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미디어의 젠더 재현에 대해 (1)

현진건의 「운수 좋은 날」에 대한 이야기로 시작하며

by 김믿음


1. 운수 좋은 날이요?


근래에 「운수 좋은 날」의 김첨지가 가정폭력범이란 이야기가 화제가 됐다. 사실 당연한 말이다. 한국문학사에서 현진건의 위상이나 그의 문학이 가진 가치와 별개로 결국 그도 식민지 지식인 남성 계층으로서 당대 에피스테메로부터 자유롭지 않고, 마찬가지로 그의 서사가 재현하는 인물도 그 시대상을 반영할 수 밖에 없다.


김첨지는 가난한 인력거꾼이다. '조밥'도 못 먹어 굶는다. 갓난 아이를 병든 아내에게 맡기고 마니님, 양복쟁이, 부잣집 아씨가 첨지를 무례하게 대해도 별 군소리도 못하고 무거운 인력거를 몰고 뛴다. 그런 첨지는 아내를 때린다. 아픈 아내를 병원에 데려가지도 못할 형편이었으니, 정성껏 아내 곁에서 간호를 해도 모자를 판에 좁쌀 한 되로 겨우 지은 밥을 먹고 배가 아프다는 아내의 뺨을 때린다. 설렁탕을 먹고 싶다는 아내한테 입에 담을 수 없는 욕을 일삼는다.


하루는 운수가 좋아 삼십 원을 벌었다. 오늘은 일하러 가지 말란 아내의 말에, 마음 한켠에 오늘은 아내가 죽을 수 있다는 불안을 안고도 인력거를 몬다. 그리고 첨지는 술을 마시러 간다. 진탕 마신다. 제 정신이 아니다. 오늘 아내가 죽었다고 농담일 수 없는 농담도 한다. 취중에도 설렁탕을 사서 집에 갔지만, 첨지는 아내가 마중을 나오지 않는다고 고함을 친다. 무덤같은 침묵. 개똥이(아기 이름)의 젖 빠는 소리만 들린다. 죽은 아내를 보고도 누워만 있으면 어쩌냐며 아내를 발로 찬다. 말이 없다고 욕을 한다. 왜 날 바라보지 못하고 천장만 보고 있냐고 눈물을 흘린다.


설렁탕을 사다놓았는데 왜 먹지를 못하니, 왜 먹지를 못하니... 괴상하게도 오늘은! 운수가 좋더니만...


그렇게 이야기는 끝난다. 첨지는 못난 사람이다. 정확히는 아내에게 폭언과 가정폭력을 일삼는 남성 가부장 주체이다. 이제와서 첨지의 이야기가 화제가 된 것은, 김첨지의 폭력적인 남성상에 대한 비판적 시야를 한국 공교육이 충분히 다루고 있냐는 의문 때문이었다.


그런데 김첨지가 가정폭력범인 건 너무 자명한 사실이다. 다만 「운수 좋은 날」은 독자가 그 비극적인 결말을 예상할 수 있도록, 그래서 예상된 비극이 찾아왔을 때 독자가 슬픔과 동정의 정서를 '체험'할 수 있도록 만든다는 점에서 결말의 암시에 관한 문학적 장치들을 어떻게 배치하고 활용할 수 있는지 학습하기에 좋은 텍스트거니와, 김첨지가 그럼에도 아내를 사랑한단 인물이라는 점에서, 인물과 인간-됨의 다면성에 대한 고민을 하도록 돕는다는 점에서 훌륭한 작품이다. 별로 김첨지를 변호하고 싶진 않지만, 교육자료로서 「운수 좋은 날」은 이런 의미에서 변호하지 않을 수 없다.


사실 「운수 좋은 날」의 텍스트를 충실히 독해했다면 그 누구도 김첨지가 문제라는 점을 모르지 않는다. 문학을 배우는 중고등학생도 마찬가지로 생각할 것이다. 다만 젠더 의제에 대한 충분한 고민과 사고의 계기를 마련하는 일은 아무래도 한국 교육에 여전히 숙제로 남아있긴 할 것이고, 그 숙제는 「운수 좋은 날」이 아니라 좀 더 첨예하고 생각할 것이 많은 작품으로 다뤄야하지 않을까.



2. '아내'에게 시선을 돌려서


다만 「운수 좋은 날」에 대한 논의를 조금 더 이어가자면, 김첨지의 재현과 더불어 우린 김첨지의 아내에 대한 재현에 대해서도 이야기할 게 많다. 일제강점기의 한반도는 식민지 지배에 기인한 착취와 폭력의 시기였지만, 그와 동시에 근대화와 개혁개방의 시기이기도 했다. 식민지 근대화론을 긍정하는 얘기가 아니라(애시당초 관련한 담론을 다룰 역량이 되지도 못한다), 「운수 좋은 날」에서도 언급하는 '양복쟁이'와 같이 일제강점기는 사람들이 하나둘 정장과 같이 서구-근대화된 의복을 입고, 도로와 철도가 깔리고, 누군가는 자동차를 타고 다니며, 부잣집 자제들은 대학을 다니고, 한편으론 회사와 금융을 비롯한 근대적 자본-시장체계가 차근차근 도입되는 시기이기도 하다.


그러나 이런 근대적 문명의 혜택을 누리는 이들은 소수이다. 그보다 많은, 굶고 가난하고 병든 사람들이 있다. 선해하자면 현진건은 식민지 지식인 남성으로서, 「운수 좋은 날」에서 가난한 조선인 남성의 삶을 단순히 예의도 격식도 없는 인간의 삶이 아니라, 소시민들이 겪는 경제적 어려움과 힘겨운(?) 사랑에 관한 삶으로 나름대로 따뜻한 시선으로 재현하려고 노력한 것으로 보인다.


다만 '불쌍한 조선인 남성'의 재현을 위해 현진건은 '무해하고 순결한', '무력하고 가녀린' 아내와 갓난 아기의 이미지를 채택한다. 작중 이름도 없는 첨지의 아내는 첨지에게 '반항'하지 않는다. 자신을 때리고, 인력거 일로 번 돈을 술을 마시는 데 써버리고, 툭 하면 욕을 하는 첨지에게 싫은 소리 한 번 제대로 못한다. 그런 병약한 아내가 비참하게 죽음을 맞는다. 비극적인 조선인 가족의 삶을 다룬다는 점에서 일견 자연스럽지만, 한편으론 첨지의 아내는 다른 방식으로도 재현될 수 있다.


예를 들어보자.


① 첨지의 아내는 첨지에게 처음으로 화를 낸다. 아내가 이렇게 아픈데 술에 이렇게 취해 들어오는 게 맞냐고 묻는다. 첨지는 그간 자신이 저지른 잘못들에 당황해 말을 잇지 못한다. 오라질년이라는 욕을 몇 마디를 뱉을 뿐이었다. 아내는 아이를 데리고 도망친다. 그녀는 앞으로도 가난하고 아프고 병든 삶을 살 것이다. 그러나 더는 남편에게 맞지 않는다. 무시 당하지 않는다. 그녀는 자신의 딸만은 그런 삶을 살지 않게 할 거라고 다짐한다. 누군가에게 무시받거나, 돈이 없어서 굶어야 한다거나, 남자에게 맞거나, 원치 않는 결혼을 하게 되는 일. 우리 딸에게는 그런 일은 없게 할 것이다. 그녀의 닳디 닳은 집신이 끊어진다. 그럼에도 그녀는 달린다. 첨지는 바닥에 앉아 식은 설렁탕을 먹는다. 첨지가 오라질 년... 오라질 년... 하며 아내가 누어있던 이불에 얼굴을 비비며 운다.


② 첨지의 아내는 첨지가 인력거로 벌어 오는 돈을 족족 술을 마시는 데 쓰자 화가 난 나머지 아이를 데리고 친정으로 도망간다. 그녀는 어머니에게 아이를 맡기고 새로운 삶을 살기 위해 홀로 떠난다. 첨지는 사라진 아내를 찾아 헤맨다. 문턱에 놓인 설렁탕이 차게 식어간다.


③ 첨지의 아내는 병세가 점점 심해지자 착란을 보였다. 그녀의 젖을 먹는 아기가 자신의 영혼을 빼앗아 간다는 망상에 빠져 아기를 죽인다. 그녀는 피로 물든 아기의 시신과 이불을 한쪽에 치워두고 첨지를 기다린다. 첨지가 집에 오자 마치 이제 병이 나았다는 듯이 활기차게 마중을 나가 첨지를 집에 들인다. 첨지가 자랑스럽게 설렁탕을 건네자 그녀는 첨지의 목을 조른다. 뜨거운 설렁탕이 그녀에게 쏟아지지만 아랑곳하지 않고 목을 조른다. 첨지가 쓰러진다. 그녀가 쏟아진 설렁탕을 손으로 주워먹는다.


④ 첨지의 아내는 첨지가 건넨 설렁탕을 마다한다. 뭐 하나 제대로 먹지 못했을 그녀가 밥을 먹지 않자 첨지가 화를 내고는, 첨지가 설렁탕을 빼앗아 해장한답시고 게걸스럽게 먹는다. 첨지의 아내는 날이 갈 수록 병세가 괜찮아지고, 이상하게 살이 오른다. 건강해진다. 첨지는 문득 그녀를 의심한다. 이 오라질년이 바람이 났구나. 인력거를 몰다 손님을 길바닥에 내던지고 집으로 달려간다. 집 문 틈으로 돈 많고 잘생긴 부잣님 도련님이 보인다. 이전에 첨지가 분명 몇번 태워드린 손님이다. 그는 첨지가 느린 탓에 늦었다고 첨지를 때리고, 천한 것이라 무시하며 무례하게 대했지만, 인력거 일 한 번에 수십 원을 쥐어주는 사람인지라 첨지는 꾹 참고 인력거를 몰았었다. 첨지는 아내가 그 자와 행복하게 사랑을 나누는 모습을 보고 놀라 설렁탕을 떨어트린다. 첨지는 너무 화가 나지만 자신이 아내한테 모질게 굴었던 일들이 떠올라 아내의 불륜(?)을 뭐라 할 처지가 아니라는 마음에, 한편으론 그 자에게 아내를 빼앗겼다는 열등감에 못 이겨 그대로 미치광이처럼 울면서 거리로 뛰어나간다. 문턱에 쏟아진 설렁탕이 차게 식어간다.


⑤ 첨지의 아내는 맛있게 첨지가 건넨 설렁탕을 먹는다. 늘상 자신을 때리고 욕하는 남편이지만, 그녀는 첨지의 마음을 안다. 그녀는 첨지에게 고맙다고 말한다. 첨지는 괜히 눈물을 흘리며 미안하다고 말한다. 그녀는 괜찮다면서, 앞으로 잘 지내보자고 한다. 시간이 흘러 병세가 나아진 그녀는 장터에 나가 나물을 판다. 이제 막 걸음마를 뗀 아기가 귀엽게 걷는다. 주변 상인들이 아기에게 과자를 쥐어준다. 첨지가 손님을 태운 인력거를 몰고 장터를 지나간다. 첨지는 그녀를 바라보며 손님에게 말한다. 손님. 제가 사랑하는 제 아내입니다. 여기는 제 아들이고요. 손님이 잠시 내려 그녀에게 인사하고, 아들의 머리를 쓰담는다. 손님이 첨지의 아내가 팔던 나물을 전부 산다. 또 다른 운수 좋은 날이다. 여전히 낡고 가난한 집에서 먹는 밥이지만, 그녀가 차린 저녁 식사가 풍족하다. 그녀가 특별히 계란 반찬과 흰 쌀밥을 준비했다. 첨지가 맛있게 밥 한술을 뜨고는 아기에게는 계란 반찬을 크게 잘라 입에 넣어준다. 그리고 첨지가 남은 계란 반찬을 그녀에게 건넨다. 그녀는 다시 고생하는 당신이 먹어요, 라며 계란 반찬을 다시 건넨다. 둘의 실랑이가 사랑스럽다. 첨지는 숨겨둔 설렁탕을 건네며 같이 먹자고 한다.


예시를 들다보니 괜히 글이 길어졌지만, 각각의 예시들은 미디어가 여성을 재현하는 몇가지 전형적인 방식들을 따른 것이다. 이러한 각 재현방식들과 그에 대한 비판 및 발전은 다음 글에서 다뤄보고자 한다.


좌우지간, 다양한 재현 방식이 가능함에도 불구하고 현진건이 무력하고 병약한 여성-아내 이미지를 채택하고 재현하였다는 점은 ① 그것이 한편으로 선해하건대 남성 가부장으로부터 폭력을 경험하는 조선인 여성의 삶을 최소한 시혜적으로라도 조명하기 위한 것일지 ② 비극을 강조하는 문학적 장치로 활용하기 위해 '순결하고 병약한 여성의 죽음'을 하나의 수단으로 사용한 것일지 ③ 혹은 그 둘 모두에 해당하거나 ④ 나아가 다른 작품에서 재현되는 여성 이미지 등을 종합해볼 때 남성 작가로서 여성의 세계에 대한 그 인식의 한계를 드러내는 지점일지 고민하게 한다.


그렇다면 여성은 어떻게 재현되어야 하는가?


단순히 주로 강인하고 당당한 여성을 재현하는 것이 윤리적으로 정당하다는 말을 하려는 것은 아니다. 권장할만한 작업일 순 있지만, 이 질문에 대답하기 위해 그만큼이나 정치하게 검토해야할 문제들이 있다. 특히 한국 미디어가 시대적으로 남성과 여성을 어떻게 재현해왔는지, 그러한 재현이 전제하는 특유의 권력-지식의 구조 혹은 이데올로기는 무엇인지, 이러한 재현과 정상가족 시스템은 어떻게 맞물리는지, 나아가 남성과 여성의 이분법적 젠더 재현의 효과는 무엇인지 등을 고민하면서 다양한 젠더-섹슈얼리티의 가능성에 대해 고민해야 할 것이다.


3. 나가며


이를 위해 바르트의 신화론과 로레티스의 젠더 테크놀로지론을 검토하고, 몇 가지 대표적인 영화와 광고 매체 등의 사례를 살펴보고자 한다. 이와 더불어 한국 경제사 및 가족의 변천에 대한 논의를 추가로 다뤄볼까 고민하고 있다.


근데... 나 이제 곧 로3인데... 공부해야겠지?

형법 하러갑니다 안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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