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팩 덕분이었습니다.
7년 전 여름 싱가폴에 도착한 첫날 오후, 리틀 인디아 역에 내린 저는 쏟아지는 빗줄기를 초조하게 바라보며 거리를 걷고 있었습니다. 비가 문제가 아니었어요. 숙소를 안 잡았거든요-0-;; 하염없는 무대책 정신으로 일관하다 싱가폴에 도착해서야 숙소를 알아보기 시작한 것이지요. 그때야 알았어요. 싱가폴의 숙박비는 다른 나라에 비해 상당히 비싸다는 사실을. 호텔은 당연히 배제시켰고, 부랴부랴 인터넷으로 찾은 호스텔은 모두 예약이 차 있었습니다. 오, 주여... 날라리 신자는 언제나 이럴 때만 신을 찾지만, 그분은 언제나 그랬듯 아무 말씀도 없으셨지요. 다급히 인터넷을 뒤지다 이런 글귀를 발견. '리틀 인디아 근처에는 호스텔이 많다.' 오, 그래? 그럼 그쪽으로 가보지 뭐. 설마 길거리에서 자겠어? 30분 후, 무식하면 용감하다는 말을 되뇌며 머리를 톡톡 쳤습니다. 생전 처음 싱가폴 땅을 밟은 아둔한 여행자에게 리틀 인디아는 너무나 넓었고, 호스텔 간판은 가도 가도 보이지 않았어요. 비는 쏟아지고, 옷은 젖어가고, 날은 어두워지는, 절망의 삼위일체의 경지에 다다를 무렵... 백팩이 보였습니다. 메고 있는 사람을 통째로 가릴 만큼 큰 백팩이. 여행자다! 호스텔로 가고 있구나! 후다닥 달려갔습니다. 호스텔로 가나요? 어디에 호스텔이 있나요? 그렇게 케빈을 만났습니다. 대만에서 온 31살의 여행자였습니다.
케빈을 만난 건 정말로 다행이었습니다. 그는 4번째로 싱가폴을 방문하는 중이었거든요. 자신의 호스텔은 예약이 다 찼다고 말한 그는, 간절히 애원하는 눈빛을 던진 저를 내치지 않고 자신이 아는 호스텔들로 향하기 시작했어요. 만석, 만석, 만석, 그지 같은 방에서 비싸게 재워주겠다는 사기꾼, 다시 만석, 만석... 그러다 마지막이라 생각한 호스텔에서 복음이 전해졌습니다. 딱 한 자리 남았어요. 만세! 케빈이 묵을 호스텔 바로 옆이었습니다. 짐을 풀자마자 케빈의 호스텔로 찾아가 말했습니다. 정말 고마워요. 내일 점심 같이 먹어요. 내가 살게요. 근데... 나 여기 모르니까 맛있는 데만 안내해주세요-0-;;
다음날 낮 12시. 근처의 카레 가게로 케빈은 나를 데려갔습니다. 정말 맛있었던 그 카레 가게는 싱가폴에 머무는 동안 내 단골이 되었죠. 그날 저녁에 태국으로 갈 거라고 케빈은 말했습니다. 싱가폴은 태국으로 가기 위한 중간 기착지라고. 대만에는 태국으로 향하는 직항 노선이 없나? 있다 해도 싱가폴을 경유하는 티켓이 더 쌌을 수도 있겠지. 어제, 숙소를 찾아 헤매다 그의 백팩을 잠깐 들어 보고 그 무게에 경악한 내가, 안 무거워요? 라고 거의 소리쳤을 때 케빈은 나의 트렁크를 가리키며 이렇게 말했으니. 트렁크는 방문자visitor의 것이야. 백팩은 여행자traveler의 것이지. 난 여행자의 기분을 느끼고 싶은 거야. 이렇게 무거운 백팩은 나를 즐겁게 해. 순간적으로 지랄…이라 말하고 싶었지만 곧 정신을 차렸으니. 나 또한 그의 거대한 백팩 때문에 여행자다! 라고 생각했으니. 그래서 이렇게 도움을 받고 있으니. 케빈의 생각이 허영이라 하더라도 여행하는 동력이 된다면 좋은 거겠지. 그 마음이 태국으로 향하는 편안한 직항을 제외하고 굳이 싱가폴을 거치는 티켓을 사게 했을 수도 있겠지.
뭐 이렇게 진지한 생각에 젖어 있을 때 케빈이 말했습니다. 씨빠. 뭐라고요? 씨빠. 한국 친구들한테 배웠어. 호주에 2년 동안 워킹홀리데이를 갔었거든. 한국인들이 많더라고. 다른 말도 많이 배웠는데 까먹었어. 남자애들이 많이 썼어. 여자애들한테 그 말을 하니까 놀라면서 쓰지 말라 했지. 그래도 나쁜 말만 기억나네. 씨빠, 씨빠!
오… 저는 순간적으로 교정해주고 싶은 욕망에 휘말렸습니다. 케빈, [씨발]이라고 정확히 발음해야 해요. 눈을 부라리고 이는 악물고, 백 년 동안의 원한을 한꺼번에 푸는 심정으로 내뱉어야 해요. 그래야 씨발의 진심이 전해져요. 지금 당신이 말하는, 만다린어를 닮은 [씨빠]는 애교로밖에 들리지 않는다구요. 그렇게 말해주려다 다시 정신을 차렸습니다. 씨발의 진심은 하나가 아니니. 우리가 사실 화났을 때만 씨발거리는 건 아니니. 상하이국제영화제를 보러 상하이를 갔을 때, 우연히 들어간 극장 옆 호텔에서 레오 까락스 감독과 크리스토퍼 도일 촬영 감독을 보게 된 저는 멍하니 있다 벅찬 가슴으로 중얼거렸죠. 아… 씨발. 기쁠 때나 슬플 때나 화창할 때나 우울할 때나 씨발거리는 우리 모두에게는 우리 각자의 씨발이 있겠지요. 케빈도 케빈 나름의 씨발을 말하고 있는 것일 뿐이야. 교정해줄 필요는 없을 거야.
뭐 이렇게 오묘한 생각에 젖어 있을 때 케빈이 물었습니다. 근데, 한국 대학생들은 왜 그래? 뭐가요? 호주에서 워킹홀리데이를 하는 한국인들은 전부 대학생이었어. 한국은 원래 대학생들이 학교를 다니다가 중도에 어학연수를 하는 거야? 그건… 지금 한국에서 일종의 패션, 트렌드 같은 거예요. 대만은 어때요? 우린 좀 달라. 학업을 끝까지 마치고, 직장에 들어가 일을 하다 중도에 그만두고 여행을 해. 그러면서 정말 하고 싶은 일을 찾아. 그것이 우리의 트렌드지. 그럼 당신도? 그래, 난 은행에 다니다 일을 그만뒀어. 그만둔 후 호주를 다녀오고 지금도 계속 여행을 하고 있는 거야. 정말 하고 싶은 일을 찾았나요? 아직. 그러나 하나만은 확실해. 다시 은행에서는 일하고 싶지 않아.
그렇군요…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20대 초반에 읽은 책에 이런 구절이 있었지요. 어떤 말을 할 것인지,보다 더 중요한 것은 어떤 말을 하지 말아야 하는지,이다. 처세술 같아 고개를 갸웃거린 날들을 넘어 이제 저는 고개를 끄덕이는 것입니다. 말뿐이 아니지요. 어떤 일을 하고 싶지 않은지,를 아는 것은 어떤 일을 하고 싶은지,보다 더 중요할지도 모릅니다. 자신이 어떤 일을 싫어하고 어떤 일을 하지 말아야 하는지를 하나하나 알아가면서, 우리는 진정한 자신의 등고선을 그을 수 있는지도.
뭐 이렇게 기특한 생각에 젖어 있을 때 케빈이 소리쳤습니다. 아아, 여자친구 보고 싶다! 의아해서 물었습니다. 여자친구를 놔두고 혼자 여행을? 그녀는 지금 직장에 다니거든. 사귄 지 2년이 되었어. 호주에서 만났지. 내가 워킹홀리데이가 끝나갈 때 그녀는 막 대만에서 워킹홀리데이를 하러 호주로 왔어. 모르는 게 많은 그녀를 위해 생활하는 법을 하나하나 가르쳐 주면서 가까워졌어. 어느새 우리는 서로 좋아하게 되었지.
저는 웃었습니다. 모든 일이 그렇게 시작되지요. 같은 공간 같은 시간에 사람과 사람을 던져놓으면서 모든 일이 시작되지요. 순간의 눈짓과 찰나의 손잡음을 해석하려는 잠 못 이루는 밤도 그렇게, 불가능하다는 걸 알면서도 영원을 말하는 어리석어 황홀한 약속도 모두 그렇게. 만약에 시간이 모든 것을 헝클어놓더라도 분노할 필요는 없을 거예요. 그리움도 결핍이 전제된 사랑인 것을.
뭐 이렇게 멜랑꼴리한 생각에 젖어 있을 때 케빈이 시계를 봤습니다. 일어나 봐야겠어. 짐도 다시 싸고 갈 준비를 해야 해. 그래요… 태국에 가서 뭘 할 건가요? 마사지를 배울 거야. 네? 태국 마사지 말이야. 아직 잘 모르겠지만… 대만에서 마사지 가게를 열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있거든. 확실히 정해진 건 아무것도 없지만, 그러니까 가 보는 거야. 가서 배워보고 내가 잘할 수 있을 것 같으면 해보는 거야. 가게 이름은, 케빈의 태국 마사지!
고마웠어요, 케빈. 여행 잘 해요. 이메일 주소를 받고 케빈의 호스텔 앞에서 작별인사를 한 후 돌아가는 길, 문득 의문이 들었습니다. 마사지를 잘 배울 수 있을까? 자신에게 맞지 않는다는 걸 알면? 그렇다면… 그렇다면… 그렇다 할지라도 이렇게 말하기로 했습니다. 괜찮아요 케빈. 당신은 적어도 무엇을 하기 싫은지 명확히 깨달아 직장을 박차고 나왔잖아요. 호주에서 만나 지금까지 사귀고 있는, 사랑하는 짝꿍도 있잖아요. 무거운 백팩을 짊어지면서도 즐거움을 느낄 수 있다면, 생의 다음 여정이 험난하더라도 충분히 이겨낼 수 있는 능력이 있는 거예요. 그것만으로 충분해요, 케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