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 계획은 다음과 같은 대전제를 두어야 비로소 정확해진다. “여행객은 모두 피곤한 사람이다.”
여행의 설렘 때문에 잠을 설치지 못하고 길을 나선다. 기차역이나 버스 터미널이나, 공항에 도착하면 바짝 정신을 차려야 한다. 행여나 물건을 잃어버리거나 도난당할까 봐, 움직이는 내내 주변 눈치도 살핀다. 국내여행도 이럴진대 해외여행은 어떻겠는가. 인종차별적인 발언에 대해서도 귀 기울이는 대목까지 추가하면 이 모든 상황이 피곤의 구렁텅이로 치닫는다. 이동 중에도 교통 신경 써야 하고, 식사 비용이나 그런 거 다 챙겨야 한다. ‘이 사람이 지금 나에게 바가지를 씌우는 게 아닐까’하는 생각이 즐거워야 할 식사마저도 방해한다.
휴양지에서 휴식을 취한다고 해서 이런 피곤이 사라지는 건 아니다. 오히려 휴식하는 동안 두고 온 일이 더 생각나서, 혹은 여기서 진탕 놀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쓰러질 때까지 놀고 있다. 휴양지의 날씨가 일 년 내내 햇살이 비치는 것도 아닌지라, 비라도 오는 날에는 멀거니 하늘만 쳐다볼 수밖에 없다. 어느 정도 여행을 한 내 경험이 말한다. 비 내리는 모습은 집에 보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고. 퍼붓는 비는 세상의 모든 풍광을 회색빛으로 누른다고.
혼자 가는 여행도 그렇지만, 내가 인솔해야 하는 혹은 내가 따라가야 하는 여행이 될 때도 피곤하긴 마찬가지다. 겨우겨우 해외 사이트로 맛집 예약해서 갔는데, “뭐 대단하지는 않네”나 “한국에선 이 돈이면 배부르고도 남지”라는 대답이 돌아올라치면, 내가 가진 배려심이 달고나 부서지는 것처럼 와장창 부서진다. (이 세상엔 불행하게도 남의 사정을 잘 헤아리는 사람이 얼마 존재하지 않는다. 상대방에 대한 배려는 결국 교양의 영역이니까.) 반면에 여행을 계획하여 실행에 옮긴 사람이 분 단위까지 조정한 스케줄 표를 내게 건네주기라도 하면, 나는 기함하며 도리질을 치리라. 그 고집이 여행 당일에 누그러졌으면 좋으련만, 늘 우리의 기대는 이뤄지지 않는다.
기념품과 물건과 빨아야 할 옷가지와 여전한 무게의 도구가 든, 무게가 더 늘은 배낭이나 캐리어를 손에 쥔 채로 공항 가는 버스나 지하철로 혹은 터미널로 향할 때, 피곤은 우리의 깔딱 고개가 된다. 캐리어 손잡이 위에 턱을 괴고 머리에 쓴 투명한 상모를 돌리거나, 입을 벌린 채로 코를 골다가 언뜻 깨며 주변 사람들에게 연신 고개를 숙이기도 한다. 교통수단이 집 바로 앞까지 데려다주면 얼마나 좋을까.
여행을 다녀오고 나서 정신이 멍할 때가 많다. 우리의 피곤이 기억을 흐트러놓는 탓에 사진이 찍힌 순서나 영수증에 찍힌 시간이 아니었다면 여행의 이미지는 머릿속에서 망각과 기억을 뒤채어가며 오래도록 추억할 원형을 만든다. 풍경의 맥락과 고생은 그 가운데 잊히고 서서히 후회가 밀려온다. 피곤함을 무릅쓰더라도 거기는 가볼걸. 그건 맛을 보고 올걸. 그 물건을 사 올걸.
후회가 여행을 부르면, 또다시 피곤이 일어나 우리의 여행길을 함께 한다. 일에 중독된 우리네 현실은 늘 여행이 도피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그들은 모른다. 피곤에 짓눌리지 않고 내가 하고 싶고, 보고 싶고, 가고 싶고, 먹고 싶은 것을 먹는 일 또한 열심히 사는 삶 그 자체라고. 여행은 단지 위도와 경도만 바뀐 채 생활하는 것이라고. 낯선 땅에서 생존한 의지와 힘을 추억과 경험으로 삼아, 지금 이 땅에 깊숙이 뿌리내리기 위한 방법을 찾는 중인지도 모른다고. 인간은 본디 여행인으로 태어나 정주를 선택한 동물이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