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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기우 Jan 20. 2022

강의실서 돼지머리 놓고 고사 지낸 이야기

지금은 사라져 버려 아쉬운 대학 문화들에 관한 소고

  내 새내기 시절 우리 단과대, 그리고 우리 과는 수직적인 학과 문화로 인해 늘 여러 말썽과 문제를 일으켰다. 하지만 꼭 나쁜 문화만 있었던 건 아니다. 입학했을 때만 해도 이미 학생사회의 기존 문화는 빠르게 해체되고 있었다. 하지만 공동체 문화로 대표되는 기존 문화가 잘 남아있었던 우리 단위는 특유의 개성과 결속으로 그 색체를 뚜렷하게 유지하고 있었다. 공동체 문화라는 게 지금 대학생들에겐 잘 맞지 않는 정서인 측면도 있고, 꼭 좋거나 옳다고 말하기도 어렵다고 (운동을 그만둔 지금은) 생각한다. 하지만 학생사회에서 공동체를 일구고 운동을 하던 우리에게 공동체 문화가 잘 남아있느냐 하는 건 매우 중요한 문제였다. 다른 단과대 선배들은 이런 우리 단과대의 양면성을 두고, "혁신만 잘한다면 잠재력이 큰 단위"로 평가하곤 했었다.


  내용적 측면에서 운동적이진 않더라도, 공동체 문화가 여전히 건재하니 형식적으로 전해 내려오던 옛 학생사회 문화들과 색채가 행사에 많이 남아있기도 했다. 농활 역시 그런 대표적인 사업이었지만, 오늘은 '돼지머리' 이야기를 해 볼까 해서 옛 기억 한 가닥을 또 끄집어냈다.




  학과 사업이든 단과대 사업이든 3월이 중요했다. '새맞이 사업'이라고 이르기도 했는데, 어쨌든 이 한철 열심히 땡겨(?)서 새내기들을 조직해야 했다. '조직한다'는 게 여러 의미가 있겠지만, 운동적 방향성이 없는 학과 학생회 차원에서는 학과 공동체 안으로 후배들이 편입되게 만드는 과정이었다. 쉽게 말하자면 소위 '과생활'을 하게 만드는 것이 중요한 과제였던 것이다. 운동적 관점을 가지고 학생회 활동을 하던 활동가들 입장에서도 이런 대중 기구는 학우들을 만나는 공간이라는 점에서 매우 중요했다. 동시에 활동의 기반이자 터전이었으며, 학우들이 의식화하고 성장하는 공간으로도 보았다. 그래서 새터를 포함해 3월 한 달의 준비는 그 해 사업의 성패를 가르는 중요한 과업이었다.


  어쨌든 당시 우리 과는 3월 내내 술을 먹었다. 결론이 좀 황당할 수 있는데, 거의 10년이 다 되어가는 그 시절 학과 사업의 방법론이 그랬고, 유독 우리 과가 심했다. 사업과 행사들을 어찌어찌 구색만 맞춰 한 달 내내 매일매일 배치했고, 그게 끝나면 뒤풀이를 하는 방식으로 3월을 굴렸다. 새터 갔다가 술에 제대로 데었던 나는 "설마 입학을 하고 학기가 시작해도 이렇게 술을 먹이겠어?"라고 생각했다가 좌절하고 말았다.


  하여간 그 많고 많던 3월 사업 중 유독 기억에 남는 행사가 이름하야 '신복편전'이었다. 이게 무슨 사업이냐면, 그야말로 올해 학교 다닐 모든 이들이 모여 올 한 해 학과 잘 되자고 서로 개강 축하하는 그런 행사였다. 그래서 이름이 신복편전이었다. 신입생, 복학생, 편입생, 전과(전입)생.


  행사는 강의실 하나에 모여 앉아서 새내기들의 문선(문화선전이라고, 대충 설명하면 집회판 같은 곳에서 하는 율동 같은 게 있다. 궁금하면 유튜브에 검색만 해도 영상이 줄줄이 나온다.) 공연으로 막을 열었고, 무려 돼지머리를 놓고 고사를 지냈다. 행사 준비를 위해 우리는 공강 시간 빈 강의실에 모여, 한 학번 위 선배가 스마트폰으로 직접 찍은 문선 영상을 보며 열심히 연습했다. 그땐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왜 그렇게 열심이었는지. 지금 생각해도 신기하다. 하여튼 새내기들이란.


  행사일이 되자 학과에서 '큰 어른'격인 고학번 선배(새내기였던 14년도엔 09학번 남자 선배와 10학번 여자 선배가 했다.)가 축문을 써 왔다. "중랑천의 용왕님, 행당산의 산신님 어쩌고~"로 시작하던 그 축문에는 익살스럽고 재치스러운 문구로 한해 학과의 안녕과 평온을 기원하는 내용이 담겨있었다. 선배들은 문구 하나씩 읽을 때마다 자연스럽게 추임새까지 넣었다. 그러곤 학번별로 절도 하고, 고학번들은 돼지머리에 지폐도 말아 꽂았다. 그러고는 (지금보면 그야말로 부조리가 확실한 짓이다.) 부정을 쫓네 어쩌고 하며 막걸리를 뿌렸다. 그러고는 강의실에서 축문을 태웠고, 편육과 막걸리를 나누어 먹었다.


  그때 난생처음 본 돼지머리의 충격이 아직도 잊히질 않는다. 새내기 때도 놀랐는데, 이듬에 학과 집행부가 돼서 그걸 정리하는 건 더 고역이었다. 일단 선배들이 꽂아놓은 지폐뒤풀이 비용에 보태기 위해 수거해야 했고, 더 큰 문제는 행사가 끝난 뒤 그 돼지머리를 처리하는 것이었다. 현장에 있던 예닐곱 명의 내 동기들 모두 그 돼지머리를 옮기지 못해(생각보다 엄청 무섭고 징그럽더라. 무서워서 뒤집질 못했다.) 쩔쩔맸고, 비닐에 어떻게든 싸서 정말 말 그대로 '어떻게든' 처리했던 걸로 기억한다.


  고사 지내는 건 종교적인 문제도 있고, 문선 자체도 운동권 색채가 강한 것이니 요새 새내기들은 아마 거부감이 클 테다. 그래서 이젠 이런 행사는 하려고 해도 당연히 못 할 텐데, 그땐 새내기들의 의사와는 무관하게 그런 걸 그냥 했다. 엄청 옛날 얘기 같지만 10년도 안 된 이야기이다. 이듬해까지도 하다가 2016년인가부터 우리 과에서 이 행사는 사라졌다.

 



  때때로 예전에 했던 그런 작은 행사들이 문득문득 떠오를 때가 있다. 어쨌든 세상은 계속 변하는데, 과거의 유산을 붙잡고 고수해오던 우리 학과는 그로 인해 내부 잡음이 끊이질 않았다. 그래서 결국엔 자연스럽게 이런 사업들이 하나 둘 사라지기 시작했다. 동시에 학과 문화도 크게 달라지기 시작했으니 이제는 그야말로 옛날이야기가 되었다.


  꼰대 회상 같은 이야기일 수는 있겠지만, 그래도 문득문득 그때 그 시절 나름의 낭만과 추억이 그리울 때가 있다. 그때는 내 마음도 걱정이 없어서 더 그랬겠지만, 선배들 하는 행사에 따라다니는 게 마냥 즐겁고 재미있었다. 입학 이전에는 겪어보지도 못한 공동체 문화를 내 또래의 대학생들이 만들고 일궈나가는 것도 인상적이었던 것 같다. 그래서였는지 서울에 혈혈단신으로 상경한 내 스무 살 학교생활이 별로 외롭지는 않았다.


  그래서 아쉬울 때가 있다. 학생사회에 이어져오던 여러 문화들이, 구성원들이 공감하고 이해할 수 있는 방향으로 혁신되어서 지속되었으면 좋았을 텐데. 공동체의 필요성 자체가 점점 부정되는 사회에서, 그냥 해체되는 방식으로 공동체 문화 자체가 사라져 버리는 요사이의 대학가 모습이 안타깝다. 실상을 열어보면 폭력적이고 권위적인 '가짜 공동체의 신화'만 횡했을 뿐, 참된 공동체 문화를 재건하려는 시도가 부재했기 때문은 아니었을까. 그 안에서 꽃 피울 수 있는 작지만 값진 예쁜 문화도 참 많은데.


  예전에는 학교 풍물패 연합회가 철마다 학교 안팎에서 학우들이 소원 쓴 종이를 태우며 굿을 지냈다. 그러고풍물을 치며 학교 앞 거리를 돌았고, 가게 주인들 음식을 내 왔다. 분기마다 한 권씩 나오던 교지를 읽는 게 소소한 재미였던 때도 있었다. 옆 단과대에서는 신학기에 학과 대항 율동제를 열었다. 또 다른 단과대는 몇천 명이 가는 대형 새터에서 학과 대항 응원전을 했고, 새내기들은 입학하자마자 그 광경을 보곤 학과 '뽕'에 취해 서울로 돌아왔다. 우리 과는 3월 말 즈음에 소풍 소모임을 열어 광장시장을 도는 봄 기행을 했었다. 추적이는 봄 비를 맞으며 선배들과 조를 짜 광장시장을 휘젓고 다녔다. 마약김밥도 먹고 전집에 육회집까지 돌고 나서는, 마지막 미리 예약해 둔 매운탕 집에서 조들이 모여 함께 뒤풀이를 하며 자리를 마무리했다. 대학생이라고 소개하기에도 민망한 나이가 되어 버렸지만, 점점 사라져가는 대학문화들이 때로 아쉽다. 코로나 때문에 모든 것이 멈춘 대학가는 더더욱 아쉽다.


2022.01.19.


사진 출처: https://namu.wiki/jump/DUTLXhl2PnEcikiduWo4jZgus%2Bm1JdTbaA52cUYdYti9R%2Fk5Br7dTrfBBDgtLVaPddZjqftB6x6vSyFJUp%2B3J%2FPqDgQAnGho7TvPkbHBZacdMeC7xLp3Ohn1BRLLOEovjzmogHpwmhPD%2F2%2F0T9jmDOZqxNQfd8TKzHKMJ7RAKxvNAibSszxxqXpuI5rM6PA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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