 가서 박스 하나를 뺏어 들고 손을 보태고 있는데, 왠지 그 과 농활사업 주체가 안절부절 못 하는 것이다. 이상한 낌새를 느낀 나는 내가 든 박스를 슬쩍 들춰 보았고, 그 안에서 비빔라면 봉지를 발견했다. 피식 웃음이 나왔지만 못 본 척했다. 어쨌든 원칙을 이야기해야 하는 입장이긴 하니, 나중에 애들 없는 데서 조용히 "아까 그거 봤는데, 이번엔 봐줄 테니 다음번엔 그러지 말자."라고 슬쩍 이야기하고 넘어갔다.


  대표자 하던 해에는 옆 학과 농활로 파견을 나갔다가, 오침(여름에는 농활을 가면 낮에는 낮잠을 잔다. 더워서 작업할 수 없기 때문에. 대신 새벽에 일찍 일어난다.) 시간에 잠을 포기하고 잠깐 빠져나가 우리 과 마을까지 걸어갔다. 내가 직접 걸어올 거라는 걸 예상치 못했던 우리 과 사람들은 화들짝 놀랐는데, 때마침 몰래 믹스커피를 타 먹고 있다가 나한테 현장을 들켜 버린 것이었다. 내가 더 무안해서 먹으라고 하고 못 본 척 해 버렸다. 나중엔 각자 커피 사서 가지고 와도 되는 수준까지 되긴 했지만 그땐 그랬다.


  이후에도 그런 일들은 계속되었다. 5학년 때는 새내기의 친척이 농활 마을 근처를 우연히 지나갈 일이 생겨 라면을 한 박스 사서 가지고 오셨다. 아이들한테 사다 주신 거니 이번만 감사한 마음으로 먹자고 했다. 나는 정말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했는데, 애들이 쭈뼛거리며 내 눈치를 보는 걸 느끼며 '도대체 나는 어떤 선배가 되어있는 거지?' 싶더라. 사실 당시 학교 활동가 선배들이랑도 자주 했던 말이지만, 지금 세상에 농활 가서 라면 안 먹는다고 대단한 관점과 입장이 생기것도 아닌데. 관성이라는 게 참 무서웠다 그땐.




  정말 우연히도 군생활을 내가 농활 다니던 마을에서 차로 10분 거리에 있는 부대에서 하게 되었다. 세상에 이런 우연이 다 있나 싶어 아직도 때때로 놀랍다. 부대 조금 높은 곳에서 울타리 밖을 내다보면 아는 지형이 보인다. 영외로 나와 훈련장으로 가는 길에는 농활 때 다니던 길, 작업하던 논밭을 지나게 된다. 참 신기한 우연이 아닐 수 없다. 그래서 부대에서 군 생활하는 게 먼 타향 생활하는 느낌이 아니라 오히려 고향으로 돌아온 것 같은 느낌을 받는다.


  그래서 군생활 내내 농활 생각이 자주 떠오르곤 한다. 이젠 가고 싶어도 갈 수 없는 농활이고, 코로나 이후로 농활은 완전히 중단되어 버렸다고도 한다. 이제 아마 내년쯤 되면 학교에는 농활을 아는 사람보다 모르는 사람이 더 많을 것이다. 이것 역시도 사라진 문화의 하나라는 생각에 때로 맘이 서글퍼질 때가 있다.


  운동을 그만두면서 추억이든 나쁜 기억이든 많은 것들을 뒤로하고 학교를 나오게 되었지만, 농활 다니던 시간들은 기억 한편에 별처럼 박혀 반짝이는 추억으로 남았다. 휴대폰도 거의 안 쓰던 그 시절 농활. 농활만 내려가면 아무 고민도 걱정도 없고 마음이 그저 편하고 좋았다. 해가 지면 회관 앞에서 말 그대로 쏟아질 것처럼 별이 내리는 밤하늘을 올려다보던 추억이 그립다. 커피 한잔, 라면 한 그릇이 없었지만 그게 좋아서 농활을 다녔다.


  지금에 와선 그런 생각이 든다. 그런 형식 같은 것들을 좀 더 빨리, 좀 더 많이 내려놨다면 더 좋았을 텐데. 그렇게 생긴 여유에 나도 더 많은 것들을 농활에서 담아올 수 있었을 테고, 더 많은 후배들 역시 무언가 작은 것 하나라도 더 담아올 수 있지 않았을까. 이제사 후회하면 뭐 하나 싶고, 그때처럼 농활 다니라고 하면 이젠 도저히 못 할 것 같이 돼버렸지만 그래도 그런 생각이 들 때가 있다.


사진 출처: http://news.unn.net/news/articleView.html?idxno=509405


2022. 01. 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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