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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TV피플 May 18. 2016

인생은? 콜라보!

내 인생도 또 하나의 컬쳐,


모두가 ‘오리지널’이 되고 싶어한다. 자신의 인생의 항로를 끊임없이 점검하고, 타인과 익명성에 부딪히고, 새로운 환경을 만나면서도 내가 나답게 있어야 한다는 생각에는 변함이 없다. 누군가는 사회에서 선망하는 직업을 삼는 것으로 나답다 생각하고, 누군가는 벌이는 시원치 않으나 독창적인 색깔을 뿜어내는 예술가가 된다.



하지만, 재미있는 현상이 공통적으로 존재한다. 처음에 걸었던 길에서 벗어나지 않고 영원히 그 길의 호흡을 유지하려는 사람은 없다는 것이다. 전문직으로 대변되는 사람들은 경제적인 안정을 찾은 뒤, 자신만의 칼럼을 쓰거나, 업무가 끝나면 음악에 심취하곤 한다.


힙합씬에서 자신만의 스웨그(swag)에 심취해 가던 누군가는 대중의 인기와 유명 뮤지션과의 공동작업으로 부를 쌓아가며 또 다른 롤모델이 된다. 샐러리맨이라며 푸념에 찌들어 가던 청춘은 새로운 직장을 전전하며 몸값을 높여간다. 그냥 한 자리에 머물러 있는 누군가 역시 승진이나 새로운 경력을 추가하며 나답게 살고 있다 안위한다.



정말 ‘콜라보의 전성시대’다. 전혀 새로운 현상은 아니지만, 한 분야에 머물러 있어선 무언가 인생이 심심해 졌다. 이러한 기류의 저반에는 미디어만큼 대단한 일등공신이 없다. 인터넷이 일상이 되면서 대기업 회장 역시 만수르보단 한 수 아래지 않느냐는 농담이 심심치 않게 나오고, 가정에 충실하면 그럴듯하다 여기던 한 집의 가장은 GQ, Esquire, ARENA, LEON 등 남성잡지나 패션지, 여행전문잡지 등에서 또 다른 행보를 보이는 동종업계 사람들을 보며 ‘이대로 괜찮은가?’라는 자기 반성 속에 마음이 꽤나 두근거린다.



이러한 콜라보의 가장 큰 기능은 ‘기성세대와 집권세력의 힘을 상대적으로 만든다’는 점이다. 더 이상 돈이 있다고, 높은 지위를 가졌다고, 집안이 유명하다 해서 영원히 어깨에 힘주고 살 수는 없다는 말이다. 늘 몇 번에 걸쳐 반복하지만, 주어진 그룹 내에서 일정한 연륜과 지위, 연봉과 결정권을 확보한 것만으로 아랫 사람을 하대하며 우쭐대고, 자신의 기존 가치관념을 딱딱하게 굳혀가며 귀를 막고 사는 사람은 이제 꽤나 촌스러운 존재가 되어 버렸다. 본인들만 느끼지 못한 채 세월의 흐름에 역행할 뿐이다.


20-30대에 가졌던 아집을 50대가 되어서 각종 권력으로 확고한 듯 정당화하는 것이다. 나이가 들어서 촌스럽다는 게 아니다. 특정 그룹 내에서 자신의 입장을 대변하는 무기가 입장 자체의 신선하고 감칠맛 나는 LOGIC이 아니라, ‘조직에서 오래 버티거나 자신을 잃어가며 확보해 온 먼지 수북히 쌓인 자화상’이라는 점이 쓴웃음을 배가시킨다.

아이를 낳은 부모의 가장 큰 패러독스 또한 콜라보와 멀어져만 간다. 부모에게 피치 못하게 물려 받은 편협한 생각과 고질적인 악습, 권위에 대해서 ‘자신은 전혀 물려 받지 않고 꽤나 관대한 인간이 되었다’고 생각하는 점이다. 그리고 자식에게는 좋은 것만 주고, 나 또한 꽤나 프레쉬한 부모로서 행보를 이어간다고 착각하고 있다. 가정, 사회, 아주 개인적인 모임에서조차 이러한 편협함은 감출 수가 없다. 나 또한 그러한 굴레에서 크게 자유로울 순 없다. 하지만 이대로 뒷걸음치는 건 정답이 아닌 것만 같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떠한 인생을 살아야만 할까? 인생의 콜라보라는 건 과연 무엇일까? 나답게 사는 것이 과연 가능한 일인가? 결론부터 말하자면, 아직 희망은 있다. 우리는 살아 있기 때문이다. 뭐든지 해 볼 수 잇다.

‘인생의 노선을 하나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한 순간에 무너져 내리기 쉽다’는 걸 매일 같이 기억해야 한다. 그 인생의 길에서 장애물을 만났다. 잘 극복해서 어떻게든 지금까지 살아왔지만, 결정적인 한 방으로 넉다운 되어 쓸쓸히 인생을 마무리했다. 슬프지만 현실이다. 미디어는 물론 주변에서 끊임없이 접하고 있다.



우리는 객관적으로 상식을 가지고 살아가려 하지만, 주관을 갖고 싶어 한다. 주관을 갖는 것에만 머무르지 않고, 편협함에 물들고 싶어 하지 않는다. 그래서 ‘입장’이라는 게 존재해야 한다. O, X 의 담론에서 피곤해하기보단 빨리 빠져 나오고, 나의 ‘입장’이 무엇인지 말할 수 있어야 하고, 그 입장은 어떠한 ‘지향점’을 향하고 있는가를 생각해 봐야 한다.


남에게 보여주기 위해서 무언가를 하는 것만큼 쓸모 없는 것은 없다. 그래서 무의미한 반복 보고가 당연한 것이 되어 버린 회사는 절대 발전이 없다. 손에 이미 쥐고 있는 것을 지키기 위한 노력으로 모두가 혈안이 되어 있기 때문에, 누군가의 눈치를 보기만 한다. 창의적인 생각의 공유가 결여되어 있다. 조직의 리더의 기분에 맞추다 보니, 답답한 하루가 무작정 흘러간다.



모든 조직은 그러한 맹점을 갖고 있고, 이는 어떤 회사에 들어가더라도 마찬가지다. 공무원이 된다고 편한 게 아니며, 예술가가 된다고 자유로운 게 아니다. 개인 사업을 한다 해도 역시 큰 보람이 없다. 왜냐하면, 우리는 결국 부대끼며 살아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한 부대낌은 결국 정착하고 싶어하는 속성을 갖고 있고, 기존의 것을 지키고 싶어한다. 그게 오래 되면 유일한 살 길이 되는 것이고, 삶의 명제가 되는 것이다. 그러한 조직일수록 공허함은 빨리 찾아온다.

그래서, 우리는 인생의 다양한 분야에서 ‘콜라보를 시도해야 한다’. 삼성에서 프라다 폰을 출시하며 명품시장에 접근하고 브랜드 가치를 높인다. 음악에 다양한 감각와 영상이 접합을 시도하며, 프리템포, 누자베스, 자이언티와 같은 독창적인 뮤지션이 활동하고 있다. 평범한 밥집에서 째즈가 흘러나오고, 사내 로비에 놀이터를 설치해 창의성을 키우는 컨텐츠 회사가 기업문화를 주도하고 있다.



새로운 것은 신선하지만, 무작정 신선한 것보다 무릎을 탁 치게 만드는 영감 어린 기획이 마켓팅을 주도하고 있다. 우린 꽤나 이성적으로 살고 있는 것 같지만 그러한 이성의 시간을 넘어 무언가를 결정하는 순간에는, 감성과 직관이 자리한다. 아주 말랑말랑한 감성과 직관은 콜라보를 꿈꾸라고 외친다. 누구에게나.



여기서 콜라보의 딜레마가 등장한다. 어디까지 기존의 것을 유지하는 게 좋은 것인가? 나다운 아이덴티티가 상실되는 것은 아닐까? 괜히 오버하는 것처럼 보이지 않을까? 기존의 전문성을 치환해 버리는 게 아닐까? 이러한 고민은 사회는 물론 개인에게까지 변함없이 귀결된다.

하지만, 우리는 휘청거리지 말고 콜라보를 시도해야 한다. 그러한 것을 걱정하는 순간 무너져 내리기 때문이다. 기존의 것을 지키는 심리의 중심에는 두려움이 녹아 있다. 누군가는 두려울 때 기존의 것을 움켜쥐고, 누군가는 변화를 추구해서 그 흐름을 자연스러운 것으로 만든다. 인생의 흐름을 타는 것을 주저해서는 안 된다. (물론 언제 흐름을 타야 하는 지는 또 다른 주제가 된다.)



주변과 부딪히는 게 싫어서 늘 YES로 일관하는 사람은 남과의 다툼이 없지만, 자신의 발전은 커녕, 자신의 생각을 누군가에게 전하는 것 조차 하지 못한다. 일단 입 밖으로 내어보고, 행동으로 옮겨보는 순간, ‘예상치 못한 콜라보’가 시작된다는 믿음이 있어야 한다.

대중이 반응이 시원찮으면 어떠한가? 그걸로 콜라보의 방향성을 또 다르게 설정해 볼 수 있고, 한 가지 더 재밌는 일상이 추가될 수 있는 것이다. 주변의 반응이 두려우면 주변을 감지할 수 없고, 결국 교집합 자체가 삶에 없어지게 된다는 점을 잊어서는 안 된다.


억누르기 보단 발산하고, 화를 내기 보다는 유연하게 커뮤니케이션 해야 하는 시대에 살고 있다. 그래야 너와 내가 콜라보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재밌게 살 수 있기 때문이다. 어제 했던 걸 오늘은 다르게 할 수 있을 때 경험이 쌓이는 법이다. 내 생각이 절대적인 것이 아닌 것이 당연한 일상의 흐름이 되어야 한다.

한편, 우리는 미디어를 접하면서 너무 많은 과제를 부여 받고 있다. 그리고 그걸 콜라보라고 착각하며 살고 있다. 좋은 직장, 다양한 분야의 견문과 지식, 안정된 생활, 결혼, 주변과의 유쾌한 인간관계, 재테크, 새로운 취미의 개발, 남들에게 그럴 듯하게 보이기 위한 각종 처세술, 빠질 수 없다는 허울 아래의 소비적인 모임…



우리의 에너지는 지극히 한정되어 있는데, 모든 걸 잘 하려다 보니 이도 저도 안 되는 세상에 살고 있다. 내가 하려던 것이 있는데 시도조차 못하니 분노만 쌓이고, 다른 사람에게 맞추다 보니 할 말이 줄어 든다. 억눌리게 된다. 호흡이 가빠져만 간다. 탈출구가 없는 듯 착각하게 된다. 그건 콜라보가 아니다.



              그럼, 어쩌란 말인가?


                       미치도록,,


           나답게 오늘을 살고 싶은데…



결국, 주제는 원점으로 돌아간다. 내 흐름만 생각하면 된다. 억눌린 무언가를 아무렇지 않게 생각하고 담담히 자신의 ‘입장’을 피력해 본다. 그리고 그것이 편협한 주관이 되지 않게 ‘나만의 지향점’을 위해 찬찬히 뛰어 간다. 내가 오늘 마주치는 대내외적인 장애물의 심리적 부담을 적당히 수치화 시켜 보고, 그것을 뛰어 넘는 ‘콜라보’를 시도해 보는 것이다. (이건 정말 어려운 고도의 작업이라는 것을 미리 말해 둔다. 하지만 반복적인 심리적 훈련을 통해 얼마든지 가능한 일이다.) 매일매일 그렇게 살고 있으면 우리는 해질 무렵이 될 때, 조금은 더 행복해져 있을 것이고, 더 나다워져 있을 것이다.


딱, 세 가지만 기억하자. 오늘을 맞이하는 ‘입장’, 나만의 ‘지향점’, 그리고 지금 이 순간 새로운 바람을 불어 넣는 ‘콜라보’. 하는 일은 똑같을 지 모르지만, 이 세 가지 중 하나만 새롭게 인지해도 오늘 하루는 재미로 가득찰 수 있다. 막연한 생각이나 공상이라도 좋다. 그냥 새로운 생각과 행동으로 치환해 보는 것이다. 그리고 절대 맘 속에 부정적인 생각, 바뀔 수 없다는 생각, 허무하다는 생각을 쌓아두지 않는 것이다.

영화 ‘인셉션’에서처럼 림보에 빠져 한없이 후회로 가득찬 노인이 되어서는 안 된다. 그러기에 당신은 너무나도 소중한 존재이기 때문이다.


‘다섯 살의 당신’이 해맑게 웃으며 지금의 당신을 응원하고 있다.


‘여든 살의 당신’이 헐떡거리는 지금의 당신을 지긋이 응시하고 있다.


                  힘을 내자, 까짓것!

                        너와 나,,


                   콜라보’가 없이는..


세상에 이미 존재하는 색깔에 머무르고 만다.

<EN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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