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그리고 나의 이야기
<구멍은 파는 것>은 루스 크라우스가 글을 쓰고 모리스 샌닥이 그림을 그린 책이다. '어린이의 시선을 담은 재밌는 낱말 책'이란 소제목처럼 갖가지 사물들을 아기자기 재미나게 풀었다. 루스 크라우스와 모리스 샌닥은 <아주아주 특별한 집>에서도 호흡을 맞추어 칼 데콧 명예상을 받았다.
손은 꼭 잡는 것.
할 말이 있을 때 번쩍 드는 것.
구멍은 파는 것. :)
조약돌은 모아서 차곡차곡 쌓아 올리는 것
오빠는 동생을 도와주는 사람
'오빠는 동생을 도와주는 사람이라고?'
잘 읽다 이 부분에서 불쑥 감정의 날이 선다.
왜 이 문장이 나를 붙잡는 걸까?
가만히 들여다보니 문득 떠오르는 기억이 있다.
친정엄마는 4남매 중 둘째(딸-딸-딸-아들)다. 위로 언니가 있지만 친정엄마가 가장 먼저 결혼해 3남매를 낳았다. 3남매 중 첫째가 '나'이고, 그 뒤로 줄줄이 남동생들과 외사촌들이 태어났다. 그렇게 나는 집에서도 외가에서도 맏이가 되었다.
지금은 왕래가 뜸하지만 어릴 때는 외가에 참 자주 모였다. 방학이며 명절이며 돌아가며 이 집, 저 집에서 며칠씩 머물곤 했다. 그날도, 명절은 아니었지만 무슨 행사가 있었는지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외삼촌 집에 모였다. "집에서 놀고 있으렴." 아이들만 집에 남기고 어른들은 모두 외출을 나가셨다. 열네 살 하나, 열두 살 둘, 여덟 살 하나, 일곱 살 둘, 네 살 하나. 여덟 아이들이 한데 어울려 즐겁게 놀았다.
어른들이 돌아왔다.
어찌나 뛰었는지 아이들은 땀범벅이었다.
그때였다.
누군가 소리쳤다.
거실 한 귀퉁이 아기 변기에 네 살배기 사촌동생이 싸 놓은 똥이 그대로 있었던 것이다. 어른들의 시선이 똥에 한 번, 내게 한 번 꽂혔다. 아무도 내게 뭐라 하지 않았다. 하지만 어른들의 눈이 모두 내게로 향했고 한동안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고백건대 사촌동생이 똥을 싸 놓은 걸 몰랐던 것은 아니다. 그저 치우기 싫었을 뿐이다. 치워야 하는데.. 치워야 하는데.. 노는 내내 아기 변기 속 똥이 몹시 신경 쓰였다. 하지만 애써 모른 체했다.
죄책감이 통쾌함으로 바뀐다. 불편하고 어색했던 내 감정의 '구멍'이 조금씩 메워진다. 나는 어린 날의 기억이 별로 없다. 그런데 몇 개의 기억은 어제의 일처럼 생생한데, 그중 하나가 똥 사건이었다. 나는 왜 삼십 년이나 지난 그날의 일을 잊지 못하는 걸까. 어찌 보면 대수롭지 않은 일이었다. 하지만 나는 그날 알게 되었다. 맏이의 무게, 그리고 열 마디 말보다 더 큰 상처를 줄 수 있는 것들이 있다는 것을 말이다.
그림책 <구멍은 파는 것>에서 구멍은 파는 것이라 했지만, 나의 구멍은 '메꾸는 것'이다. 오늘도 글을 쓰며 나의 감정, 나의 구멍을 빼꼼히 들여다보고 토닥토닥 메꾸어 본다.
Photo by Valentin Lacoste on Unsplsh