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maum Sep 02. 2017

잘 보이고 싶어염

수업이 끝나면 쪼르르 앞으로 나갔다. 강의자료를 가방에 넣고 있던 선생님께 말했다. 저기, 선생님, 이번에 영화제에서 폴란드 영화를 봤는데 되게 좋았어요! 저기, 선생님, 이번에 폴란드 희곡을 읽었는데 그것도 좋았어요! 선생님은 들어주고 받아주었다. 그래? 나도 영화제 가고 싶었는데! 그래? 저번엔 대학로에서 폴란드 연극도 했었는데 못 봤니? 폴란드어 문법 시간이 끝난 후의 5분 동안 나는 선생님께 달라붙었다. 종알거리던 나는, 사실 이렇게 말하고 싶었다. 선생님, 나 선생님한테 잘 보이고 싶어염!


2학년 2학기에 <폴란드 문화사> 수업을 들었다. 시월 어느 날, 선생님은 이문재의 시 <시월>을 알려줬다. '아직도 푸른 것들은 그 속이 시린 시월'이란 구절을 한참 동안 들여다봤다. 수업 과제가 나왔다. 폴란드 현대 예술 포스터 전시회에 가서 감상문을 써올 것. 문화일보 갤러리를 찾아갔다. 머리가 뾰족한 구형으로 변해버린 농부의 포스터를 놀라 하며 들여다봤다. 2학년에 수강한 과목 중 가장 좋은 수업이었다.


4학년 1학기에는 <폴란드학 입문> 수업을 들었다. 새내기들로 가득 찬 강의실에서(재수강ㅠ) 선생님은 국경선만 표시된 유럽지도를 나눠준 후, 동유럽과 남부 유럽을 설명했다. 슬로베니아가 지젝의 나라라는 걸 알았고, 수도 루블리아나Ljubljna가 '사랑스러운, 사랑하는'(lovely)이란 뜻이란 걸 알았다. 생소한 나라들이 계속 나오자 한숨 쉬는 새내기들에게 선생님은 말했다. 우리나라는 세계 속에서 분명 변방의 나라라고. 그래서 얻을 수 있는 좋은 점은, 세상을 변방의 시각으로 볼 수 있는 거라고. 우리들은 같은 '변방인'이라는 의식을 갖고 이 나라들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고. 만약 우리가 주류의 시선으로만 세상을 보면, 우리가 변방인이 되는 의미가 하나도 없는 거라고. 4학년에 들은 수업을 통틀어 가장 인상적인 말이었다.


좋았다. 나는 선생님이 너무 좋았다. 수업 내내 눈을 맞추면서 모범생이 되고 싶었다. 그러나 어머나 이럴 수가 나는 공부가 세상에서 제일 싫었어요. 7단 변신쯤 가볍게 하는 폴란드어는 정말 싫었어요. 아니 그럼 왜 폴란드어과를 갔냐고요? 후회는 없지만 사실 점수 맞춰 들어간 과였어염! 5학년 때 수강한 선생님 과목은 <중급 폴란드어 문법>ㅠㅠㅠ이었다. 수업 중에 초열등생ㅠㅠㅠ으로 있다 보면 선생님께 잘 보이기는 그른 것 같았다. 그래서, 수업이 끝나면 쪼르르 앞으로 나갔다. 강의자료를 가방에 넣고 있던 선생님께 말했다. 선생님 이번에 제가 이것도 보고 저것도 보고요... 네 좋았어요... 으앙 그래요... 그렇게 종알거리며, 말하고 싶었다. 선생님 제가 공부는 못하는데요, 그래도 난 선생님이 너무 좋아요, 그래서 선생님한테 잘 보이고 싶어염!


시간이 흘렀다. 졸업식을 안 가고 졸업을 했다. 선생님께 연락을 드리지 못한 지 오래됐다. 오래전 이맘때는 선생님과 같이 꼬치구이를 먹었던 것 같은데. 선생님이 보고 싶을 때는 선생님 아지트를 주소창에 입력한다. 폴란드에서 일러스트레이션을 공부하신 선생님이 새로 기획하고 새로 번역한, 새 책들이 나와있다. 크라쿠프의 예술가 레지던시에 계시며 쓴 글도 재미있다. 정말 빼어나게 번역한, 폴란드 시들도 나와있다. 그렇게 페이지를 넘기고 넘기다가 손이 멎었다. 내가 학교에 다니던 어느 날의 기록.


모인 관객들은 조금은 순진하면서도 괴상한 질문들을 던졌다. 내가 환경영화제 관객과의 대화 통역 알바를 하게 된 것은, 상암이 집에서 멀지 않았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영화 일을 하고 있는 막내 하이에나와, 학교에서 내가 귀여워하고 있는 일탈학생이자 새내기 영화잡지기자 maum에게 잘 보이기 위해서였다.


'새내기 영화잡지기자'는 사실이 아니다. 당시 나는 공연 잡지의 객원기자였지. '일탈학생'은 사실인가?;;; 지질한 일탈을 한 학생이었지. 그러거나 말거나, 그런 건 아무 상관없다. 세상에 이럴 수가. 나는 나만 선생님께 잘 보이고 싶어 안달 난 줄 알았는데. 선생님도 나한테 잘 보이고 싶어 했던 적이 있었구나. 서로 잘 보이고 싶어 했었구나. 으앙으앙, 이런 느낌 너무 좋아. 흙흙 선생님. 선생님이 제 나이 또래만 됐어도 제가 도시락 싸 갖고 다니면서 쫓아다닐 텐데. 선생님은 품절녀가 되신 지 오래네영. 하지만 괜쟈나영. 조만간 연락드릴게영. 행복뿐 아니라, 애정도 성적순은 아닌가바염. 그리고 저는요, 여전히, 여전히 선생님께 잘 보이고 싶어염 :)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