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stant pig』

PART 2. X-92-0

by GIMIN

DJ 클래지(한국명 김성훈)가 취미로 만든 자신의 영어 데모 곡을 자신의 인터넷 사이트에 올리면서, 이 모든 일이 일어났다. 지인이었던 크리스티나와 크리스티나의 남동생 알렉스가 이 데모에 보컬로 참여했다. 이 데모 곡은 이후 DJ 클래지와 알렉스를 정식으로 섭외한 플럭서스(의 자체 스튜디오)에서 ‘제련’ 과정을 거쳤다. 기타리스트 홍준호와 샘 리, 베이시스트 최훈과 전성식, 김상훈(나중에 그는 더블유에 합류한다.)이 이 ‘제련’ 과정에 참여했다. 플럭서스의 권유로 호란이 이들과 합류한 게 바로 이 무렵이었다. 호란은 이 앨범에 등장하는 모든 한국어 가사를 (크레디트로 짐작하건대) 직접 썼다.


DJ 클래지는 이 앨범의 모든 건반악기와 컴퓨터 프로그래밍을 전담하며, 은은한 질감과 칠(Chill)한 정취가 공존하는 사운드를 일궜다. 그가 만든 그윽한 사운드에 힘입어 호란과 크리스티나와 알렉스의 보컬은 더욱 세련된 미감을 획득할 수 있었다. (호란의 발랄한 보컬이 인상적인) 「Play girl」의 훵키한 그루브, 「Stepping out」의 유쾌한 비트와 「Tattoo」, (알렉스의 우수 어린 보컬이 인상적인) 「After Love」의 그윽한 사운드, 앨범의 진정한 걸작인 「Futuristic」의 (크리스티나의 보컬과 어우러지는) 하우스 리듬(의 볼륨 조절)과 스트링 사운드가 어우러져서 이룬 정취는 그의 꼼꼼한 솜씨가 거둔 음악적 성과였다.


이 앨범에 참여한 여러 세션 뮤지션들의 맹활약도 돋보인다. 「You never know」의 라틴 기타 연주를 담당한 샘 리는 특유의 맛깔 난 연주로 곡의 그루브를 한껏 살렸다. 타이틀곡인 「내게로 와」의 멋진 베이스 사운드를 인트로에 수놓은 김상훈은 (당시는 이름이 달랐던) 밴드 'W'의 충만한 사운드를 예고했다.


「Novabossa」에 크리스티나의 보컬과 더불어 등장하는 홍준호의 보사노바 기타 연주 또한 훌륭하다. 그의 찰랑거리는 리듬 기타 연주가 전성식의 콘트라베이스 연주와 잘 어우러진 「Gentle rain」은 이 앨범의 또 다른 걸작이다.


칠 아웃(Chill-Out)을 비롯한 라운지(Lounge) 음악을 전면에 어필한 (리듬보다 감성을 중시한) 이들의 음악은, ‘감상용 일렉트로니카’라는 새로운 관점의 일렉트로니카를 대중에게 본격적으로 소개했다. 이 앨범은 결과적으로 일렉트로니카가 단순히 춤추기 위한 용도로 사용되는 음악만 있는 게 아니라는 인식을 본격적으로 퍼트렸다. 이 앨범을 기점으로 ‘댄스 뮤직’과 ‘일렉트로니카’는 비로소 다른 길을 걷기 시작했다. (물론 그 당시에 일본의 시부야케이나, 라운지 음악, 이들 음악의 주요 모태가 된 ‘자미로콰이’의 음악 등이 대중에게 알음알음 퍼져있었다는 사실을 잊어선 안 되겠다.) 가깝게는 (‘펌프 기획’을 비롯한) ‘테크노’ 뮤지션에서, 멀게는 김명곤에 이르는 거장들까지 시도했던, 한국의 일렉트로니카는 이 앨범을 통해 해당 장르의 온전한 매력을 비로소 대중에게 골고루 전파했다. 클럽에서 시끄럽게 트는 음악으로 오해받았던 일렉트로니카는 이 앨범을 기점으로 지하를 벗어나 한국의 모든 음악 장르에 퍼졌다. 이 앨범은 ‘일렉트로니카’라는 장르에 대한 우리의 시각을 결과적으로 고치는 데 성공했다.


큰 볼륨을 쓰지 않는 (때문에 소위 ‘라우드니스 워’에서 자유로운) 이 앨범의 음악은 우리가 원하는 시점에 정확히 당도한 ‘뉴웨이브’였다. 우리의 가요는 이 앨범이 만든 ‘새로운 바람’에 힘입어, 보다 적극적으로 ‘일렉트로니카’란 장르를 과감하게 탐구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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