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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이야 Mar 21. 2022

아들 둘 엄마의 미술관 나들이

<내맘쏙 : 모두의 그림책 전>

2월 말 우리 집에 코로나가 들이닥쳤다. 4인 가족이 하루 이틀 단위로 줄줄이 확진 판정을 받았고 총 열흘 간 자가 격리했다. 3월 둘째 주부터 일상생활이 가능했지만, 겨울방학과 격리 기간을 거친 후 새로운 일상에 적응하기까지 2주가량이 더 걸린 것 같다. 뒤늦게 오랜만에 등교한 아이들은 아이들대로, 아들 둘에 남편까지 케어하느라 탈탈 털린 나는 나대로 말이다.


새로운 시간표와 환경에 적응하기 시작할 즈음. 우선순위에서 밀려있던 '열심히 살자!', '엄마가 행복해야 아이가 행복하다' 강박증에 제대로 발동이 걸렸다. 브런치 업데이트한 게 언제더라, 아이들 학교 간 동안 뭐라도 해야 하는데... 조바심 반, 열정 반. 잔잔히 호수 위 물결을 가르는 백조처럼 조용히 하지만 사정없이 발버둥 치는 내가 기지개를 켠다. 지난 목요일, 아이들이 등교하자마자 '서울 갈 만한 곳'을 검색했다. 오호, 이거야!! 예술의 전당 한가람미술관 '내맘쏙 : 모두의 그림책 전'. 지금 바로 출발하면 11시엔 미술관에 도착하겠다. 1시쯤 마무리하면 2시 반에는 돌아올 수 있겠는데? 나 홀로 전시 관람이라니 이 얼마만인가! 두근두근. 결혼 전으로 시계를 되돌린 기분이다.

ㅀㄴㅇ


'내맘쏙 : 모두의 그림책 전'은 국내 유명 그림책 작가 7인과 미술 작가 3팀의 작품을 한 자리에서 만나볼 수 있는 전시다. 안녕달, 이수지, 서현, 이지은 등 최근 핫한 국내 그림책 작가들의 그림책 원화를 감상할 수 있다. 뿐만 아니라 아이들을 위한 체험공간도 잘 꾸며져 있다. 안녕달 작가의 <수박 수영장> 옆에는 초록 테두리 안에 빨간 공이 가득한 풀장이 마련되어 있는데, 그 속에서 놀고 있자면 진짜 수박 속을 헤엄치는 기분이겠다.


그림책 관련 전시이다 보니 관람객은 아이들과 함께 온 엄마들이 대부분이었다. 티켓팅 할 때 직원분께서 당연히 아이와 함께일 거라 생각하셨는지 "아이 하나, 어른 하나요?"라고 묻기도 하셨다. (인정하고 싶지 않지만, 아이들 없이 혼자 다녀도 이제 나는 누가 봐도 애 엄마라는!)



평소 좋아하던 이지은 작가의 <친구의 전설>, <팥빙수의 전설>을 만날 수 있어 반가웠다. 반면 워낙 유명하지만 딱히 관심은 없던 이수지 작가. 그녀의 책 <파도야, 놀자>. <그림자놀이>, <명원화실> 등을 읽어보긴 했지만 왠지 크게 끌리지는 않았었다. 하지만 그림책 원화를 보고는 벌어진 입이 다물어지질 않았다. 아.. 이래서 그림책 원화 전시를 하는 거구나. 그림책 속 그림과 실제 그림의 감동이 이렇게나 다를 수 있다니! 그림책 속에서 보았던 선들과는 감히 비교 불가한 원화 속 붓 터치의 포스란. 자유롭고 강렬한 그 붓 선에 나는 한껏 기가 죽어버렸다.


어린 화가들에게.

모든 것은 선 하나를 긋는데서 시작해.
(잘 못 그으면 지우면 돼)
선으로 세상을 그리고 지워 봐, 마음껏!

- 이수지


관심 없던 작가의 재발견, 평소 좋아하던 작품에의 반가움.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번 전시에서 내 눈과 마음을 붙잡은 작가는 <우주로 간 김 땅콩>, <사기병> 등을 쓰고 그린 윤지회 작가였다. 이번 전시에서 처음 알게 된 그녀는 안타깝게도 젊은 나이에 고인이 되었다. 돌아오는 길 지하철 안에서 윤지회 작가에 대하여 검색해 보았다. 그녀 나이 즈음 나 역시 암환자였던 지라 돌아오는 내내 마음이 너무도 무거웠다. 다음날 도서관에서 그녀의 책을 깡그리 빌려와 읽으며 몇 번이나 눈물을 쏟았는지 모르겠다. 왜 이제야 그녀를 알게 되었을까. 세상은 왜 이리 아픈 것인가. <우주로 간 김 땅콩> <사기병>은 윤지회 작가가 투병생활 중 완성한 책이다. 힘겨운 상황 속에서도 따뜻함과 유머를 잃지 않는 글과 그림들을 보고 있자니 가슴이 먹먹해진다.


1979년생 작가 윤지회는 2018년 2월, 위암 4기 판정을 받았다.  <우주로 간 김 땅콩>의 채색 작업만 앞두고 있는 시점이었다. <우주로 간 김땅콩>은 윤지회 작가의 6번째 그림책. 주인공은 유치원에 가기 싫어서 엄마 몰래 사라지는 ‘김땅콩’이다. 땅콩이네집은 김땅콩을 찾기 위해 전단지를 붙이고 파출소에 가고 ‘김땅콩 찾기 캠페인 콘서트’까지 연다. 과연 김땅콩은 정말 우주로 간 걸까?
- yes24 홈페이지


윤지회 작가의 책들
"저, 사진 한 장만 부탁해도 될까요?" 잠깐의 용기가 필요한 순간 (사진 좌)


서초동으로 매일 출퇴근하던 시절이 생각난다. 1호선, 2호선, 7호선을 넘나들며 이리 치이고 저리 치이는 전쟁 같은 시간이었는데. 이렇게 여유롭게 가는 서울이라니 새삼스럽다. 전시 날짜가 3월 27일까지던데 종료 전에 한 번 더 들르고 싶다. 이번에는 아이들 등교하자마자 땡 하고 출발해 전시 관람하고 아트샵에서 윤지회 작가의 책도 구입하리라. 물론 클릭 몇 번으로 주문한 책을 하루 안에 받아볼 수 있는 세상이다. 하지만 이번에는 왠지 그리하고 싶지않다. 좋은 그림을 더 오래 기억하기 위해  미술관을 한번 더  방문하고, 손가락이 아닌 발품을 팔아 책을 구입하는 수고 정도는 기꺼이 감수할 수 있을것 같.



상단 이미지: '내맘쏙 : 모두의 그림책 전' 중 <오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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