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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인 Sep 04. 2022

로드킬

죽음에 관한 고찰


내가 다니는 출ㆍ퇴근길은 시골길이다. 물론 잘 포장된 국도이지만 푸르고 울창한 초목들이 철마다 저마다의 모습을 하고 도로변에 도열하고 서서 지나가는 이들을 반겨주는, 군데군데 포트홀이 있어서 덜컹거리는 차를 타고 달리는 잿빛 길. 그런데 가끔 설치류나 고라니와 같은 다양한 포유류와 정확한 종을 알 수 없는 조류의 주검을 그 길 한가운데서 마주하기도 한다.

잠을 자듯 고꾸라져 도롯가에서 미동도 하지 않거나, 분리수거용 우유갑처럼 납작해진 몸에 더 이상 윤기가 없는 거친 털 뭉치들, 간혹 길 가운데 붉은 내장이나 핏자국이 남은 처참한 광경을 보면 절로 미간이 찌푸려지기도 한다. 동시에 인간으로 그들의 터전을 빼앗고 끝내 무고한 생명까지 앗아간 미안함이 밀려온다. 운전 중에 눈을 감고 묵념을 할 수는 없어서 아랫입술을 질끈 깨물고 보내는 짧은 애도. 직접 로드킬을 경험해본 적은 없지만 혹시 어디선가 무언가 갑자기 내 차로 뛰어들진 않을까 조마조마하며 이내 운전대를 고쳐 잡기도 한다.

로드킬(roadkill). 어학사전에서 찾아보니 '동물이 도로에 나왔다가 자동차 등에 치여 죽는 일' 또는 '도로에 나온 동물을 자동차 등으로 치어 죽이는 일'을 모두 의미하는 말이었다. 인간이 행하는 죽임과 동물이 당하는 죽음을 모두 아우른, '죽임'이자 '죽음'인 단어. 내가 이렇게 로드킬에서 개똥철학을 발견하는 공상을 하는 와중에도 같은 하늘 아래 어딘가에서 누군가는 태어나기도 하고 죽기도 할 텐데, 어떤 경계를 기점으로 생과 사가 추상적으로 분리된 개념인 줄 알고만 있다가 실상은 한 데 어우러져 공존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새삼 깨닫게 되었다.

차이가 있다면, 죽음 이후는 더 이상 가시 하거나 가청 할 수 없는 범위로 떠나버리니 우리가 인식하지 못하는 상태가 되어버리는 것. 분명 동시에 생방송되고 있지만, 내가 다이얼을 돌려 해당 주파수를 맞추지 않으면 들을 수 없는 서로 다른 라디오 방송처럼 죽은 자의 영혼은 다른 채널로 가버리는 게 아닐까 생각했다.

동물이든 사람이든, 심지어 내가 노숙하며 구걸하는 거지이든 부와 명예를 거머쥔 인기 연예인이든 같은 원리로 생명을 얻고 같은 이치로 죽음을 맞을 터. 우주적 관점에서는 물질이든 비물질이든 모든 것이 결국 그냥 다 우주의 먼지 같은 것인데. 지금 내가 겪는 힘들고 괴로운 일도 초연하게 넘겨 보자고 생각했다. 언제나 그랬듯, 다 지나갈 거니까. 생(生) 조차도.


<*이미지 출처 : PictPick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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