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지] 달걀 네 개 - 야무네와 순구

- 박경리 작가님의 <토지> 속 인물들. 토지 10권.

by 청록펜

“방금 꺼내온 긴데 임자도 묵고 장모님도 잡수이소.”

사위는 바짓말 속에서 달걀을 네 개 꺼내어 방바닥에 놓는다. 달걀은 데굴데굴 굴러서 벽 쪽으로 가서 멎는다. 꾸부정. 허리를 굽혀 달걀을 주워다 푸건의 무릎에 놓은 사위는,


-10장 갯바람 솔바람 中



두만네의 말에 의하면, 야무네는 입은 좀 촉빨랐지만, 심덕이 좋은, 평사리의 또래 여인네들 중에서 가장 욕심이 없는 사람이다. 6권 8장 <출발>에서 하동을 찾은 관수와 석이를 나룻배에서 만나, 장성한 석이의 모습을 보고 옛 생각에 가슴이 아파 눈물짓고, 그냥 헤어지기 아쉬워하며 없는 형편임에도 끝내 떡을 사서, 가던 길을 되돌아와 석이의 손에 쥐어주었던 아낙이 바로 야무네였다. 야무네는 야무, 딱쇠, 푸건 세 아이를 두었다. 야무아배가 시름시름 앓다가 세상을 떠났고, 그 병을 고쳐보려 백방으로 노력했던 일들은 모두 고스란히 빚으로 남아, 가세가 기울었고, 형편은 나아질 길이 없다. 돈이 없어서 야무는 장가들기를 포기하고 일본으로 갔고, 딱쇠는 어려서부터 남우집살이를 했다.


대추나무집 노파의 중신으로 막내 푸건이는 혼사를 치를 때 그래도 혼물까지 받고 시집을 갔다. 섬에서는 뭍의 처녀와의 혼사를 즐기고, 뭍에서는 섬 혼사를 꺼리는 게 그 이유였다. 섬이지만 귀한 논이 열마지기나 있고, 밭농사에 고깃배까지... 시집 형편이 따뜻하니 그래도 따순 밥 먹고 살겠지 싶어 야무네는 하나뿐인 딸을 울며 시집보냈었다. 푸건이는 제가 받은 혼물을 내놓으며 오라비 장개보낼 때 보태라고 할 만큼 마음씨가 고운 아이였다. 시집가서도 친정 때문에 애간장을 녹였는지 제 아배처럼 시름시름 앓기 시작했는데, 아픈 푸건이가 어매 생각을 하며 운다는 소식을 전해 듣고도 야무네는 한 번 찾아가 보지를 못했다. 오리섬까지 여비를 마련하기도 빠듯한 살림에, 사돈댁에 빈 손으로 갈 수도 없는 노릇이니 차반을 마련할 시간이 필요했던 것이다.


험한 뱃길 때문에 심하게 멀미를 한 야무네. 가봐야 마음만 상할 거라고, 사돈 대하기 거북할 거라는 두리어매의 말이 자꾸만 생각나 야무네의 발걸음을 무겁게 한다. “아가, 푸건아.”하며 어서 달려가 귀한 딸을 안아보고 싶은 마음은, 사돈댁의 사립문 앞에서 딸 가진 죄인의 마음에 짓눌려 버렸다. 어렵게 준비해 온 차반 보따리를 방패 삼아 조심스레 “사돈.”하며 발을 들여놓아 보지만, 푸건이의 깡마른 시어머니는 냉랭함을 굳이 감추려 하지 않는다. 잔뜩 위축된 야무네를 반겨주는 것은 단 한 명. 사위 순구뿐이다.


안사돈의 가시 돋친 말들을 꾹꾹 삼키고 나서야 야무네는 푸건이를 만날 수 있었다. 푸건이는 헛간 겉은 뒷방에서 살고 있었다. 머리가 아프고 기운이 없어 밥을 도통 먹지 못한다는 푸건은 초췌하게 마른 얼굴을 하고 있다. 햇볕을 보지 못해 허연 피부는 종잇장처럼 하얗다. 사위는 장모에게 저녁을 잡수러 가자고 권한다. 그러나 그는 이미 염치 바른 장모가 거절할 것을 알고 있다. 그의 바지말속에서 달걀 네 개가 나온다. 방금 꺼내온 것이라는 걸 보니, 아마도 날달걀일 것이다. 계란을 삶거나 구워오면 더 좋았겠지만, 부엌을 장악하고 있는 어머니와 형수의 눈앞에서 그런 일을 할 수는 없다. 부엌에서 큰소리라도 나면 장모님이 더 곤란해지실테니까. 그렇지만 속도 불편한 장모님이 그저 굶는 것은 차마 볼 수가 없다. 그래서 그는 달걀을 네 개나 슬쩍 챙겨 왔다. ‘장모님, 훌륭한 음식은 아니지만 이거라도... 좀 드세요. 각시야 어머니 오셨으니 이거라도 먹어봐....’ 이런 마음 아니었을까?


순구의 그 마음. 드러내놓고 아끼지는 못해도, 내 사람을 따뜻하게 챙기는 그 마음 한 자락 덕분에 푸건이는 냉대로 가득한 그 세월을 견디며 살았다. 내세울 것 하나 없는 어려운 친정 형편 때문에 시집와서도 수도 없이 무시를 당했을 푸건이. 어렵게 사는 엄마와 오빠들이 눈에 밟혀, 그 눈칫밥이라도 저 혼자만 배부르게 밥을 먹는 것을 미안해했을 아이, 항상 부지런히 살았던 야무네의 딸이니만큼, 시집의 일원이 되려고 그래도 성실히 매일을 살아냈을 푸건이를 생각해 본다. 세월이 흘러도 도통 아이가 들어서지 않고, 몸까지 약해져서 시름시름 앓게 되어 온갖 눈총을 받았을 푸건이는 순구의 그 마음 한 자락이 없었다면 아마도 바스러져 버렸을 것이다.


강청댁이 그토록 원했지만 가질 수 없었던 마음, 함안댁이 평산에게서 단 한 번도 느껴보지 못했을 마음. 두만이가 기성에미에게 주었다면 온 마음으로 기뻐하고 평생을 감사했을 그 마음, 제 식구를 아끼고 따뜻하게 보듬는 그 마음이 순구의 달걀 네 개에 오롯이 담겨있다.

작가의 이전글[토지] 충실한 인생 - 두만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