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지] 능소화 피고 지다 - 서희

- 박경리 작가님의 <토지> 속 인물들. 토지 10권.

by 청록펜

서희의 굳어졌던 얼굴이 흔들린다.

“만일 그랬다면.”

“만일은 무슨 놈의 만일! 피를 철철 흘리는 아이를 병원에 업어다 놓고 치가 떨려서 쫓아왔는데 만일이라니!”

“그러면 우리 환국이가 왜 그런 짓을 했을까요?”


- 2부. 3편. 5장. 종놈의 아들 中



저녁시간이었다. 서희는 윤국과 함께 저녁상 앞에 앉았다. 환국이가 아직 오지 않아 세양이를 보냈더니, 환국은 배가 아파 저녁을 먹지 않겠다는 뜻을 전해왔다. 평소와는 다른 환국의 태도에 의아함을 느꼈을 때, 대문 밖에서 소란스러운 소리가 들린다. 기세등등하게 소란을 피우며 등장하는 여자는 순철의 엄마, 도갓집의 안주인이다. 서희는 잠시 생각하고 윤국에게 저녁을 좀 늦게 먹으라고 한다, 배가 고프면 사랑으로 가져다달라고 부탁하라는 말과 함께. 윤국은 그 말을 알아듣고, 형에게 가 있겠다고 한다. 서희는 안자에게 두 형제를 돌봐줄 것을 부탁하고, 유모에게 순철엄마를 응접실로 안내하라고 한 후, 그곳에 먼저 가서 기다리고 있는다.


노기등등한 순철엄마가 응접실에 도착하자 본 것은 일어선 채로 자신을 맞이하는 서희의 모습이다. 유모까지 물린 후 둘만의 공간에서 서희는 자리를 권하며 무슨 일인지 묻지만 순철엄마는 들은 척도 않고 대번에 “몰라서 묻소!”며 소리부터 지른다. 전후사정을 알 수 없는 서희로서는 봉변을 당한 것이었고, 대개 이런 일에는 자신이 당한 것보다 더하게 되갚아주는 서희지만, 아들에 관한 일이기에 참을성 있게 공손한 태도를 유지한다.

순철엄마는 환국이가 돌을 들고 순철의 얼굴을 쳤다면서, 우리도 똑같이 얼굴을 짓이겨 놓을 테니 환국이를 내놓으라고 악을 쓴다. 나비 한 마리도 못 잡는 환국이의 고운 성정을 누구보다도 잘 아는 서희이기에. 순철엄마의 그 말을 선뜻 받아들일 수가 없다. 그러나 서희는 이때 “우리 아이는 그럴 아이가 아닙니다,”라며 아들에 대한 자신의 믿음을 단정적으로 말하는 어리석음을 범하지 않는다. 서희가 만약에 이렇게 말했다면 순철엄마의 분노는 활화산처럼 폭발했을 것이고, 그런 상황은 환국에게 결코 좋은 방향으로 흘러가지 않았을 것이다.

서희는 이렇게 말한다. “만일 그랬다면.... 우리 환국이가 왜 그런 짓을 했을까요.” 상대방의 말을 단정적으로 끊어내지 않고, 환국에 대한 자신의 신뢰를 지키면서도, 환국에게 피해를 당했다고 길길이 날뛰는 상대방의 주장에 설자리를 남겨주는 말. 평화로운 저녁시간에 뜬금없이 찾아와 분노의 말을 쏟아내는 불청객에게 해 줄 수 있는 “파탄의 언어”들이 수도 없이 넘쳐나는 흙탕물 같은 상황 속에서... 마치 외줄을 타듯이 “상대방을 인정하면서도 아들에 대한 신뢰를 지키는 언어”를 정확하게 찾아낸 서희가 나는 참 놀랍다.


앞도 뒤도 없이 분노를 쏟아내는 순철엄마 앞에서 서희는 끝까지 그 모욕들을 참아낸다. 그 상황을 넘기기 위해 필요이상으로 비굴해지지도 않는다. 끝까지 우아하게, 자신을 지키면서도 상대방이 입은 상처를 돌아봐주는 말을 하고, 병원을 향해 앞장선다. 그 와중에도 유모를 살짝 불러 속상해있을 아들의 마음을 챙기고, 병원에서도 상황을 냉철하게 판단하고, 치료비를 보상하겠다고 한 다음, 순철에게 질문한다. 차근차근, 진실을 향해 한 발자국씩 들어가는 질문들을. 의외로 순철은 자신의 잘못을 은폐하거나 숨기지 않고 솔직하게 대답한다. 그 아이의 마지막 대답. “니 아부지는 종이라 했더니.” 그 말을 듣는 순간. 아마도 심장이 쿵 내려앉았을 서희는 강인하게 억제하며 깊은 물처럼 고요하게 그 말을 가라앉힌다. 순철이에게 분노하는 대신 차근히 알려준다. “그랬다면 환국이가 잘못한 것이 없구나. 네 잘못이야. 왜냐하면 환국아버님은 종이 아니었거든. 그리고 나라를 위해 몸 바친 분이었단다.“ 일제치하에서 성공한 사업가로 살아가기 위해 친일파의 옷을 입고 있는 서희. 아들 환국을 위해 그 외피를 벗고 진짜 자신이 누구인가를 보여준 것은 그야말로 모든 것을 건 모성의 승리였다.

서희의 이런 모습은 여러모로 옛날의 윤씨부인을 떠올리게 한다. 그 옛날 용이의 기억 속에는(2부. 제2편. 6장. 정 떼고 가려고. 中) 최참판댁의 담장에 흐드러지게 피어있던 능소화가 묘사된다. 능소화의 꽃말은 명예, 영광, 그리움, 기다림이라고 한다. 일평생 가문의 기둥으로 살아가면서 엄정하고 명예롭게 살기 위해서 노력했던 여인. 대지주로서, 수많은 이들의 이해관계와 알력이 가득했던 상황 속에서 지혜롭게 자신만의 길을 찾아 걸어가서, 최참판댁의 위상과 영광을 이뤄냈던 윤씨부인의 능소화는 이미 시간의 너머로 져버렸지만, 그녀가 져버린 그 자리에서 그녀를 꼭 닮은 새로운 능소화 서희가 피어나 담담하고 든든하게 최참판댁을 채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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