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지] 충실한 인생 - 두만네

- 박경리 작가님의 <토지> 속 인물들. 토지 9권.

by 청록펜

두 모녀는 따스한 마루 끝에 나란히 걸터앉는다. 환갑을 눈앞에 둔 반백의 어미와 사십 전이지만 황혼으로 접어든, 손자까지 본 딸과, 그들을 비춰주는 햇볕은 따사롭기만 하고 자식 기르는 것, 일하는 것만을 보람으로 살아온 충실한 인생에 햇볕은 따사롭게 비친다.

-13장 친정에 와서 中



세상에서 서로를 가장 속속들이 아는 사이인 선이와 두만네가 따뜻한 “마리”에 앉아, 뭉쳐두었던 버선 보따리와 함께 이야기보따리까지 풀어놓는 이 장면이 참 따사롭게 느껴졌다. 부지런한 사람들답게 손은 쉬지 않고 버선을 손질하며, 남보고는 말 못 하는 이야기들이 서로의 앞에서 자연스레 쏟아져 나온다. 특히 두만이의 아내, “기성에미”에 대한 두만네의 생각은 읽으면서도 마음이 뭉클해진다. 아버지 없이 자란 막딸이. 왈패 같았던 어미와는 달리 심성 곱고 착했으나, 키가 작은 난쟁이라 평사리의 누구 하나 귀하게 여겨주지 않았던 아이. 끝내 어미마저 죽어 친정이 아예 없어진 그 아이, 가여운 막딸이를 제 식구로, 마치 딸처럼 생각하는 그 모습은 두만네의 깊은 마음을 보여주는 것만 같다.


두만이는 아내가 둘이다. 아버지와 어머니가 짝 지워 준 아내인 “기성에미” 막딸이. 그리고 비빔밥으로 진주 바닥을 주름잡고 있는 “쪼깐이” 서울댁. 둘 다 똑같이 키가 작아 볼품없지만, 두만이의 마음은 서울살이를 하던 시절부터 사귀었던 서울댁에게 있다. 서울댁은 음식도 잘하고, 사업수완도 좋고, 시부모님께도 헌신적으로 행동하는 사람이지만, 두만이를 독점하려고 하고 좀처럼 놓아주지 않는다. 그런 서울댁이 두만네는 마땅치 않다.


기성에미 막딸이는 두만이와의 사이에서 아이를 벌써 셋이나 두었고, 그중 둘 이상이 아들이다. (두만네의 말에 따르면 아이가 셋이라는데, 본문에서는 기성이랑 기동이만 보인다.) 고모인 선이가 “우찌 저리 못생깄노.”라고 킥킥 웃을 만큼 인물도 없는 아이들이건만, 두만네는 기성이와 기동이를 참으로 귀하게 여기고 보듬는다. 할머니에게 뛰어와 안기고, 만나자마자 대뜸 할머니 가슴팍에 손을 넣는 아이를 보면, 아이들을 향한 할머니의 따뜻한 사랑이 선명하게 보인다.


막딸이를 딸처럼 여기는 두만네지만, 두만네의 집에는 메주가 가득하다. 두만이를 꼭 붙잡고 놓아주지 않으려 하는 깍쟁이 서울네를 위한 것이다. “간장 맛이 좋아야 음식 맛이 좋고, 서울집 국밥, 비빔밥이 유명한 것도 어무니 장무새 솜씨 탓입니다“ 라는 두만의 시쁜(가소로운) 말, 틀림없이 서울네의 생각이 담겨있을 그 말에 두만네는 살짝 넘어가 주는 것이다. 자신의 품을 들여 메주를 넘치도록 만들어 두고, ”모레가 말날인께 그날 소금을 풀어야겄다“라며 장 담글 날을 가늠해 보는 것은, 아무리 생각해 봐도 마땅치는 않지만, 두만이 하나 믿고 서울에서 여기까지 내려온 쪼깐이, 법적 아내도 아닌 처지에 남편과의 사이에서 아이도 없는 상황이라, 남편의 사랑마저 잃으면 그야말로 끝일 작은 며느리, 서울댁을 향한 두만네의 깊은 마음 씀씀이인 것이다.


그 옛날 평사리에서 강짜 심한 강청댁을 품어주었던 유일한 사람, 항상 지쳐있고 어딘지 모르게 뾰족했던 함안댁에게도 쉴 곳이 되어주었던 사람. 아기자기하지는 않지만 대범하고, 사리가 밝고 인정이 많아 자연스레 평사리 아낙네들의 구심점이 되었던 두만네는 이렇게 지금 여기에서도, 두 며느리의 각기 다른 상황들을 헤아려 마음에 보듬어 안고, 두 여인네에게 기댈 곳이 되어주는 충실한 인생을 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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