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lue wedding anniversary
어떤 결혼기념일
2017년 9월 30일. 바람은 선선하고 햇살은 뜨거웠던 어느 가을날 우리는 야외 결혼식을 올렸었다. 연애부터 결혼까지 불과 4개월밖에 걸리지 않은 초고속 결혼이었다. 뱃속에 딸아이를 품고서 입었던 웨딩드레스. 사실 결혼식 전날도 하혈할 정도로 내 컨디션은 좋지 않은 상태였다. 토요일 11시 식이었고 나는 금요일 오전까지 근무를 해야 했는데, 야외 결혼식이니만큼 식순이나 동선, 배경음악 등 모든 것을 신경 써서 구성해야 했기에 업무 중에도 결혼식 디테일을 고민하며 전전긍긍한 나와 달리 집에서 게임하며 천하태평인 남편과 결혼을 하니 많이 하며 부딪히기도 했다. 심지어 야외 결혼식을 하자고 고집한 쪽은 남편이었기 때문에.
흔히 말하는 '속도위반' 결혼이었지만 당시 부부 모두 삼십 대 초반의 직장인이었고 '열심히 잘 살겠다'는 말에 양가에서는 손주도 결혼도 감사하게도 기쁘게 받아들여주셨다. 처음 임신테스트기로 아이의 존재를 확인했던 날, 화장실 문 앞에서 나는 지금의 남편에게 큰절을 받았다. 고맙다며, 꼭 낳아서 잘 키워보자며. 막상 첫째를 낳고 참 많이 싸웠지만 힘든 일보다 좋았던 일이 더 많았기에 부부상담도 받으며 극복해갔다. 2020년에는 둘째까지 태어나 네 명이 된 우리 가족. 흔한 맞벌이 부부처럼 청소기를 누가 더 돌렸니, 밥을 누가 더 하니 하는 문제로 투닥거릴 때는 있었지만 나름대로 열심히 잘 살고 있다고 생각했다. 매년 결혼기념일에는 가족과 함께 가까운 데 놀러를 가든 회사에 꽃바구니를 보내든 나름 기념도 하면서.
올해 결혼기념일은 남편이 전날 야간근무를 하고 아침에 퇴근하는 비번이었던지라 근처에서 밥이나 간단히 한 끼 먹으려고 했는데, 날씨가 좋아서 그랬는지 남편이 에버랜드를 가자고 했다. 미리 연가를 쓴 나와 유치원과 어린이집을 자체 휴원한 큰아이, 작은아이 모두 들떠서 차를 타고 가는데, 남편이 졸렸는지 신나는 음악을 틀어달라며 블루투스가 연결돼 있는 본인 휴대폰을 나에게 넘겼다. 지니뮤직에서 신중히 선곡을 하고 있는데 갑자기 인스타 DM이 하나 왔다.
평소 남편 휴대폰을 들여다보거나 염탐하진 않는 편이라 그냥 넘기려는데, 아이디인지 실명인지는 모르겠으나 상대방이 나와 같은 이름이 아닌가. 물론 내가 흔하디 흔한 이름을 갖고 있긴 하지만 평소 나와 동명의 지인 이야기는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어서 무심결에 메시지를 눌렀고, 대화창으로 넘어가게 되었는데 이게 웬일. 한눈에 대충 보아도 난무하는 하트 이모티콘의 향연. 떨리는 마음으로 스크롤을 올리며 주고받은 대화들을 유심히 스캔하기 시작했다.
처음 시작은 그 여자가 올린 인스타 게시글(스토리)에 남편이 보낸 DM이었다. 박수를 치거나 엄지 척 이모티콘을(뭔지는 모르겠지만 예쁘고 멋진 사진이었을 것으로 추정) 보내고 상대방이 칭찬에 대한 감사인사를 하고 존댓말을 쓰며 밥은 먹었냐, 애들하고 어디 갔다 왔냐 일상을 공유하다 최근 말을 놓으며 가까워진 듯했다.
차 안에서 바뀌지 않는 노래, 굳어져가는 표정을 느꼈는지 나에게 뭐 하고 있냐고 묻는 남편에게 "내가 모르는 친구가 있었네?" 한마디 던지고 무거운 분위기로 도착한 에버랜드. 마음 같아선 집에 돌아가고 싶었지만 이미 신나 버린 아이들을 실망시키고 싶진 않았다. 내 이름을 부르며 쫓아오는데 신경질적으로 소리치며 "그 여자 부르는 거냐 나 부르는 거냐, 하필 이름도 똑같아 기분 나쁘게. 소름 끼치니까 이름 부르지 마!" 쏘아붙이고 마스크 속에 흐르는 눈물을 감추고 양손에 애들 손을 잡고 걸었다.
아니지. 이건 내가 실수한 거지. 왜 대화 내용을 눌러서 봐가지고. 어디서부터 잘못된 걸까. 내가 이 여자보다 못생기고 뚱뚱해서? 내 평소 말투가 이렇게 상냥하지 않아서? 꼬리에 꼬리를 무는 생각으로 심난했지만 원인이 나에게도 있다고 생각하며 화를 꾹 누르고 아이들과 해가 지도록 평소처럼 놀아주고 캄캄한 밤이 되어서야 돌아온 집. 피곤했지만 같이 애들 씻겨서 침대에 뉘이고 거실에 나와 있는데 잠을 못 자 예민해진 남편이 따라 나와 부부싸움 2차전을 치렀다.
ㅡ그래서, 내가 뭘 했는데? 통화를 했어, 만나길 했어?
ㅡ뭐가 그리 당당해? 그럼 그 여자 남편 번호 줘봐. 당신 와이프랑 내 남편이 평소 이러고 지내는데 기분 좋으냐고, 내가 예민한 거냐고. 당신은 내 열등감을 건드렸어. 나는 임신 후에 몸무게 앞자리가 두 번이나 바뀌었고 이 뚱뚱하고 못난 외모 때문에 콤플렉스가 있다고. 예쁜 여자 보고 물론 예쁘다고 할 수 있지. 근데 입장 바꿔 생각해봐. 당신이 초등학교밖에 안 나와 학벌 콤플렉스가 있는데 내가 석사ㆍ박사들 찾아다니며 어머 너무 똑똑하시네요 하고 다니면 기분이 어떨 거 같아? 당신한테는 그냥 해프닝일지 몰라도 나는 이거 평생 상처야.
격양된 말투에 거친 욕설을 섞어 래퍼처럼 다다다 내뱉는 내 말에 피로가 극에 달했는지 남편은 더 이상 대꾸하지 않고 들어가서 그대로 곯아떨어져버렸다. 아, 못난 외모에 못난 마음까지 난 정말 최악인 건가. 사랑한다 보고 싶다 하는 선 넘은 대화가 아니라 애들 소풍 도시락 예쁘게 싸는 법 같은 육아 팁이나 일상을 공유하는, 소위 말하는 남사친ㆍ여사친 같은 사이었는데. 다만 주고받는 이모티콘이 너무 다정했을 뿐.
남편은 대화 내용을 모두 지운 것 같았다. 그렇다고 해서 대화했던 일이 없는 일이 되는 것은 아니지만. 다음날 남편이 기분은 좀 괜찮아졌냐고 묻기에 "안 괜찮으면 어쩔 거야. 계속 같이 살 건데" 하고 또 퉁명스레 받아쳤다. 애교 없는 아내 모습에 외로움을 느꼈던 걸까. 남편이 원한 건 어쩌면 인정이 아니었을까 생각했다. 빈말일지라도 살가운 말을 많이 하고 가족들에게 잘하는 모습을 당연하다고만 여겼기에.
결혼 생활을 2인 3각에 비유한다면, 잠시 한쪽이 한 눈을 팔다가 혹은 돌부리에 걸려 넘어질 수도 있는 거라고 생각하기로 했다. 발목에 끈이 잘 묶였는지 다시 확인하고 무릎 한번 툭툭 털고 다시 일어나 가면 되는 거라고.
파란 가을 하늘이 너무 눈이 부셨던 날,
서슬 퍼런 칼날 같은 말들로
서로를 찔렀던 날,
마음에 지워지지 않을
시퍼런 멍이 들었던 날,
파란만장했던 5주년 결혼기념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