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항산무항심無恒産無恒心
새로운 회사에 다닌 지 벌써 9개월째에 접어들었다. 그동안 출판 경력자 재취업 지원 사업 덕분에 돈이 없어서 못 보던 책도 많이 사 봤다. 대충 따져 봐도 모두 합해 백만 원어치는 되는 것 같다. 기억에 남는 책이라면 <요츠바랑> <백성귀족> <본격 한중일 세계사> <고고학의 역사> <유럽 맥주 여행> <한국인은 왜 이렇게 먹을까?> 정도이다. 만화책이 좀 많긴 한데, 내용은 이미 만화카페에서 봐서 모두 알고 있었다. 다만 소장하지 못한 아쉬움과 작가에게 인세가 제대로 돌아가지 못해 미안한 마음이 있었는데 이제 그 부담을 모두 덜었다. 예전보다 덜 부끄럽다. 잘 됐다.
이전까지 나의 삶은 황무지 그 자체였다. 어떤 목적을 갖고 살기보다 그냥 하루하루를 버텨 내기에 급급했다. 살기 위해 일을 했고 굶지 않는 게 목표였다. 도무지 나아지지 않는 현실에 매우 분노했고, 현실을 조금 바꿔 보고 싶어 찾은 곳에서도 뒤통수를 쎄게 맞은 뒤로 나의 마음은 공허 그 자체였다. 늘 그랬다. 이것이 영원할 거라고 생각했다.
그래도 우리 슈카 형의 말처럼 솟아날 구멍은 있는지 어떻게 새로운 곳에 자리 잡았다. 그래도 처음에는 늘 그랬듯이 의심했다. '왜 날 뽑았지?' 20년 동안 몸에 밴 습관을 하루아침에 내려놓기란 쉽지 않다. 혹여 다른 사람과 헷갈린 건 아닌지(정말로!), 아니면 지원자가 없었는지(이것도 진짜로!!) 궁금했다. 그래도 최선을 다해서, 정말 열과 성을 다하는 것을 넘어 목숨 걸고 쓴 이력서 덕분에 뽑혔다는 답변을 듣고 그제야 조금 안심했다. 아, 나의 판단이 틀리지 않았구나. 정말 아주 오랜만에 나의 예상이 맞았다. 기쁘다.
마음도 많이 풍요로워졌다. 조금씩 대상을 의심하는 버릇이 줄고 있다. 물론 여기서 말하는 의심이란 '원고에서 틀린 점이나 사실과 다른 점은 없을까'의 의심이 아니라, '저 사람이 사실은 나에게 사기 치려고 저러는 건 아닐까'의 의심이다. 아마도 이전에 비해 생활이 나아지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배고프고 고달픈데 흔들리지 않는 삶이라는 게 가능하겠나. 그게 가능하다고 말하는 사람은 극히 드문 확률로 역사에 길이 남을 만한 인격을 갖춘 위인이거나, 거진 대부분 사기꾼이다.(전자에 해당하는 사람은 한 번도 만나 보지 못했지만 후자에 해당하는 사람은 정말 많이 만났다. 이건 내 오랜 경험에 근거한다. 한두 번 당한 게 아니라고!) 청백리라던 김능환 대법관도 대법관과 중앙선거관리위원장 자리에서 물러난 뒤 편의점과 야채가게를 하다가 대형 로펌에 들어간 거 보면 나 같은 소시민에게 곤조 같은 게 있을 리 만무하다. 경제적으로 생활이 안정되지 않으면 바른 마음을 가질 수 없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보험도 하나 가입했다. 가족력 때문에 암 관련 보험은 이미 가입해 두었으나 뇌혈관 질환은 상대적으로 조금 등한시해 왔다. 나이가 있으니 대비를 해야 할 것 같았고 오늘 하나 가입했다. 8만 원이 빠져나갔지만(8만 원이면 맥켈란 한 병인데) 뭔가 안심이 된다. 뿌듯하다.
회사에게 받았으니, 나도 회사에게 돌려주고 싶다. 그러면 또 회사가 나 같은 사람을 도와줄 거고, 그 사람은 또 회사를 돕는 선순환이 이어지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