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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인 Mar 29. 2023

새벽 산책

활기찬 어둠과 상쾌한 차가움

그날 하루는 작은 기적과 함께 시작되었다.
내가 새벽에 잠에서 깨 화장실을 다녀오는 동안 누구도 인기척에 깨서 따라 나오지 않았으니까.
심지어 코까지 골며 깊은 잠이 든 우리 집 최씨들.
평소 같으면 나도 그 곁에 다시 파고들어 한두 시간 더 잠을 청했겠지만 그날따라 문득 걷고 싶은 기분이 들어 무작정 검정 트레이닝복과 패딩을 꺼내 대충 몸을 욱여넣고 양말을 꺼내 신고서 마스크와 모자를 챙겨 문을 나섰다.

공교롭게 온통 까만 착장을 하고 나와서는 동트기 전 짙은 어둠을 보호색 삼아 천변길을 따라 성큼성큼 새벽의 일부가 되어 걸었다. 차가웠지만 기분 좋게 상쾌한 새벽의 공기와 부지런히 천변도로를 오가는 자동차소리, 이따금씩 부는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들이 나를 반겨주었다. 마주 오는 사람이 혹여 본의 아니게 어둠 속에 그림자처럼 숨어있다 갑자기 모습을 드러내는 나를 보고 놀랄까 봐 조금 떨어진 거리에서도 내 존재를 알 수 있도록 휴대폰을 꺼내 음악을 틀었는데, 엔플라잉의 <옥탑방> 노래가 새벽의 설렘과 잘 어울려 몇 번 반복해서 들으며 걸었다.

다리를 몇 개나 지나쳤을까. 여섯 시가 넘어서자 어둠이 점점 푸르스름 해지고 동틀 무렵 새벽빛깔이 변하기 시작했다. 출근을 앞둔 몸이라 다시 발걸음을 돌려 집으로 향하는데 아쉬운 마음이 들었다. 한 시간도 채 되지 않던 짧은 산책이었지만 새카만 어둠 속에서 바라본 냇가에 비친 거리의 불빛들, 찬 새벽 공기의 촉감, 활기찬 천변의 소음들이 기분 좋은 잔상으로 남아 피곤했지만 기운 났던, 오랜만에 온전히 혼자여서 자유스러웠던, 작지만 소중했던 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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