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rt 9. 31-34-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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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들이 플레이어가 되어 공을 잡는 일에 적극 가담할 때, 이석원은 (마치 포수처럼) 다른 곳을 보았다. 그런지와 펑크를 받아들이는 사람들 곁에서 이석원은 그런지의 근원인 분노와 냉소를 유심히 관찰했다. 허세로 시작했지만, 그는 일단 자신의 손에 들어온 기회라는 공을 비교적 망설임 없이 잡았다. 물론 현실은 녹록지 않았다. 그가 꾸린 밴드의 음악적 자산은 하나의 앨범을 꾸리기에 약간 부족했다. 가장 기본적인 코드로 만든 (원가사가 영어였던) 「우스운 오후」는 윤병주의 너그러운 기타 애드리브가 아니었던들, 단조로운 곡이 될 뻔했으니까.
포수의 시선으로 처음 경기에 참여했기에, 그는 뭔가 다른 걸 하고 싶었을 테다. 「보여줄 순 없겠지」의 훅만 들어있는 구성, 「소년」의 후반부 훅을 단호히 끊는 곡 구성, 「산책 끝 추격전」의 신선한 충돌, 「로랜드 고릴라」의 지나치다시피 단호한 간결함. 단순한 코드 진행의 곡이 많은데도, 노이즈나 쟁글 팝 특유의 클린 톤을 비롯한 여러 톤이 이 앨범을 수놓는다. 믹싱을 비롯한 앨범 전반의 프로듀싱과 엔지니어를 동시에 맡은 윤병주와 이상문은 기타와 보컬 파트와 드럼과 베이스 파트를 나눠서 녹음을 진행한 이 앨범의 사운드를 하나의 장으로 일구는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다. 영국의 유명한 엔지니어인 이안 쿠퍼는 이 앨범의 사운드를 최소한의 손길로 가다듬으며 이 앨범이 지닌 독특한 미감을 한껏 살렸다.
이석원을 비롯한 밴드 멤버들은 대체로 자기가 다룬 악기의 연주와 편곡을 맡았다. (나중에 ‘김반장’으로 활약하는) 유철상이 드럼 편곡을, 류기덕이 베이스 편곡 및 진행을, 이석원이 보컬 멜로디와 기타 멜로디를, 정대욱이 기타 편곡이나 아르페지오를 비롯한 리드 기타 전반을 도맡았다. 이석원의 초창기 곡인 「로랜드 고릴라」는 사실상 윤병주와 이석원과 유철상이(그러니까 삼인조 밴드 세션으로) 만든 곡이다. 류기덕은 「상업그런지」와 같은 곡을 작곡하고(여기서 이석원은 단지 보컬로만 참여한다.), 필요에 따라 베이스 멜로디를 직접 편곡했다. 유철상 또한 「쥐는 너야」의 인트로에 등장하는 마칭 밴드 리듬을 제안하는 식으로 앨범에 참여했다.
앨범은 이상하리만치 긴 호흡으로 분노의 뒤편, 나른한 오후의 권태와, 묵은 피로 같은 감정을 마주한다. 처음 만들었음에도 불구하고 차근차근하고 나른하게 이어지는 이들의 곡은 그런지의 분노 또한 상업적이고도 폭력적인 억압이 있다는 사실을 은연중에 드러낸다. 이 사실은 천진난만한 그들의 사운드가 대전제로 자리 잡았기에 더욱 선명하다. 「미움의 제국」이 주는 피로와 권태의 어마어마한 무게 속에서, 상대방에 대한 「동경」의 마음이, 「쥐는 너야」를 거치며 ‘넌 결국 나였’ 다는 깨달음으로 변하는 과정을 이 앨범은 「생일기분」이나 「산책 끝 추격전」, 「팬클럽」 같은 일련의 곡으로 포착한다. 동경의 정체가 바로 콤플렉스임을 깨달은 앨범의 말은 「소년」의 과장된 헌사 속에서 (묘하게 5집의 ‘떠남’이 생각나는) 탈출을 꿈꾼다.
모든 감정이 썰물처럼 빠진 뒤에 들리는 「우스운 오후」는 참 해사하기 이를 데 없다. 코드 진행 또한 단순한 이 곡에서 우리는 떳떳한 개인주의자가 가꾼 오롯한 화분 하나를 마주한다. 깨진 그릇을 겨우겨우 잘 빠지는 화분 그릇으로 빚으며 표현하려는 (슬픔 속에서도 빛나는) 이 곡의 환희가 이 앨범이 자칫 빠질 수 있었을 니힐리즘을 완전히 해소한다. 지적인 냉소보다 단순 무식한 창작이 더 위대하다는 사실을 이 앨범만큼 명쾌하게 알려주는 앨범도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