낭만적 연애와 그 후의 일상 (1)

feat. 알랭 드 보통

by 오이야


12/22.. 12/22.. 12/22..??


날짜를 적는데 숫자가 자꾸 거슬린다. 낯익은 네 자리 숫자. 무슨 날이었던가? 올케 생일인가? 아닌데, 올케 생일은 12월 12일인데. 뭐였지, 뭐였더라?... 아, 맞다. 결혼기념일! 5,6년 전부터 한 해 건너 한 번씩 이렇게 까먹는다. 모르고 한참을 지나버린 적도 있으니 올해는 그나마 나은 편이라 하겠다. 어쨌든 결혼 후 열 해 하고도 삼 년의 시간이 흘렀고, 동갑인 우리 그와 나는 마흔 중반의 나이가 되었다. 그리고 마냥 행복하지만은 않은, 그야말로 쓴 맛 신 맛 더러운 맛 다 보며 살고 있다. 알랭 드 보통의 말마따나 사실상 몇 번의 이혼과 재혼을 겪으며. 오직 한 사람과 말이다.


결혼한 지는 16년이 되었지만 이제야 좀 늦게 라비는 결혼할 준비가 되었다고 느낀다. 라비는 자신이 단 한 번 결혼했다는 입장을 고수할 수 있는 것은 순전히 언어의 교묘함 덕분이라는 점을 알아본다. 겉으로는 편리하게도 단일한 관계처럼 보이지만 그 밑에 수많은 진전, 단절, 재협상, 소원한 기간, 감정적 회구가 깔려 있어 사실상 그는 적어도 열두 번은 이혼과 재혼을 겪어온 셈이다. 오직 한 사람과 말이다. (p277)

알랭 드 보통 <낭만적 연애와 그 후의 일상> 중



얼마 전 양육 문제로 충돌이 있었다. "애들이 부모 머리 꼭대기에 있다"며 욕설을 내뱉고 동굴로 들어가 자물쇠를 채우는 남자. "왜 욕을 하느냐"며 뒤따라가지만 문턱도 못 넘어보고 입을 닫아버린 여자. 슬그머니 동굴을 나와 평소처럼 말을 걸며 무슨 일 있었냐는 듯 시작도 못한 이야기를 혼자 끝내버린 남자. 누다만 똥 같은 찝찝함, 무시당했다는 분노감으로 여전히 입을 닫은 여자. 이런 상황에 결혼기념일이 대수랴. (뭐 좋은 일이라고!)


기대하지도 기대지도 않기로 했다. 차라리 마음이 편하다. 저녁이 다 되어 근처 아울렛으로 차를 몰았다. (성인이 된 이래, 잘한 걸까 아닐까 고민 없이, 무조건 잘한 유일한 일. 취업도 결혼도 출산도 아니다. 5년 전 딴 운전면허다.) 최근 만보 걷기를 시작하며 엄지발가락 통증이 시작되었다. 딱딱한 컨버스화를 신고 두 시간씩 걸어서인 듯하다. 이 핑계 저 핑계로 미루고 미루던 런닝화를 사러 갔다. 정가 20만 원짜리 운동화를 지를까 하다 이내 눈을 돌렸다. 그리고 그놈이 그놈인 수백 켤레의 운동화 중 그럭저럭 마음에 들면서도 70%나 할인 중인 놈으로 골랐다. 쇼핑도 결혼도 인생도 선택의 연속이다.



우유, 당근, 시금치, 아이들 장난감이 아닌, 오롯이 날 위한 무언가를 고민하고 비교해 보는 시간이 필요했는지도 모른다. 그러니 가격은 중요치 않다. 비싼 만큼이 아니라 날 위한 시간만큼이 행복이다. 기대하지도 기대지도 않겠다 해 놓고는, 운동화를 남편 명의의 생활비 카드로 긁었다. 돌아오는 길이 영 찜찜하다. 다이어리 맨 뒷칸에 넣어둔 쌈짓돈이 생각났다. 생일날이었던가 입원 때였던가 암튼 누군가에게 받아서 봉투째 넣어둔 현금이다. 에라, 모르겠다. 돌아와 맥주 한 캔을 깠다. 양심상 '살 빼야 하는데' 한 마디는 잊지 않았다. 12년에서 13년으로. 한 해 더 결혼생활이 유지되었음을 자축한다.


(다음 편 계속)



위 글은 2020년 12월에 쓴 글입니다.

지난 1년 여간 블로그와 브런치에 글을 쓰며 얻은 의외의 소득은 '남편과의 관계 회복'입니다. 위태롭던 그때의 그와 나를 돌아보고 현재의 서로를 바라보며 미래의 우리를 그려봅니다.


Photo by Kelly Sikkema on Unspla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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