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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B Sep 24. 2023

집을 구한다

한남3구역 동갑내기 빌라에 사는 어느 셀프 인테리어 중독자의 고백

이주명령이 떨어지고 마음이 바빠진 나는 본격적으로 집을 알아보러 다니기 시작했다. 기한은 내년 5월까지로 아직 여유가 있었지만 그때 가서 허겁지겁 집을 구하다 보면 맘에 드는 집을 찾기가 어려울 테니까. 그리고 겨울이 오기 전에 이 집에서 도망쳐야 해.

조건은 전세대출이 가능한 집일 것, 베란다나 테라스가 있을 것, 반려동물이 가능해야 하고, 창문으로 보이는 옆 건물이 너무 가깝지 않을 것, 뷰가 있으면 더 좋고, 그리고 내가 가끔 집에서 노래를 부를 것이기 때문에 방음이 잘 되는 곳이거나 되도록 꼭대기 층일 것, 동네는 번화가보다는 산책로가 가까운 한적한 곳이면 좋겠다. 창문이 너무 작아도 안돼. 언덕이 너무 가팔라도 힘든데. 

새 집에 대한 나의 욕망은 주제도 모르고 부풀어 올랐다. 밥 먹고, 일하고, 자는 시간을 제외하면 거의 대부분의 시간을 부동산 앱을 뒤지는 데 썼다. 아, 사실 일하면서도 몰래몰래 부동산 앱을 뒤져보고, 화장실에서 일보는 잠깐의 시간도 알뜰하게 사용했다. 집을 구하는 일은 번거롭지만 어느 정도 설레는 일이기도 하다. 그래서 나는 매일 우는 소리를 하면서도 집 보러 다니는 일을 은근히 즐기고 있었다. 

그러다가 발견한 홍제동의 한 빌라. 일단 동네가 마음에 들었다. 빌라 옆에는 작은 절이 있어 고즈넉한 느낌이 들었고, 앞에는 홍제천이 흐르고 뒤에는 인왕산이 버티고 있었다. 배산임수로구만.

그리고 집에 들어가자마자 나는 완전히 반했다. 노후 빌라답지 않게 완벽한 컨디션이었다. 어떤 이상한 집주인이 이 낡고 오래된 빌라를 사서 정말이지 완벽하게 인테리어를 한 것이다. 원목 루바로 모든 벽면이 둘러져있었고, 화이트톤 벽지에다가 주방에는 한샘 후드가 달려있었다. 비좁은 주방을 보완하기 위해 아일랜드 식탁이 맞춤으로 놓여있었고, 뒷면엔 세탁기를 놓을 수 있는 작은 베란다가 있었다. 그리고 거실 큰 창으로 보이는 홍제천의 뷰… 압권은 이 집이 복층이라는 것인데, 계단을 올라가니 아래층과 사이즈가 똑같은 탁 트인 공간이 나왔다. 여기서 빔 쏴서 영화 보면 죽이겠다. 목청껏 노래 불러도 아무 걱정 없겠는데. 완벽해. 절대 놓칠 수 없다. 서울에 이 가격에 이런 집은 건국 이래 없었고, 앞으로도 없을 거야. 

나는 당장 계약을 하겠다고 했고, 중개인은 내게 워워 하면서 일단 등기부를 줄 테니 대출이 되는지 알아보라고 했다. 나는 영혼까지 끌어모을 각오였기 때문에 등기부를 가지고 가능한 대출을 모조리 털어봤다. 내가 모아둔 돈, 전세대출, 아빠 도움 조금, 은행 신용대출 이렇게 저렇게 하면 어찌어찌 맞춰볼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리고 다음 날, 집주인과 계약 날짜를 정하고 알려주겠다던 중개인에게 오후까지 연락이 없었다. 아니야.. 아닐 거야. 나는 몰려오는 불안감을 쫓으며 일에는 전혀 집중을 못하고 연신 담배만 피우러 나갔다. 그리고 중개인에게 걸려온 전화. 아니, 집주인이 계속 약속을 미루더니 전세금을 올리겠다네요. 3천만 원이 올랐어요. 어떡하시겠어요. 

(뭘 어떡해요 아저씨) 아 그렇군요. 아쉽지만 어쩔 수가 없네요. 제가 그 가격까지는 대출이 안 나올 것 같아요. 아쉽게 됐네요. 혹시라도 좋은 집 나오면 연락 주세요.

친구들에게도, 동료들에게도 이 좋은 집을 계약하게 될 거라고 온 동네방네 떠들고 다녔는데. 내가 설레발을 너무 쳐서 그런 걸까. 그래서 부정이 탄 걸까. 밀려오는 상실감과 허탈함. 어제 그 집에서 자는 꿈을 꿨는데. 그 꿈에서 나는 이미 홍제동 주민이었는데. 지금 이게 꿈 아닐까. 아니었다. 좋은 집은 비싸다는 차가운 현실일 뿐이었다. 그래 이런 일에 일희일비하면 안 되지. 이제 시작이야. 기운 내자. 

아빠는 내가 계약을 하지 못하게 됐다고 하자 본인이 더 아쉬워했다. 아마 아빠는 자기가 더 도와주지 못해서 딸이 고생한다고 생각했을 거다. 그런 아빠를 잘 아는 나는 일부러 더 쾌활하게 말했다. 아빠, 서울에서 집 구하는 게 얼마나 힘든데. 이제 시작인데 벌써 지치면 안 되지. 나 아무렇지도 않아. 서울이 얼마나 넓은데 더 좋은 집이 있겠지. 걱정하지 마. 

그리고는 터덜터덜 사무실을 나와 오늘은 기똥차게 맛있는 걸 먹어야겠다고 생각했다. 뭘 먹어야 이 구겨진 마음이 펴질까. 간장새우다. 간장새우로 가자. 간장새우에 맥주까지 한잔하고 얼큰하게 취해서는 휘적휘적 집으로 돌아가는 길.

마로니에 공원을 지나가는데 글쎄 내가 뭘 들었게? “이메진 올 더 피쁠~”. 세상에, 누군가 끝내주는 목소리로 버스킹을 하고 있었다. 마로니에 버스킹이야 흔한 일이지만 이건 흔한 실력이 아니었다. 나뿐만 아니라 지나가는 모든 사람들의 발걸음을 붙잡는 목소리였다. 보통 실력이 아니야. 선곡까지 완벽해. 존 레넌의 Imagine이라니. 나는 집에 가는 것도 잊고 그 앞에 서서 버스킹이 끝날 때까지 노래를 들었다. 마지막 곡 Lost stars가 끝나고 잘 들었다고 인사나 할까 싶어 주섬주섬 악기를 정리하는 그에게 다가가는데 그제야 박스조각에 적힌 그의 이름이 보였다. 'Lee Chansol'. 이찬솔? 그 이찬솔? 슈퍼밴드 이찬솔? 그렇다. 그는 <슈퍼밴드 1>에 나온 보컬 이찬솔이었던 것이다. 어쩐지 목소리가 익숙하더라니! 나는 그 순간 내가 단군 이래 다시없을 완벽한 전셋집을 놓친 운도 없고, 돈도 없는 사람이라는 사실도 잊은 채 복권에 당첨된 기분이 되어서 그때도 너무 좋아했다고 오늘 너무 감사히 잘 들었다고 연신 고개를 숙였다. 

아니, 세상에 너무 좋은 밤이잖아. 화장실에 핸드폰을 두고 와서 후다닥 뛰어가는 중에도 전혀 짜증이 나지가 않았다. 

그리고 집에 돌아가는 길에 버스를 잘못 타서 나는 갑자기 아현동에 와있었다. 아현동에 내리니 눈앞에 다이소가 보여서 거기 들어가서 예전부터 사려고 미뤄뒀던 핸드폰 액정 필름을 샀다. 이야 오늘 운이 너무 좋네. 어떻게 눈앞에 다이소가 딱 보이고, 나는 핸드폰 액정 필름이 필요했다는 걸 안 까먹고 기특하다 기특해. 그리고 아이스크림을 하나 먹고는 다시 집에 가는 버스를 기다렸다. 

아니 꽤나 괜찮은 밤이잖아. 

녹음해 둔 버스킹 공연을 들으며 나는 내가 재개발 철거민이라는 사실도 새까맣게 잊어버리고 세상에서 제일 행복한 사람이 되어서 집에 돌아가는 버스에 올라탔다. 

내일은 또다시 부동산 매물 지옥이겠지만 그러면 어때.

아직은 돌아갈 집이 있고, 그곳에 가면 씻고 누워서 잘 수 있어. 누가 뭐래도 나는 오늘 행복한 사람. 덤벼라 재개발, 오라 전세대출. 나에겐 낭만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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