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수 이랑의 노래로부터
'무섭게 일어나는 일', '신념이 무너지는 순간', '절망과 좌절'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눈물을 흘리며 돌아가', '우연히 만날 좋은 이야기'를 기다리며 다시 평범한 생을 살아낸다('신의 놀이').²
텔레비전과 신문에선 비극이 반복된다. 누군가의 슬픔이 건조하게 수치와 통계로 묘사된다. 다만 사람들은 여전히 내일의 날씨를 확인하고, 장을 보고, 출근을 하고, 다시 잠에 든다.
이랑의 세 장의 정규 앨범은 그 평범한 생의 안팎을 더듬는다. 「욘욘슨」(2012)은 맥북 내장 마이크로 녹음한 자기 방의 일기였다. 아직 세계와 충돌하기 전의 목소리, 상실의 무게보단 장난스러운 반복과 생에 대한 유쾌한 관찰이 자리하고 있다.
그 일기가 세계와 부딪힌 기록이 「신의 놀이」(2016)이고, 자기 바깥의 사람들에게로 시선을 옮긴 것이 「늑대가 나타났다」(2021)다. 이 궤적은 멜랑콜리를 따른다. 상실을 떠나보내지 못한 채 상실 곁에 머무르는 마음. 그 마음이 자기 안에만 가라앉지 않고, 타인의 상실과 가난과 떨리는 손을 감각하는 시선으로 변해가는 과정. 이 글도 그 궤적 혹은 과정을 따라간다.
신의 놀이. 신은 절대적인 질서나 그 숭고한 섭리를 상징한다.³ 그렇다면 '신'에 소유격 조사로 따라붙는 말은 '놀이'가 아니라 '계획'이어야 한다. 계획과 달리 놀이는 어떠한 생산적인 것, 필연적인 것, 영원한 것과는 거리가 멀다. 놀이는 '쓸모'가 없다.
'좋은 이야기로 신의 놀이를 하려고' 하는 그/녀⁴는 그래서 병적으로 무력하다('신의 놀이'). 사람은 신의 계획을 알 수도 없고, 이를 바꾸거나 그를 대신해 새로운 계획을 만들 수도 없다. 다만 흉내낼 뿐이다. 기껏해야 어떤 우연으로 찾아올 것만 같은, 좋은 이야기를 기다리는 놀이일 뿐이다. 그/녀의 무력함은 우리의 인간-됨 자체에 뿌리를 두고 있다. 이 상실의 감각을 이해하기 위해 프로이트의 구별을 빌려온다.
「슬픔과 멜랑콜리Trauer und Melancholie」에서 프로이트는 상실에 대한 인간의 두 가지 반응으로 슬픔과 멜랑콜리를 구별한다. 상실 앞에서 우리는 슬프다. 사람들은 그들이 상실한 '그를 위해 눈물을 흘리며'('신의 놀이') 애도한다.
애도란 상실을 인정하고 떠나보냄으로써 일상으로 돌아오는 과정이다. 애도가 끝나면 슬픔은 서서히 잊힌다. 그러나 어떤 상실은 애도할 수 없다. 너무나 큰 상실이어서 애도할 수 없을 때, 혹은 분명 무엇인가 잃었다는 감각은 있지만 무엇을 잃었는지 알 수 없어서 애도가 처음부터 불가능할 때. 슬픔은 사람의 마음을 잠식한다. 프로이트에 따르면 멜랑콜리는 그러한 상실과 하나 된 자아의 병리적 상태이다.
그/녀의 세계는 '여름엔 덥고 겨울엔 추울' 뿐 아니라, '어떤 날짜'의 '어떤 신문이든' 비극, 상실, 훼손으로 가득하다('좋은 소식, 나쁜 소식'). '우리는 행복을 알지 못한 채로', '저주받은 것처럼 늙어간다'('나는 왜 알아요').
그럼에도 '너를 보기 위해서라도' '우리는 일을 해야만 하는 사람'이기에('도쿄의 친구'), '무력감이나 공포심이 찾아오더라도' 울지 않고 '밖으로 나가 달리고 돈을 내고 땀을 흘리며', '일상이라는 이름 아래 먹고 마시고 잠을 자면서' 겨우 몸을 움직인다('세상 모든 사람들이 나를 미워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어떤 상실은 아무리 울고, 달리고, 밥을 먹고, 기도를 해도 애도되지 않는다. '아무런 약속도 되어 있지 않고, 어쩌면 오늘 이후로 다시 만날 리 없게 될' 사람과 사랑의 상실('환란의 세대') 앞에 그/녀의 이야기란 결국 '보잘것없고 쓰잘데기 없는 말'일 뿐이고('대화'), '너와 나의 거리는 여전히 그대로'인 채로, '결국 원하는 건 이루지 못한' 채로('그 아무런 길'), 일상은 고작 상실의 다른 말이 되었기 때문이다.
애도할 수 없는 상실 앞에 '중년의 나이에도' 그런 '절망과 좌절의 무게'는 달라지지 않을 것 같다('신의 놀이'). '어두운 방 안에 있어도 꽃이랑 나무'를 생각하는 일 말고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슬프게 화가 난다'). 그/녀는 신에게 묻는다. 애도하지도 못할 슬픔과 상실을 '나는 왜 알아야 하나요'('나는 왜 알아요').
신은 대답한다. '슬퍼하는 자에게 복이 있나니, 곧 위로를 받으라'('빛'). 그러나 그 약속은 멀리 있다. '큰소리로 울며', '누군가 듣고 찾아와 주기를 바라도', '아무도 찾으러 나오는 사람은 없다'('이야기 속으로'). 복음의 문장은 위로를 예언하지만, 지금 여기의 몸은 여전히 외롭다.
하찮고 외로운 그 인간-됨은 결국 스스로에게 날선 질문을 겨눈다. '왜 누군가는 항상 주목을 받고 왜 내 얘기는 너에게도 들리지 않는지', '내 어미 아비가 언젠가 죽어 사라지면 난 집도 절도 없는 독거인이 되는 건지' 같은, '평범한 사람의 일기장 속'을 가득 채운 질문들('평범한 사람')은 상실의 이유를 묻거나 슬픔을 치유하는 대신, 그/녀를 상실 그 자체에 침잠하게 만든다.
그/녀는 자살을 생각한다. 장래희망이 애초부터 '유령'이었던 사람('오늘 나는')에게, '우리가 먼저 죽게 되면', '일도 안 해도 되고', '돈도 없어도 되고', '헤어지지 않아도 되고', '편지도 안 써도 되고', '손목도 안 그어도 되고', '약도 한꺼번에 엄청 많이 안 먹어도 되는', '한꺼번에 싹 다 가버리는 멸망'은 '너무 좋고 깔끔한' 일이다('환란의 세대'). 밤마다 '죽고 싶은 걸까 아니면 살고 싶은 걸까'를 묻다가, '아이고 모르겠다, 그냥 잠만 좀 편하게 들면 좋겠다'고 중얼거린다('의식적으로 잠을 자야겠다').
그런데 이랑은 '환란의 세대'를 사랑 노래라고 말한다. '동시에 다 죽어버리자'는 것은, 뒤집어 읽으면 그 누구도 먼저 죽지 말라는 절규다. 멸망을 상상하는 것은 멸망을 원해서가 아니라, 사랑하는 사람들과 헤어지는 것이 죽을 만큼 괴롭기 때문이다. 멜랑콜리와 사랑은 여기서 같은 뿌리를 드러낸다. 상실이 견딜 수 없이 큰 까닭은 사랑이 그만큼 크기 때문이다. 애도할 수 없는 상실, 자아와 상실의 동화, 죽음에 대한 집착. 그러나 그/녀의 멜랑콜리는 단지 실패한 애도에 머물지 않는다.
「독일 비애극의 원천Ursprung des deutschen Trauerspiels」에서 벤야민은 멜랑콜리를 재의미화한다. 프로이트에게 멜랑콜리가 애도의 실패이자 병리적 증상이라면, 벤야민에게 있어서 멜랑콜리는 상실을 떠나보내지 못하기 때문에, 오히려 상실을 끝까지 응시하게 만드는 태도이다. 애도에 성공하면 상실은 역사 속으로 지나간다. 반대로 애도에 실패한 자는 상실을 떠나보내지 못한 채, 상실을 곁에 두고 산다. 벤야민에게 멜랑콜리는 그렇게 상실을 부재하는 현존으로 만드는 시선이다.
'다만 유령이 되고 싶다'('오늘 나는')고 말하는 그/녀는 살아 있는 사람들의 세계에서 비켜 있지만, 동시에 그 세계를 누구보다 사랑하는 사람이다. 그래서 죽는 대신 '서울 마포구 망원동에서 잠을 깨어난다'('오늘 나는').
반려 고양이의 밥을 챙기고, 아버지가 베란다에서 마늘을 까고, 어머니가 집을 치우는 소리를 듣는다('가족을 찾아서'). '엄마의 전화를 받지 않은 것', '아빠를 평생 용서하지 않은 것', '키우는 고양이를 세게 때렸던 것'을 언젠가 후회하게 될 날을 걱정한다('가족을 찾아서'). '떠난 사람들을 어떻게 하면 잊을 수 있을까'를 물으면서도('나는 왜 몰라요'), 사랑하는 사람이 자신을 생각할지도 모른다는 이유 하나로, '그렇다면 지금 당장 유령이 될 수는 없다'고 말한다('오늘 나는'). 애도되지 못한 상실은 멜랑콜리로 남아 괴롭지만, 그 멜랑콜리가 그/녀를 계속 살아 있게 만든다.
상실은 그렇게 되려 생의 의지가 된다. 상실과 화해하지도 못하고, 그렇다고 완전히 무너져 죽지도 못한 채, 그/녀는 죽음 대신 이야기를 택한다. '이 글도 쓰임이 있어야 한다, 쓰임이 있어야만 한다'고 중얼거리면서('오늘 나는'), 그/녀는 어쩌면 아무 쓰임도 없을지 모르는 글을 쓴다. 멜랑콜리는 상실과 함께 살아남은 자가, 세계를 계속해서 생각하고 사유할 수 있게 하는 힘이 된다.
나는 나를 이해하는 것만큼 나를 사랑해줄 수 있을까('나는 왜 몰라요'). 질문에 대한 답은 끝내 주어지지 않는다. 다만 '어제는 그랬고 오늘은 이렇고, 내일은 행복하기만 할 것'이다('어제는 그랬고 오늘은 이렇고 내일은'). 그러니 '이 일이 아니면 맥도날드 가서 햄버거도 사 먹지 못했을'지도 모르는 가난 속에서도, '아름답고 끼스럽고 깨끗하게 살아가는 것'이 가장 아름다운 일이라는 것을 그/녀는 알고 있다('오늘 나는').
여기서 이랑의 시선에 전환이 일어난다. 「신의 놀이」까지 자기 자신의 이야기에 집중했던 화자는, 「늑대가 나타났다」에서 자기 바깥의 사람들을 향해 몸을 돌린다. 그/녀는 '나 아니면 누가 이 일을 말할 수 있을까'라며 스스로에게 되묻고('어떤 이름을 가졌던 사람의 하루를 상상한다'), 어떤 이름을 가졌던 사람의 하루를 그려본다.
'빈 병을 유난히 오래 들여다보는' 사람, '사람들 사이사이에서 죽을 퍼 담는 떨리는 손', '커다란 소리에 놀라 갑자기 뛰기 시작하는 다리'('어떤 이름을 가졌던 사람의 하루를 상상한다'). 이름은 모른다. 다만 이름은 몰라도 이야기는 계속된다.
'자 이제 내가 너의 하루를 얘기해볼게'('박강아름'). 박강아름은 매일 아침 누군가를 재촉하며 눈을 뜨고, 입에 무언가를 문 채 '아 짜증나'를 내뱉으면서도 어딘가로 향하는 사람 혹은 엄마, 혹은 박강아름이다('박강아름'). 서른이 되고 마흔이 되어서도. '너의 삶도 너의 학교도 너의 결혼도, 너의 아이도 너의 영화도'('박강아름'). 자기 안의 상실을 응시하던 눈이, 이제는 자기 밖의 사람들이 살아내는 구체적인 삶에 닿으려 한다.
이 시선은 더 나아가 '내 친구들은 모두 가난합니다'('늑대가 나타났다')라는 선언에 이른다. '일하고 걱정하고 노동하고 슬피 울며 마음 깊이 웃지 못하는 예의 바른 사람들이 뛰기 시작했다'('늑대가 나타났다'). '우린 쓸모없는 사람들이 아니오, 너희가 먹는 빵을 만드는 사람'('늑대가 나타났다')이라는 외침은, '수치와 통계' 속의 건조한 슬픔에 맞서 훼손된 자들의 존엄을 공적인 자리로 끌어올린다.
이랑은 이 곡을 시위 현장에서 함께 따라 부를 수 있는 행진곡으로 만들고 싶었다고 말한 바 있다. 실비아 페데리치의 「캘리번과 마녀」에서 중세 농민 운동의 이미지를 빌려왔다는 것이다. 벤야민이 말한 멜랑콜리가 세계를 직시하는 태도라면, 이랑은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간다. 직시한 것을 말하고, 말한 것을 함께 부르게 만드는 것. 멜랑콜리가 연대의 언어가 되는 순간이다.
여기서 '빵'의 이미지가 겹쳐 읽힌다. '빵을 먹었어'에서 그/녀는 빵을 먹고, 남긴 빵을 그리고, 그린 빵을 걸어놓는다. '빵을 보러 모두들 찾아왔어 빵을 보며 이야기했어 빵을 보고 모두들 돌아갔어 빵은 얼마인가에 팔렸어'('빵을 먹었어').
그리고 돌아오는 길, '싸움이 잦은 길을 지나 몇 개인가의 빵집을 지나다가' 다시 빵을 사온다('빵을 먹었어'). '오늘 본 것 중에 가장 좋은 것이 좋다고 말할만한 것이 이 빵밖에 없어서'('빵을 먹었어'). 빵은 여기서 사적인 생존의 작은 증거다.
반면 '늑대가 나타났다'의 빵은 다르다. '이른 아침 가난한 여인이 굶어 죽은 자식의 시체를 안고 가난한 사람들의 동네를 울며 지나간다'('늑대가 나타났다'). '부자들이 좋은 빵을 전부 사버린 걸 알게 된 사람들이 막대기와 갈퀴를 들고 성문을 두드린다'('늑대가 나타났다').
여기서 빵은 '너희가 먹는 빵을 만드는 사람'('늑대가 나타났다')이라는 문장 속에서, 노동하는 자들의 공적인 존재 증명이 된다. '내 자식을 굶겨 죽일 수는 없소'('늑대가 나타났다').
한 끼 식사에서 출발한 빵이 공적 상징이 되었다가, 다시 누군가의 사적인 식탁으로 돌아오는 순환. 그 순환을 직시할 때, 가난은 더 이상 추상적인 구조가 아니라 '어떤 이름을 가졌던 사람'('어떤 이름을 가졌던 사람의 하루를 상상한다')의 구체적인 배고픔이 된다.
그/녀의 멜랑콜리는 그렇게 세계의 기울어진 자리를 계속해서 감각하는 마음이 된다. '나는 나를 이해하는 것만큼 나를 사랑해줄 수 있을까'('나는 왜 몰라요')라는 질문은 이제 '나'에게만 머물지 않는다. 그것은 나를 이해하는 만큼 타인의 상실과 폭력을 이해하려는 시도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장래희망이 유령'('오늘 나는')이었던 그/녀는 쉽게 사라지지 못한다. 아무것도 느끼지 않고 아무 말도 하지 않는 존재가 되고 싶었지만, '사랑하는 사람이 지금 나를 생각하고 있을지도 모른다'('오늘 나는')는 미약한 희망과, '나 아니면 누가 이 일을 말할 수 있을까'('어떤 이름을 가졌던 사람의 하루를 상상한다')라는 처절한 책임감 사이에서 살아서 말하길 택한다.
'잘 듣고 있어요'('잘 듣고 있어요'), '이게 어떤 쓰임이 있을지 의미가 있을지 모르는데 어떤 사람들은 즐거웠다 하고 기뻤다 하고 눈물 흘렸다 하고'('잘 듣고 있어요'). 그/녀에게 많은 사람들이 건네는 인사말은 '잘 듣고 있어요'('잘 듣고 있어요')였다.
날 만난 적 없어도, 만나지 않아도, 처음 만나도. 이랑이 부르는 이 문장은 단순한 인사가 아니다. 타인의 상실을 듣겠다는 약속, 애도의 한 형식이다. 그래서 그/녀는 되묻는다. '잘 듣고 있나요 어떤 시간에 어떤 순간에 왜 이 노래를 듣고 있나요'('잘 듣고 있어요').
그리고 답한다. '의미가 있는 이야기는 듣고 또 들려주고 싶어요 잘 듣고 있어요'('잘 듣고 있어요'). 이 문장은 청자에게로 되돌아온다. 이 곡의 뮤직비디오의 댓글란에는, 어떤 시간에, 어떤 순간에 이랑의 노래를 듣고 있는지를 써내려간 사람들의 사연이 끝없이 이어진다. 이랑의 멜랑콜리는 그렇게 일방적인 고백에 머물지 않고, 말하는 자와 듣는 자 사이에서 완성된다.
애도하지 못할 상실을 끌어안고도, 그 상실의 눈으로 빵과 가난, 떨리는 손과 무거운 어깨를 이야기하는 것. 그것이 유령이 되길 포기한 자에게 남겨진, '아름답고 끼스럽고 깨끗하게'('오늘 나는') 살아남는 방식이다. 아프고, 다르고, 가난하더라도, 어떻게든 아름답게 살아남으려는 것은 훼손된 자들이 훼손된 세계에서 살아 있음을 증명하는 유일한 방식이기에.
¹ 허연. 2016. 시집 「오십 미터」. 문학과지성사. 작가의 말 中.
² 작은 따옴표로 인용한 문장은 가수 이랑의 노래 가사 중 일부를 발췌한 것. 인용 문장 말미에 곡명을 명기함. 가사는 글의 흐름상 필요한 부분만 발췌·편집함.
³ 여기서의 '신'은 특정 종교의 신이라기보다 절대적 질서·계획의 은유로 사용됨. 사족으로, 필자는 필명에 어울리지 않게 종교를 갖고 있지 않음.
⁴ 보편적 인간으로 상정되는 근대적 정상-남성 주체에 대한 3인칭으로서의 '그'와 구별되어, 타자화된 3인칭으로서 '그녀'를 단순히 '그'에 편입하지 않고 '그/녀'로 표기함. 다만 이 글에서 '그/녀'는 이랑의 노래 속 화자이자 이랑 자신이며 동시에 그 노래를 듣는 사람이기도 하다. 이 셋을 의도적으로 구별하지 않는다.
- 미완성인 글이지만 발행함. '박강아름'과 '늑대가 나타났다'에서 나타나는 어머니성에 관한 페미니즘적 조명을 구체화하고자 함. 이후 수정 또는 새로운 글로 발행 예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