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박경리 작가님의 <토지> 속 인물들. 토지 10권.
이맘때쯤이면 그는 항상 물을 길러 나오는 것이다. 부리나케 홍이는 집을 나선다. 우물은 다리를 건너 이켠에 있었으니까 빨리 가서 다릿목에 서 있으면 장이를 만날 수 있다.
- 9권. 3부 5장. 별빛이 쏟아지는데.
홍이의 혼담은 우물가에서 건네졌다. 김훈장의 딸 점아기가 복동네에게 운을 띄웠고, 복동네는 야무네를 우물가까지 쫓아와서 그 말을 전했다. 야무네는 또출네에게 전달했고, 또출네의 서방 영팔이가 용이에게 조심스레 그 말을 건넸다. 이토록 조심스레 혼담이 건너간 이유는 홍이의 결혼 상대가 무려 “양반” 김훈장의 외손녀 보연이었기 때문이다. 상사람 용이로서는 믿어지지 않는, 감읍할만한 제안이었다. 보연의 엄마 점아기가 홍이를 사윗감으로 점찍은 이유는 보연의 성미 때문이었고, 용이가 그 제안을 수락한 이유는 자기가 이 세상을 떠나고 나면 아무도 없을 홍이에게 든든한 처가라는. 사람의 울타리를 만들어주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점아기의 예상대로 보연은 훤칠한 홍이에게만은 제 성미를 다 드러내지 않고 조심하는 면모를 보였고, 지금까지는 다행히 홍이와 잘 맞는 거 같다. 아직 대화랄 것은 없지만... 보연이의 다소 되바라진 면모를 홍이는 밉게 보지 않았고(제법 예쁜 얼굴이었던 보연의 외모가 마음에 들었기 때문에 가능했겠지? 외모란 과연 무엇인가?! 강청댁이나 기성에미도 예뻤더라면... 사랑받으며 살았을까? ㅠ.ㅠ), 그들은 꿈결 같은 첫날밤을 보냈다. “끓어오르는 감정과는 달리 홍이는 보연을 거칠게 다루지 않았다.”라는 묘사를 읽으며 나는 그날밤. 인적 드문 풀숲에서 “마치 산적처럼, 피바다를 누비고 온 오랑캐의 병사처럼, 늙고 교활한 늑대처럼” 그렇게 홍이에게 유린당했던 장이가 떠올랐다.
홍이는 장이에게 진심이었을 것이다. 장이에게서 월선을 보았다고 했으니, 그냥 장난은 아니었을 것이다. 우물로 물을 길으러 가는 장이를 기다리며 다릿목에 서서 몇 번이고 몇 날이고 그녀를 지켜보며, 장이에 대한 소문에 귀를 기울이며 마음을 키워왔을 것이다. 장이를 겁탈했던 그날 밤도 돌이켜보면, “오골계 사건”으로 인해 임이네를 향한 증오가 극에 달해 장이에게 급발진을 일으킨 것이었다. 하지만, 장이는 그 사정을 모른다. 그가 한참 동안 자신을 마음에 품고 있었다는 사실도, 그날 밤, 자신을 만나기 전에 홍이가 임이네와 무슨 일이 있었는지도 전혀 알 길이 없다. 그가 말을 한 적이 없으니까. 그저 눈빛 몇 번 마주친 일로, 그저 잘 생긴 그 사람의 이야기나 한번 들어보고 싶어서 늦은 밤에 남몰래 나왔던 그녀는... 그렇게 무참하게 겁탈을 당하게 될 줄은 꿈에도 예상하지 못했을 것이다.
장이는 어머니가 돌아가신 후 집안일을 도맡아 해야만 했다. 그런 상황에서도 공부를 하고 싶어 야학에 다니다가 홍이를 보았다. 눈에 띄게 잘생긴 사내가 나를 바라보고, 우물에 물을 길으러 갈 때마다 보이더니, 어느 날 만나자고 한다. 그저 두근거리는 호기심을 가지고 그 자리에 왔다는 이유만으로, 갑자기 손목을 잡히고, 겁탈까지 당했다. 어찌해야 할 바를 모르겠는데... 그 사람은 자취를 감춰버리고, 그날 밤 일을 가족들에게 들켜서 경을 치고, 결국 일본으로까지 내쳐지게 되었다. 두고두고 의논하자고 해놓고, 내가 없으면 못 산다고 해놓고, 나를 내팽개쳐둔 채 한참만에 돌아온 그 사내는 “도망 가자!”가 아니라. “시집가기로 했다며? 시집갈 작정을 했으니 잘 살아라”라고 한다. 마치 제가 나에게 배신당한 사람인양. 도망가자고 하면 따라나서겠구먼, 이미 오래비 장개 비용으로 다 써버린 봉채를 어떡하냐고 걱정하는 양심 바른 그녀를 향해 오히려 오래비를 모욕하는 말까지 한다. 게다가 평생을 거짓으로 살아가게 될 거라고 악담을 퍼붓는다. 그게 다 누구 때문인데!
장이에게 악담을 했던 그다음 날. 홍이는 시장에 나가 장이에게 선물할 예쁜 당혜를 한 켤레를 샀다. 그 꽃신을 장이에게 전해주려고 “아무런 욕망도 목적도 없이, 절절하고 애틋한 마음”으로 밤이 깊어지기를 기다렸다. 그러나 그는 결국 그 당혜를 장이에게 전해주지 않고 강물에 던져 버렸다. 소용없다 싶었을 것이다. 어차피 떠나야 할 그녀에게 꽃신에 담은 진심을 전한들 무엇하랴 싶었을 것이다. 평생을 거짓으로 인생을 살아가기엔 그리움보다는 원망이 나으리라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그는 그렇게 자신의 첫사랑을 강물에 띄워 보내는 것으로 갈무리했다.
홍이에게는 그저 아련한 첫사랑의 추억으로 남았을 그 일이. 장이에게는 너무나 쓰라린 기억으로, 한 순간의 실수로 인해 인생의 물줄기를 바꿔버린 일로 돌아왔다는 게 너무 슬프다. (게다가 하필이면 일본으로 시집을 간다니... 재일교포의 삶을 그렸던 <파친코> 속의 주인공 선자의 삶이 떠올라 더욱 가슴이 아프다.) 장이의 입장에서 보면, 홍이와는 추억이랄 것도 없었다. 그 사람에 대한 믿음을 가질 겨를도 없었다. 사내란 모두 다 짐승이겠거니... 남성 전체에 대한 불신만이 남았을 그녀. 모든 것이 낯설기만 할 일본에서 그녀가 만나게 될 남편이 부디 좋은 사람이기를. 홍이 따위 훌훌 털어버리고, 장이가 마음 따뜻하고 좋은 남자와 함께 해로하기를 진심으로 바라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