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rt 9. 69-71-91
「다시 처음부터 다시」의 간주는 유달리 드럼 소리가 세게 들린다. 그 대목을 자세히 들으면 이펙터를 건 보컬로 누군가가 노래 부르는 소리가 들린다. 나는 여태껏 그 ‘중얼거림’이 뭘 말하는지를 잘 모르겠다. (심의로 인한 어색한 표현이 곳곳에 드러나는 데도) 이 곡에 등장하는 김진표의 랩은 ‘강력’한 어조로 청자의 귀에 많은 할 말을 쏟아붓는다.
「다시 처음부터 다시」의 드럼 소리만 그런 게 아니다.「왼손잡이」의 강력한 드럼 필인은 서정적인 기타 인트로의 감흥을 무참히 쪼갠다.「아무도」의 록 사운드에서도, 신디사이저와 베이스 프로그래밍 연주가 주가 되는「더」의 사운드에서도 드럼 파트는 선명하게 들린다. 심지어「너에게 독백」이나 (블루스가 가미된) 「안녕」같은 ‘말랑말랑한’ 성격의 곡에도 드럼 사운드가 잘 들린다. 거의 메탈 드럼의 음량에 가까운 이 앨범의 드럼 사운드를 그 당시의 컴퓨터 프로그래밍 만으로 만들었다는 사실이 여전히 믿기지 않는다.
그런 의미에서 굴종의 무한한 루프를 음악의 루프로 치환하며 끝내 저항의 루프로 삼는 「다시 처음부터 다시」는 이 앨범의 ‘야심작’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근데 그 저항 또한 지나치게 촌스럽게 들리지 않는다. 「왼손잡이」나 「달팽이」의 소외의 비유나, 「너에게 독백」의 회상, 「기다리다」의 한없이 친절한 서정,「안녕」를 풋풋하게나마 이적의 블루스 보컬과 「아무도」의 (고독을 동반한 의도적인) 자의식 과잉,「더」의 풍자가 이 앨범에서 한꺼번에 터져 나왔기 때문이다. 총천연색으로 사방팔방 번지는 활기를 이 앨범은 지녔다.
물론 이들의 자유분방한 청춘은 갇힌 상황 속에서 피어난 (더 콰이엇의 곡 제목을 살짝 인용하면) ‘상자 속 젊음’이었다. 이적은 「기다리다」와 같은 서정적인 발라드를 지은 손으로 (조소로 가득한) 「더」를 쓰고 불렀다. 상자를 넘고 싶은 의지와 강력한 상자에 대한 체념이 이 앨범 안에서 계속 엇갈린다. 일견 조악하게 들리는 사운드 또한 이런 콘셉트 덕분에 당위성을 얻었다고 나는 생각한다. (「Panic is coming」의 휘파람 소리와 「다시 처음부터 다시(Saxy reprise)」의 색소폰 인트로가 동일한 멜로디를 지녔다는 점을 생각하면 더더욱 그렇다.)
최성원의 주효한 디렉팅과 기획을 바탕삼은 이 앨범은 (김진표의 색소폰과 보컬, 랩을 제외하고) 이적이 거의 모든 연주를 맡았지만, 세션으로 참가한 사람들 또한 제 역할을 충분히 했다. 「달팽이」의 섬세한 김효국의 신디 스트링 연주는 (브릿지에서부터 곡의 저음부를 서서히 채우는 편곡 방식과 더불어) 곡의 도약을 한층 돋궈줬다. 「아무도」의 기타를 치는 박성진의 (톤을 강조한) 기타 연주와 이재덕의 코러스, (당시 주한미군으로 복무하면서도 서울의 블루스 클럽에서 종종 블루스 하모니카 연주도 했던, 아칸소 리틀록 출신의) 제레미 던 크루즈가 연주한 블루스 하모니카 연주는 ‘패닉’이라는 이름에 맞는 음악적 ‘충격’을 청자에게 선사한다.
당국에 의해 이들의 말은 함부로 ‘윤색’되었지만, 정교함보다 충격에 초점을 맞춘 음악은 날카로운 안광(眼光)을 잃지 않았다. 덕분에 이 앨범의 소박한(?) 사운드가 되려 이 앨범의 ‘억눌린’ 성격을 더욱 강조하는 듯이 들릴 정도다. 그들은 90년대가 (지금의 우리가 어림짐작한 것과 달리) 80년대의 ‘병폐’를 계속 연장하여 앓은 시대였다는 점을 이 앨범으로 증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