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월 28일
※ 영화『브라질』과『돈키호테를 죽인 사나이』에 대한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파르마의 수도원』을 다 읽고 심란했던 마음을『오만과 편견』으로 겨우 고친 적이 있었다. 왜 걸작들은 사랑하는 사람들을 제대로 이어주지 않는 것인가. 엘리자베스와 다아시가 이어지는 대목의 교조적인 표현에 잠시 (연극에서 흔히 말하는) 소격 효과가 생겼지만 여긴 그래도 제대로 이어졌다.
『죄와 벌』은 에필로그에서 소냐와 로쟈가 다시 만나지만, 그건 로쟈의 부활에 대한 암시로 가득 찼다. 두 명의 여자를 각각 고의와 우연으로 죽인 살인자의 결말도 이랬다. ‘그들은 행복하게 잘 살았다’는 식의 동화 같은 결말은 바라지도 않는다.
『파르마의 수도원』의 파브리스와 클렐리아가 나눈 감옥 속의 ‘우정’이 ‘불륜’이 되어 함께 몰락하는 과정을 읽을 때마다 그렇게 가슴 아플 수가 없다. 정말 이래야만 했냐며 작가에게 항의를 하고 싶어도 작가는 아무 말이 없다.
그러고 나서 바로 도스토옙스키의 『백치』를 읽지 말았어야 했는데. 미쉬킨 공작에 실망하며 도망친 아글라야의 모습을 보고 나는 또 쓰린 가슴을 움켜쥐어야만 했다. 어떻게 보면 미쉬킨 공작은 파브리스처럼 순진하지만 파브리스와는 반대 선택을 하다가 망한 것처럼 보인다. 결국 그는 다시 '백치'가 되고, 아글라야 또한 인간적인 의미에서 타락한다.
미쉬킨 공작이 잘못한 면이 많고, 아글라야가 안타까우며, 나스타샤의 상처에 공감하지만, 『파르마의 수도원』을 읽은 상처가 아직 아물지 않던 나는 (상처에 대한 분노를 스탕달에게 쏟았듯) 엉뚱하게도 도스토옙스키의 멱살을 잡고 싶었다. 그냥 모든 인물이 다 불쌍했다.
나는 당시 『가난한 사람들』로 시작하여『카라마조프 씨네 형제들』에 이르는 도스토옙스키 소설 전 권 읽기를 시도하고 있었는데,『백치』는 내게 예상치 못한 '깔딱 고개'를 선사(?)했던 것이다.
이 고비에 비하면『카라마조프 씨네 형제들』을 읽을 때 느꼈던 고통은 고통도 아니었다. (나보코프가 도스토옙스키가 훌륭한 작가가 아니라고 단언했던 이유를 아주 약간은 알 것 같았다.) 『백치』를 막 다 읽은 나는 지금은 없는 작가를 부활시켜서라도 목 조르고 싶었다. 호머 심슨이 아들인 바트의 목을 두 손으로 조르듯이. 또 나만 진심이었지 또.
이번엔 주치의인 제인 오스틴도 고개를 가로저었다. 내 (문학 한정) 연애 세포는 더 이상 가망이 없었다. 오히려 제인 오스틴은 내가 지나칠 정도로 순진한 '사람'(그이가 말한 표현을 아주 점잖게 순화해서 표현했다.)이며, 비극과 사람의 사랑은 다른 것이고, 비극이기 때문에 슬픈 결말을 맞는 것이라고 넌지시 타일렀다. 천박한 '보상심리'로 작품을 재단하는 일은 지양해야 한다고 충고도 해줬다.
맞는 말 퍼레이드로 점철된 그이의 진단이라서 반박할 수도 없었다. 잘못하면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더러 사랑이 왜 이뤄질 수 없냐며 퇴폐의 딱지를 붙인 그 옛날의 높으신 분처럼 될 수도 있지 않은가.
(실제 밸로시랩터는 영화 속 모습과 매우 다르지만,) 어쨌든 내 가슴에 『쥐라기 공원』에 나오는 밸로시랩터의 손톱자국이 내겐 하나도 아니고 두 군데나 났다. 하나는 프랑스 왕국의 공룡이, 나머지 하나는 제정 러시아의 공룡이 낸 자국이다. 여주인공이 웨딩드레스를 입는 표지가 완결권의 대부분인 라이트 노벨을 한 트럭 복용해도 아물 수 없는 상처였다.
더 비참한 사실은 이제 로맨스 소설을 읽을 때마다, 두 커플(?)의 비극이 먼저 떠올라서, 로맨스 소설의 행복한 결말마저도 지독한 의심의 시선으로 바라보게 되었다는 데에 있다. 현실 연애는 돈 들어올 기미도 없어서 유령 통장 소리를 듣는데, 소설 연애는 마이너스 통장이다. 숫자 앞에 붙은 작대기가 사라질 기미도 보이지 않는다.
『돈키호테』의 둘시네아는 영영 등장하지 않고, 돈키호테의 입에서만 등장하지만(그러나 돈키호테의 죽음은 분명 둘시네아와 아주 직접적인 연관이 있다.), 테리 길리엄 감독의 영화『돈키호테를 죽인 사나이』는 기어이 둘시네아를 현실로 불러내어 돈키호테로 착각한 우리의 착한 하비에르를 죽였다. 그러고 보니『브라질』에서도 불쌍한 샘 라우리의 사랑은 망상으로 추락했구나. 조나단 프라이스는 전생에 무슨 죄가 있었기에 같은 감독의 작품에서 두 번이나 당하는지. 원.
여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또 몸을 움찔거렸다. 자라 보고 놀란 가슴 솥뚜껑 보고 놀란다더니. 지난 두 번의 상처가 그나마 내 정신줄을 붙잡았다. 두 커플의 사랑이 결국 내 백신이 되었다는 사실을 깨달으니 더 슬프다.
소설을 그만큼 실감 나게 읽었다고 스스로를 위로하기엔 상처가 생각보다 오래갈 것 같다. 내 안의 ‘애틋함’은 그 사실과는 별개의 위치에서 생생하게 살아있으니까. 사회가 권하는 술은 그래도 숙취해소제가 잘 들지만, 문학이 권하는 술은 약도 없다는데. 에잇!