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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터틀맘 Jul 19. 2022

경단녀의 슬픔과 서러움

[터틀맘 다이어리]

퇴사를 피하려고 안간힘을 썼다. 육아기 단축 근무와 규정에 없던 무급 휴직까지 어렵게 만들어 쓰며 버텼다 (당시 내 사정을 이해해 주고 도움을 주었던 직장 동료들에게 정말 감사했다). 이직도 아니고 재취업의 기약도 없이 내 커리어를 전부 내려놓고 퇴사하기가 너무 겁이 났다. 


지속되는 지각과 등교 거부, 무기력하고 우울한 표정. 그 당시 터틀이에게 누군가의 도움이 필요하다는 것을 온몸으로 느꼈다. 그걸 내가 해야 한다는 것도 알겠는데 그럼 내 커리어는? 게다가 터틀이를 어떻게 도와줄지 솔직히 자신도 없었다.       


불안한 마음에 관련 책을 닥치는 대로 읽다가 정곡을 찌르는 구절을 발견했다.


내 커리어에만 집중하는 것은 집 전체가 불타고 있는데
거실 벽을 무슨 색으로 칠할지에 관심을 두는 것과 흡사했다 


ADHD와 영재성을 동시에 가진 아들을 키우는 데비 레버 Deborah Reber는 방송국에서 일하다가 그만두고 학교 생활에 어려움을 겪는 아들을 홈스쿨링 하기 시작했다고 한다. 그녀가 당시 본인의 생각을 표현한 문장이 나에게 말하는 것 같이 느껴졌다. "정신 차려!" (우리 아이는 조금 다를 뿐입니다- ADHD, 아스퍼거 등 신경다양성을 가진 아이를 위한 부모 가이드, 2018, p147).


퇴사 후 나의 생활은 터틀이 중심으로 움직였다.

등교하기 싫어하는 터틀이 학교 문 앞까지 같이 가주기, 터틀이 이야기 들어주기(말을 잘 안 하지만), 터틀이가 친구들과 어울릴 수 있도록 놀이터 가기, 터틀이 놀이 치료 가기, 터틀이 책 읽어주기(백과사전을 가져오면 난 어쩌란 말이냐 ㅠㅠ) 등등. 새로운 일상은 생각보다 바빴고, 터틀이가 학교에 있는 동안은 도서관이나 대형 서점에 가서 관련 책들을 닥치는 대로 읽었다.       


그러다 불쑥 경단녀의 슬픔이 밀려드는 때가 있다. 

직장 일로 알던 분들이 내가 퇴사했다는 소식을 들었다고 어디로 이직했냐고 전화 올 때.

오랜만에 전화한 친구나 후배가 이직했다며 소식을 전할 때. 

(이런 전화는 대체로 내가 터틀이에게 빨리 하라고 재촉하며 소리 지르거나 실랑이를 할 때 오는 경향이 있다.)


어쨌든 특별하지 않지만 루틴 한 생활이 계속되고, 자잘한 문제들은 그때그때 더 커지지 않게 수습하면서 터틀이는 아주 천천히 안정되어 갔다. 다시 일하고 싶은 마음이 스멀스멀 고개를 들었다. 나이도 많고 기회가 주어질지 모르지만. 


터틀이 담당 의사 선생님께 의견을 물었다.

"선생님 제가 다시 일해도 될까요?"

"물론이죠."

"터틀이가 괜찮을까요?"

"일하고 싶으시면 하셔야죠. 일 하시다가 터틀이가 힘들어하면 다시 그만두면 되죠."

".........................."


순간 말문이 막히고 분노가 치밀었다. 아무리 터틀이 담당 의사 선생님이지만 내 일은 언제든 그만둬도 되는 그런 것인가? 경단녀가 다시 취업하기도 어려운 마당에 아이 상황에 따라 언제 그만둘지 모른다고 하면 일자리 구하기는 불가능한 것 아닌가?    


그날 저녁 모두 잠든 후에 혼자 어두운 식탁에서 맥주를 마시며 분노는 경단녀의 서러움으로 변해갔다. 

내 커리어는 정말 끝이 났구나. 다시 취업한다고 해도 언제 또 그만두게 될지 모르겠구나. 

내 일과 나의 성취 이런 단어들은 이제 나에게서 점점 멀어지고 있구나.

한겨울 칼바람 같은 자각과 무력감이 엄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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