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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제임스강 Oct 22. 2018

영어로 망하고 영어로 흥하다...

영어를 좋아해서 얻은 흥망성쇠 스토리


1990년대 후반. 꿈 많았던 대학시절


강원도에서의 27개월간의 군 복무를 마치고 다시 대학생의 자리로 돌아갔다. 대학 1, 2학년 때까지 너무 놀아서 학점이 거의 시력 수준이었기에 2학년 2학기 복학 후에는 모든 것을 전무하고 도서관에서만 살며 공부했다. 공대여서 그런지 매주마다 퀴즈를 본다. 과제하고 시험공부하느라 어떻게 시간이 지나는지 몰랐다. 그렇게 정신없이 별로 멋없는 캠퍼스 생활을 하다 보면 방학이 왔다. 그때마다 느꼈던 것은, '아 벌써 방학?' 신난다는 기분보다는 '시간이 언제 이렇게 빨리 지나갔었나'하고 놀란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3학년을 마치는 시점에 우연히 스쿨버스 안에서 누군가가 어학연수를 다녀와서는 수업시간에도 영어로 필기한다 카더라...라는 말을 들었다. 영어를 잘하고 싶었던 나였기에 어학연수라는 것에 대한 생각이 그때부터 조금씩 싹트기 시작했던 것 같다.


월부 책장사로 어학연수 준비를 하다


1년 휴학하고 캐나다로 어학연수를 가겠다고 부모님께 말씀드리니 그리 흔쾌히는 아니지만 모범생 스타일이었던 아들의 소원이니 허락을 해주셨다. 그러나 그 조건은 내가 학비를 마련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휴학하자마자 일자리를 찾아야 했다.


과외자리도 찾아서 저녁마다 일을 하고, 낮에는 웅진출판사 계열인 웅진미디어의 한 지부에서 영업 사원으로 일을 시작했다. 과외야 어렵지 않지만, 책을 파는 일은 나에겐 새로운 도전이었다. 사무실에는 나만 남자고 모두 30대 이상의 주부들이었다.


아침마다 제품 교육을 받았는데, 왜 이리 설레는지... 설렘! 왜 일까? 아마도 순수한 마음에 '이렇게 좋은 책을 팔면 돈을 많이 벌 수 있겠지'라는 기대가 있어서였지 않았을까 싶다. 그곳에 있는 모든 책들은 정말 내가 갖고 싶거나 조카들에게 소개하여주고 싶은 책들이 많았다.


드디어 어느 정도 교육을 마친 후 브로셔를 가방에 잔뜩 넣 책을 판매하러 나선다. 그러고 보니 내가 어렸을 때 큰 가방을 들고 다니며 집집마다 돌아다녔던 '책 아저씨' 일명 월부책 장사가 된 것이다. 다행히 그분들에 대한 좋은 이미지가 있었는지 부끄러운 것은 없었다. 그분들에게 산 책으로 그나마 책을 읽게 된 경험이 있고 그것이 허접하나마 글쓰기가 부담스럽지 않은 계기가 된 것 같기도 하다. 연애편지를 써서 아내 될 여인을 꼬셨고 성공했으니...


첫날 첫 경험을 잊을 수 없다. 가방에 브로셔를 잔뜩 넣고 좀 층수가 낮은 다주택이 있는 곳으로 무작정(!) 방문을 하러 올라간다. 그렇게 좋은 책으로 독서를 장려하는 일을 한다는 자부심은 어디로 가고 왜 이렇게 심장이 뛰는지 이해가 안 됐다. 그때 처음 안 것은 뭔가 두려운 일을 할 때는 발걸음이 무척이나 무거워진다는 사실이었다. 겨우 3층을 올라가는데 마치 한 쌀 한가마 지고 올라가는 것처럼 허벅지에 근육경련이 올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한 1, 2주 지나고 나니 이젠 15층 아파트도 전혀 힘들어하지 않는 나를 발견할 수 있었다. 당시는 복도형 아파트가 많아서 맨 위층에서 타고 내려오다 보면 현관문을 열고 이웃들과 담소를 나누는 엄마들이 많았다. 그런 인사하고 자료 드리고 간단히 설명하고 간다. 내가 봐도 기특했다. 이런 식으로 영업해서 약 3달 후에는 우수 영업사원으로 선발이 되어 제주도로 여행을 가는 리워드를 얻기도 했다.


1년을 휴학했지만 1월 부터 학비를 버느라 7월부터 캐나다 연수를 하기로 했다. 비용 절감을 위해서 유학원을 거치지 않고 캐나다 대사관에서 학교자료를 얻어서 학교 측에 팩스를 통해 직접 문의를 하고 입학 신청을 했다. 당시는 PC 통신이 막 시작한 시대인데 전화모뎀이라는 것으로 인터넷 팩스가 가능한 때였다.


이제 정들었던 사회생활 첫 직장 동료들인 아줌마들에게 작별을 고할 때가 왔다. 몇 개월 일 안 하고 연수를 떠나게 된 것에 좀 죄송한 마음이 들었다. 하지만 그분들의 반응은 예상과 다르게 칭찬일색이었다. "요즘 같은 때에 이렇게 고생해서 학비 마련하는 젊은이가 어딨누..." 거기 상무님, 전무님들도 대놓고(?) 칭찬을 하신다. 오, 내가 칭찬받을만한 일을 한 것인가? 다행이었다.


캐나다 어학연수 가서 눈물 흘리다


잠시 한국이랑 빠빠이를 하고 캐나다로 갔다. 밴쿠버에서도 1시간가량 비행기를 타고 더 들어가는 시골의 작은 컬리지였다. 한국인들이 없기를 바랐지만 이미 4명의 학생들이 있었다. 군대까지 갔다 온 사람으로서 낯선 캐나다 생활은 전혀 어렵지 않았다. 처음 1주일 정도 음식이 안 맞아서 화장실을 들락거린 것만 빼고는.


학교에서의 ESL 과정도 할만했다. 비록 영어로만 진행되고 친구들도 1명만 빼고 외국인들이었지만 6개의 레벨 중에 상위 레벨에 배치되어 수업을 했다. 물론 말하기 수준은 무척이나 낮았다. 처음 도착해서 영어로 답하는 나의 수준은 거의 중학교 1, 2학년 교과서 수준의 영어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래도 나의 조국에서 10년 가까이 공부한 사람인데. 아 한국의 영어교육이여...


선생님들도 좋고 친구들도 좋고 프로그램도 좋았다. 그런데 여름이라 밖으로 놀러 다니는 액티비티가 많았다. 카누를 타거나 윈드서핑을 하거나 주말엔 보트를 타고 작은 섬에 들어가서 1박 2일 캠핑도 했다. 이 얼마나 신나는 놀이들인가? 그런데 그것들은 내가 한국에서 상상했던 어학연수는 아니었던 것이다.


내가 1년이란 시간을 휴학하고, 6개월 동안 돈을 벌어서 캐나다로 온 이유는 영어실력을 무지하게 올리기 위해서였다. 그래서 인텐시브 코스(Intensive Course)를 선택하고 온 것인데, 수업시간에 놀이하며 수업을 하고 시도 때도 없이 놀러 다니고. 이게 뭔가? 내가 헛투자를 한 것인가? 내가 원했던 것은 사실 입에 단내가 나도록 말하게 하고 듣게 하고 공부(?)하게 해서 고급 수준의 영어를 구사하게 되는 것이었다. 그런데 그것과는 너무도 거리가 멀어 보였다.


갑자기 우울감이 몰려웠다. 얼굴에도 그것이 드러났는지, 홈스테이 부모님이 "Are you okay, James?", "What's wrong with you?" 하고 무척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걱정을 해주었다. 그래서 솔직한 마음으로 이유를 설명해드렸다. 안 되는 영어지만, 그때 썼던 단어들이, 취업, 큰 기업, 삼성, 현대 같은, 그런데, 많은 돈, 허비, 인텐시브... 등등.


후후.. 완전 토종 한국인 같은 생각으로 가득 찬 전형적인 복학생이었다. 하지만 환경을 바꿀 수 없으니 생각을 바꾸기로 결심했다. '영어란 교실에서 교과서만 가지고 공부하는 것보다는 생활 속에서 즐겁게 배우는 것이 진짜 영어실력을 키울 수 있다.'라는 생각을 나에게 주입시켰다. 물론 한국적인 영어교육 컨셉은 아니지만, 당시 벙어리 영어 같은 교육방식보다는 이곳 아메리칸 스타일의 교육방식을 믿어보자는 것이다. 결국 어학연수는 잘 마쳤고, 이 덕분에(?) 졸업도 되기 전에 꿈에 그리던 대기업에도 취업할 수 있었다.


인생의 복병 IMF


누가 인생을 아름답다고 했는가? H 그룹의 회사에 합격을 했는데 신입사원 연수가 계속 연기된다. IMF가 이제 사회생활을 시작하는 나에게도 그 세력을 뻗친 것이다. 결국 약 8개월 만에 소집 통보가 왔다. 졸업기념으로 선물 받은 양복을 꺼내 입고 경기도 이천의 한 호텔에 찾아갔다. 나와 같이 목이 빠져라 긋뉴스를 기다리는 수 백명의 사람들을 볼 수 있었다. 그러나 결과는 취업 취소. 약간의 위로금과 함께.


대학 졸업 후 정식 취업하여 받은 봉투가 취업 취소 위로금 봉투라니. 슬프지도 않았다. 이미 마음의 준비를 하고 영어교육 쪽으로 알바 같은 풀타임 일을 하고 있었다. 소수의 해고자들이 소송도 진행하겠다고 했지만 나는 미련 없이 포기각서를 쓰고 나와버렸다.


약 20년이 지난 지금 생각해 보면, 역시 20대의 패기는 무서운 것 같다. 그때의 심정은 한마디로, '내가 대기업 안 다닌다고 굶어 죽을 것 같냐?' 였다. 부모님을 비롯한 많은 분들이 안타까워했지만, 정작 나는 괘념치 않았다. 그리고 보여주고 싶었다. 내가 그리 약하지 않음을....


20대 첫 사업


취업 대기 중에 학습지 교사로 아르바이트를 했다. 그러면서 내 가슴에 박힌 한 단어가 있었다. "교육사업" 교육은 숱하게 많이 접했지만, 교육이라는 단어에 사업이라는 단어가 붙으니 어렵고 위험하고 딱딱하게만 느껴왔던 사업이라는 이미지가 훨씬 부드럽고 잰틀 하게 다가왔나 보다.


그래서 창업을 하기로 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순수하거나 순진하지 않으면 할 수 없는 생각이 바로 청년 창업이었던 것 같다. 영어동화책 읽기가 영어실력 형성에 매우 중요하다는 사실을 알고 학생들의 영어 레벨에 맞는 영어원서 및 오디오 카세트 및 CD를 방문 대여하는 사업이었다.


당시 영어동화책을 가정방문 대여하는 곳은 우리가 처음이었다. 이후 한글 동화책 방문 대여업체가 생겨서 큰 성공(?)을 향해 달려가기 시작했다. 그 일을 약 3년 반 정도 했다. 그간 1000 명에 가까운 학생들을 만나 상담하고 레벨테스트를 해주며 신나게 영어교육사업을 진행했다.


그 와중에 법인으로 전환하여 사업의 도약을 꿈꾸었으며 수동적인 영어 읽기만이 아닌 직접 말하고 행동하고 즐길 수 있는 방법을 찾다가 영어뮤지컬 교육을 하기로 결심을 했다. 뭐든지 마찬가지이지만 남들이 안 하는 새로운 아이디어를 찾아내는 일은 그리 어렵지 않은 것 같다. 그렇다. 영업, 고객을 만나고 판매를 하는 일이 가장 어려운 일이다.


정말 모든 방법을 다 동원하여 영어뮤지컬을 위한 준비를 했다. 원어민 강사, 뮤지컬 댄스교사, 연출, 승합차량 준비. 그리고 뮤지컬 교육을 위한 학생들 모집에 성공을 했다. 장소는 스포츠센터 GX룸. 교육열이 높은 지역이어서인지 학부모들의 관심은 좋았다. 그렇게 약 7개월 교육과 연습을 한 후에 드디어 인근 백화점 공연홀에서 공연을 하게 되었다.


뮤지컬 제목은 '그리스'. 매우 유명한 뮤지컬이면서, 후에 영화로도 나왔는데 영화배우 존 트라볼타가 주연을 하기도 했다. 다소 어려운 내용일 수 있지만 초, 중등 학생들은 무대의 주인공이 되는 훈련을 열심히 했고, 공연은 수백 명이 모인 가운데 성공적으로 마칠 수 있었다.


그렇게 성공을 했지만 역시 사업의 경험, 뒷심은 부족했다. 뮤지컬 2기 교육생으로 다시 지원하겠다는 학생들은 있었지만, 임대료는 오르고 지출보다 수입이 적다 보니 재정적인 부담의 무게는 무척이나 컸다. 결국 경영적인 부담을 안고 사회 초년생의 사업은 그렇게 무너지고 말았다. (이후 고시원을 전전하며 사업을 다시 일으키려고 몸 부림쳤던 외롭고 처참한 시간들은 여기에 기록하지 않으려 한다.)


하늘이 무너져도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이 있다는 말, 나의 경우는 사실로 확인되었다. 신용카드 5개로 단돈 1만 원도 인출할 수도 없는 그 흔한 레파토리의 드라마 속 이야기 같은 상황이 나에게 왔다. 상황 속에서 할 수 있었던 것은 학원에서 영어를 가르치는 일이었다. 영어 전공도 아니면서 왜 이리 영어 일만 생각했는지 나 스스로도 이해가 되지 않는다.


이력서를 출력할 프린터도 고장이 났고, 멀쩡했다고 하더라고 프린터 잉크를 살 돈도 없었다. 다행히 차에 기름이 남아서 친척집에 가서 이력서를 출력하고 일산으로 면접을 보러 갔다. 몰랐는데 나중에 보니 일산에서 큰 대형학원들 중에 하나였다.


부원장과 인터뷰를 하는데 그 절망의 시간에 어디서 긍정적인 에너지와 여유가 나왔는지 내가 보기에도 무슨 빽이 있는 것처럼 당당하게 임했다. 나중에 알았는데, 이력서에 적어 놓은 뮤지컬 총감독, 영어동화책 워크북 제작 등과 같은 내 스스로는 망했다고 생각했던 나의 영어교육 사업 이력이 다 경력으로 인정이 되었던 것 같았다. 참, 열심히 살면 어딘가에서는 인정을 받는 법인 것일까?


생전 처음 해보는 시강(시범 강의)을 아주 우수한 성적으로 통과해서 사업 시 한 번도 받아 보지 못했던 월급과 연봉을 받으며 늦깎이 학원 강사생활을 시작하게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업기간 동안 쌓였던 부채의 으자는 매월 큰 부담으로 다가왔다. 그래서 결국 점심시간에 점심을 굶으며 일을 하니 겨우 이자는 낼 수 있을 정도였다. 이후 고등학생 영어 과외 자리를 소개받은 후에는 가까스로 점심 사 먹을 수 있게 되었다.


불효자의 눈물


사업 확장기 때의 일이었다. 어머님께서 자식새끼 하나 장가보내시기 위해 쌈지 돈으로 기 천만 원을 모아 두셨는데, 사업을 너무 사랑했거나 너무 단순 무지했던 나는 그것을 사업자금으로 보태달라고 말씀드렸고 또 우리 어머니는 사랑하는 자식의 소원을 들어주셨다.


아, 그날을 잊지 못한다. 어머님이 송금을 하신 후에 사무실로 전화를 하셨다. '아들아, 반드시 반드시 잘 해내야 한다. 그거 니 결혼할 때 전세 집 장만에 보태려고 모아둔 거다...' 전화에서는 당당한 척, 걱정하시지 말라고, 감사하다고 전화를 끊었지만, 마침 직원들이 없는 시간이라 책상에 엎드려 뜨거운 눈물을 흘리지 않을 수 없었다. 그건 눈물이 아니다. 소리없는 통곡이 맞다. 그 쌈짓돈이 어떻게 모아진 것인 지를 이 못난 아들은 알고 있었기에...


빚이 하루아침에 사라지다


학원 강사생활을 하면서 그럭저럭 지낼 수는 있었지만, 억 대에 달하는 사업 빚을 해결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30대 총각이니 연예도 하고 장가도 가야 하는데 도무지 희망이 안 보였다. 그래서 내가 죽을 만큼 힘들 때마다 나의 절규를 들어주시던 유일한 그 분에게 밤마다 기도를 드렸던 것 같다. 그런데 그런데 연이율 20%가 넘는 신용카드 빚이 한 번에 사라지는 일이 발생했다.


그런 기적 같은 일은 누군가에게는 행운이지만 정직하게 말하자면 그런 일은 공짜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가족 중 한 사람의 큰 사랑과 결단을 통해 수표 한 장을 전달받았고 덕분에 그 악성 빚더미는 순간 사라지게 되었다. 나중에 알고 보니 갑작스러운 재산 증식의 행운이 있었는데 고생하는 내가 생각이 나서 가족과 상의 후 통 큰(?) 적선을 해주시었던 것이었다. 오, 이런 일이...




to be continued.......나중에 이어서... (여기까지 읽어 주신 분들께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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