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지] 촛대 - 서서방댁 며느리

- 박경리 작가님의 <토지> 속 인물들. 토지 11권

by 청록펜

나룻배에서 내린 서서방의 며느리가 보따리를 이고 둑길에서 넘어온다.

옥색 항라 치마, 반회장 자줏빛 고름이 바람에 나부낀다. 친정은 먼 길인데 나룻배 속에서 갈아 신었던지 미투리 속의 버선발은 하얗게 깨끗하다.

- 1부. 2편. 10장. 멀고 먼 황천길 中



<토지> 2권을 읽을 때 이 장면에서 서서방의 며느리에 대한 묘사는 이례적으로 보였다. 누가 무슨 색 어떤 옷을 입었는지에 대한 묘사는 서희나 봉순이, 윤씨부인, 월선이 말고는 읽은 적이 거의 없었는데, 그동안 잘 등장하지도 않았던 서서방의 며느리가 친정에 다녀온 모습이 이렇게 상세히 묘사되어 있어서 의외라는 생각이 들었었다. 복색도 고울뿐더러, 깨끗하고 하얀 버선발에 대한 묘사를 보며, 시댁을 향하는 그녀의 태도를 짐작할 수 있었기에, 예의 바르고 고운 심성의 사람이겠구나... 생각했었다. 그런데 지금에 와서 그 장면을 다시 찾아보니, 그 장의 이름이 바로 <멀고 먼 황천길>이다. (물론 여기서는 간난할매의 죽음이 주된 이야기로 다뤄지지만) 작가님은 이 고운 여인에게 닥쳐 올 불행을 예견하시며 이 장을 서서방댁 며느리에 대한 묘사로 시작하셨던 걸까?!



서서방댁의 며느리, 복동네는 안쓰러운 인생을 살았다. 서서방의 아들이 언제 세상을 떠났는지는 알 수 없으나, 시집온 며느리가 아직 아기를 갖기도 전, 너무 이른 나이였던 것만은 분명하다. 을묘년 역병이 든 후에 찾아온 극심한 기근 때문에 먹을 것이 떨어진 서서방댁에서 며느리가 친정으로 향한다. 먹을 것을 챙겨 올 심산이었다. 그런데 친정에 도착한 후에 앓아눕는 바람에 시일이 지체되었고, 몸을 추스르는 대로 서둘러 돌아와 보니, 시부모님들은 모두 쓰러져 있었다. 시어머니는 굶주림 때문에 이미 세상을 떠났고, 시아버지만 겨우 살아남았는데. 지극하게 아끼던 자신의 아내가 죽은 탓을 모두 며느리에게 돌리고, 실성한 채 온 동네를 돌며 동냥을 다닌다. 며느리가 아무리 정성껏 봉양해 드려도 소용이 없다. 공경하는 어른에게 최선을 다하지만 원망의 화살은 항상 자기에게 돌아오는 삶. 그런 기막힌 상황이 아주 오랜 시간 계속되었다.


시아버지께서 돌아가신 이후 완전히 홀로 남아 삼년상을 치르고, 양자를 들여 그 이후 복동네라고 불리게 되었다. 두만네, 막딸네, 임이네, 야무네.... 다들 당연하게 아이들의 이름을 따서 호칭을 하는 상황에서, 그저 “서서방댁 며느리”로 불리웠을 그녀의 세월은 얼마나 길고 힘들었을까. 이제야 남들처럼 “복동네“가 되어, 홀로 아이를 키워서 장가까지 들여놓았는데, 이제는 며느리가 그녀를 무시한다. 자기 서방의 친어머니가 아니라는 이유 때문이었다. 게다가 그녀의 억울한 죽음에는 며느리가 어느 정도 연관되어 있다. 삼수가 두리를 유린했다는 이야기가 며느리의 친언니에게서 나왔는데, 그 말을 며느리가 옮겼고, 그 사실을 알게 된 두리의 아비 봉기가 찾아와 복동네의 며느리를 닦달하자, 그 며느리가 자기 언니가 말했다는 사실을 쏙 빼고, 시어머니에게서 그 말을 들었다고 거짓말했던 것이다. 봉기는 복동네에게 더 큰 모욕을 주려고 이미 죽은 삼수와 복동네의 스캔들을 만들어서 소문을 냈고, 세상 억울한 복동네였건만, 복동이는 실제로 그런 일이 있었던 게 아니냐며 양어머니를 의심하는 태도를 취했던 것이다.


억울함을 견디다 못해 양잿물을 마시고 세상을 떠난 복동네. 이런 기막힌 상황을 알게 된 마당쇠댁과 야무네는 복동네를 이렇게 보낼 수는 없다며, 복동네의 억울함을 풀어주기 위해 발 벗고 나선다. 먼저 지혜로운 산청댁을 찾아가 의논을 하고, 산청댁의 생각대로 용이와 석이에게 도움을 청한다. 석이의 묘안으로 봉기의 딸 두리가 피해를 입지 않고, 복동네의 억울함은 풀 수 있는 방안을 찾게 되었는데, 과연 석이의 생각대로 잘 진행이 될까?



평생 다른 이들에게 해를 끼치지 않고 자기에게 주어진 삶을 열심히 살다 간 복동네. 짝을 잃은 설움이야 그녀가 더 했을 텐데, 시어머니를 잃은 시아버지의 역정을 있는 대로 다 받아주면서도 끝까지 공경하며 모셨고, 양자를 들여 그제서야 복동네라는 새로운 호칭을 얻어 아이에게도 정성을 다했지만, 돌아온 것은 장성한 자식과 며느리의 무시와 의심이 전부였던 그녀의 삶. 남들에게 다 있는 서방을 일찍 잃고, 남들이 다 가진 아이도 얻지 못했지만, 자신의 자리를 지키며 한평생 최선을 다했던 그녀가. 말도 안 되는 오명을 뒤집어쓴 채 수많은 이들의 입방아에 올라야 했던 그 상황을 생각하면 참으로 기가 막힌다.

같은 과부신세였던 마당쇠댁과 야무네는 그녀의 억울함을 진심으로 애통해하며, 그녀의 마지막이라도 밝히 비춰주려 작은 힘이나마 촛대를 들어 올린다. 그리고 그 일에 산청댁과 용이, 석이까지 한 마음으로 참여한다. 한 여인의 억울한 죽음을 위해서, 그들이 한 마음으로 뭉칠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일까? 바로 그녀가 살아 낸, 가시밭길조차 꾹 참고 성실하게 걸어갔던, 그녀의 삶에 있었을 것이다.

당신의 인생이, 당신이 이 세상에서 보냈던 지난한 하루하루가 결코 헛되지 않았다고. 당신의 억울함을 아무도 모르는 것 같았겠지만, 그래서 이 세상에 홀로 남겨진 것만 같았겠지만. 힘들게 걸어가는 당신을 지켜보며 진심으로 아끼고 사랑하는 이들이 있었다고... 억울함과 외로움에 지쳐 먼저 떠나버린 복동네에게 꼭 알려주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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