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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GIMIN Jul 15. 2024

『스완네 집 쪽으로』를 읽던 밤

7월 15일

  『스완네 집 쪽으로』를 일곱 번 읽었다. 국일미디어 판으로, 문예출판사 판으로, 펭귄클래식 판으로, 민음사 판으로.『스완의 사랑』도 읽었다. 읽기를 중단한 다음에 다시 국일미디어 판과 민음사 판으로.


  국일미디어와 민음사와 펭귄클래식 중 어느 걸 먼저 읽을지 고민했다. 먼저 번역된 걸 읽자는 결심이 모든 이견을 이겼다.     

  

  고등학교 때였다. 도서관에 있던 책 중에 만화로 된『스완네 집 쪽으로』가 있었다. 스테판 외에(Stéphane Heuet)가 그린 칸 안에서 콧수염을 단 두 눈 곁에 온갖 사물이 떠다녔다.


  동화 같은 이야기라고 지레짐작하며, 나는 대출 바코드를 좀 더 바르게 찍기 위해 너부데데한 표지를 가까이 대는 일에만 집중했다.     

  

  군대를 전역하고 [공교롭게도 블룸스 데이(Bloomsday)였다.] 복학하는 동안에 여름이 가고 가을이 왔다. 도서관 가는 길은 멀고 아름다웠다. 일부러 빙 돌아가기도 하고 아파트 사이에 난 쪽문을 통해 가로지르는 일도 허다했다.


  나는 군대 연등 시간을 틈타 읽었던 로베르토 볼라뇨의 작품을 읽어나갔다. 2666의 2권에서 누군가 외치는 소리를 들었다. 사람들은 언젠가부터 대가들의 연습 경기에 해당하는 책만 읽는다고.      


  볼라뇨의 작품을 읽고 나서 톨스토이를 읽었다. 겨울과 『전쟁과 평화』는 제법 잘 어우러졌다. 그러나 나는 결국 거기서 절반을 잃었다. 안드레이의 ‘전쟁’에는 까맣게 잊고, 나타샤와 피에르 사이에 흐른 ‘일상’만 오롯하게 기억에 남았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는 바로 그 기억의 틈을 파고들었다.『전쟁과 평화』는 무엇보다 긴 소설이었고, 소설을 한 편 다 읽은 나는 이야기가 계속되었으면 좋겠다고 소망하는 바스티안 발티자르 북스처럼 아쉬운 마음만 가득했기 때문이었다. 내가 읽은 책 보다 더 긴 책이 읽다는 사실은 내 안에서 일종의 로망을 불러일으켰다. (지금 생각하면 그저 욕망에 불과했지.)       

 

  그 결과가 바로 다섯 번의『스완네 집 쪽으로』완독이었다. 다섯 번이나 읽었는데도 기억나는 구절이 있고, 다섯 번을 읽었는데도 새로운 구절이 있었다.


  주인공이 지도를 놓으면서 이름을 가지고 노는 말놀음은 언제 읽어도 즐겁다. 어머니에게 재워달라고 처음 응석을 부리던 날을 참담한 심정으로 묘파 하는 '나'의 유년이 너무나 솔직하고 생생해서 되려 부끄러웠다. 스완의 사랑이 종말을 맞이할 때쯤 돼서야 나오는 꿈 이야기는 내내 읽어도 신선하다. 어리숙한 나는 아직도 환등기 어린 화자의 마음을 들쑤신 장면을 계속해서 이해하며 읽으려고 노력 중이다.      

  

  책의 내용이 기억이 나든 기억이 나지 않든 책을 읽은 장소는 확연히 기억난다. 가을 도서관은 불타오르는 듯한 노란빛으로 물든 은행나무가 도서관 곁을 지켰다.


   여름 도서관에 돌아가는 선풍기 바람을 맞아 차가워진 땀냄새는 아직도 기억 속에 생생하다. 여름 장마 사이 이사를 갔을 때도 책은, 마치 혀를 쭉 내민 채 머리를 푹 숙이고 주저앉은 개처럼, 내 곁에서 가름끈을 바닥에 늘어뜨린 채로 있었다.         

  

 책을 읽은 기억은 책을 읽은 장소와 같은 기억 속에, 마치 골판지 상자 안에 든 병아리들 마냥 옹기종기 들어있다. 나의 기억이 반드시 나의 기억만은 아니지 않던가. 프루스트가『참깨와 백합』번역 서문에서 독서 경험에 대한 기억들을 맨 처음에 소개한 게 떠올랐다. 저자의 소개에 앞서 작품보다 독서 경험이 중요하다는 선언을 프루스트는 우아한 필치로 그려냈다.


 책을 읽은 기억보다 책을 읽은 장소와 배경에 대한 그이의 세심한 필치를 생각하면 새삼 독서는 독서 이외의 기억까지도 모두 품는 날개라는 생각도 들었다.

   

  그 뒤로 (출판사마다 이름은 다르지만)『꽃 피는 아가씨들의 그늘에서』에서 등장한 도스토옙스키의 소설을 다 읽고 나서도 한참 동안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로 돌아가지 못했다. 『스완네 집 쪽으로』를 읽으면서 느낀 지루함이 끝끝내 마음속에 쌓이다 폭발한 것이리라.


  너무 사랑하면 너무 증오하게 된다더니만. 스완의(목소리를 빌린 작가의) 통찰을 새삼 실감하는 순간이었다. 여하튼 운동삼아 갔던 도서관도 도스토옙스키의 소설에 짓눌려 메말라갔다.


  대학을 졸업하고 다시『스완네 집 쪽으로』를 잡았다. 세상이 마치 블룸 필터 쓴 것 마냥 아름답게 보이게 된다거나 그렇지는 않았지만, 잠시나마 마음에 있던 더사라졌다. 부조리로 일관된 일상이 갑자기 조리 있는 발걸음으로 행진했다. 주인공이 비본 내를 산책하는 속도로, 내 주위의 세상 또한 그렇게 흘러갔다.     


  나는 지금 『스완네 집 쪽으로』을 떠나서 『게르망트 쪽』에 와있다. 전에 중단한 부분은 진작 넘어선 지 오래다.


  그러나 『스완네 집 쪽으로』를 읽는 순간은, '나'의 어머니가 『유복자 프랑수아』의 구절을 ‘나’에게 들려주는 순간은, 어수선한 마음이 잠을 내쫓는 밤에도 계속 이어지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밤은 어쩌면 이야기의 본고장인지도 모르겠다. 『아라비안나이트』의 이야기가 ‘밤’에만 이뤄지지 않던가. 『끝없는 이야기』를 읽던 바스티안이 밤에 책으로 들어가지 않던가.

     

  『스완네 집 쪽으로』를 처음 다 읽고 돌아오던 날, 불그스름한 구름이 낀 흐린 하늘임에도 나는 시큰한  두 눈으로 희미하게 반짝이는 별이 헤집겠다는 듯이 고개를 치켜올렸다. 시원했다. 상쾌했다. 그 기억이 마치 전생의 기억처럼 내 마음에 밀려와 지금도 내 탁자 위를 책으로 어지럽히나 보다.


  읽을 책은 아직 많다. 나는 결국 세상의 모든 책을 다 씹어먹고 싶기 때문에 사는 욕심쟁이 염소에 불과하다. 그 사실이 뿔처럼 날카롭게 내 이마 위에서 벼려져 있다.


  계절이 돌고 돌아 봄에 당도하듯이, 자정에서 다른 자정으로 시곗바늘이 돌아갈 때마다 프루스트의 책에 기어이 당도한다. 지독해서 도리어 유쾌한 되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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