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지] 어둠을 향하여 - 관수와 석이

- 박경리 작가님의 <토지> 속 인물들. 토지 9권.

by 청록펜

백정의 사위라는 이유로 어디를 가든 백정 취급을 받는 관수. 관수의 마음은 잘 벼려진 칼과 같다. 마음만 먹으면 누구라도 해칠 수 있는 칼.

그러나 그는 그 칼을 함부로 사용하지 않는다. 그의 목표는 단 하나. 나라의 독립. 대의를 위해서라면 아끼던 이웃 동생인 한복이의 목숨이라 할지라도 가차 없이 취할 수 있다고 생각하고, 허상안처럼 한심하기 그지없는 자(者) 앞에서도 망설임 없이 공손하게 고개를 숙일 수 있다. 백정의 가족이라 해서 관수에게 쏟아지는 사람들의 멸시와 혐오를 견디다 못한 석이가 흥분하여 조준구에게 덤벼들자, 관수는 석이의 옆구리를 내리치며 주점 밖으로 끌고 나온다. 그의 마음엔 자신이 받은 모욕 따위는 안중에 없다. 다만 자신이 관여하고 있는 독립운동을 그르칠까 염려할 뿐이다.


관수와 석이가 함께 밤길을 묵묵히 걸어가는 그 장면이 나는 참 좋았다. 목표가 분명한 관수, 아직은 덜 여문 석이. 관수에게도 여린 시절이 있었다. 백정의 딸로 평생을 조심하며 납작 엎드려 살아야 했던 아내와, 이제 막 걸음마를 하는 돌쟁이 아이에게도 어김없이 씌워지는 지긋지긋한 신분의 굴레. 벗어날 수 없는 부조리한 사회에 불만을 가져 입만 열면 “백정”이라고 자조 섞인 말을 내뱉고 다니던 때가 있었다. 혜관의 일갈로 그는 불평과 불만에 매몰되던 삶에서 깨어났고, 성장했고, 무엇이 중요한지를 아는 남자가 되었다.


청년이 된 석이는 알에서 깨듯 생각이 깨어나고 있다. 아버지의 원수인 조준구 밑에서 수년간을 보내면서도 정체를 들키지 않았던 아이. 조준구의 동태를 살펴 공노인에게 알려주어 조준구의 몰락을 도왔던 범상치 않은 소년에서 이제는 청년으로 성장하여 세상을 바라보는 눈을 가지게 된다. 사회에 만연하게 얽혀있는 부조리-학대하고 학대받고, 잡아먹고 잡아먹히는 이런 세상-를 인식하고, 끝도 없이 펼쳐진 길 앞에서 막막함을 느낀다.


그런 석이를 관수는 든든하게 붙잡아 준다. 우리는 어느 한 구석에서 그게 전부인 줄 알고 살아가지만, 알고 보면 세상은 넓고 사통팔달이다. 신분 따위, “사람이 맨든 기라. 사람이 맨든 기문 사람이 뿌사부리야제... 그렇다고 해서 우리 생전에 머가 된다고 생각한다믄 너무 조급한 것일 기고오. 우리 생전에 안 된다고 생각하는 것도 탈기가 되니께... 기운을 내라,”

신분의 울타리 따위 걷어내려면, 먼저 왜놈들이 치고 들어온 이 상황부터 타개해야 한다. 왜놈들이 이 땅에 들어왔기에 조가놈이 판을 쳤고, 네 아부지나 내 어무니가 그렇게 되어버린 거니까... 관수의 생각을 읽으면서 나 또한 답답함에 질식되지 않고, 무엇이 중요한지를 분별하여 내가 서 있는 자리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일부터 해야겠다. 다짐해 본다.


“어둠을 향하여, 얼마나 길지 모르는 어둠을 향하여 함께 가리라는 생각이 등불처럼 발밑을 비춰주는 것만 같다.”

함께 걸어가는 <토지> 동무들이 있어서 감사한 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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