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관#1
죽음. 인간뿐만 아니라, 모든 생명체가 겪는 일이다. 독자들은 죽음이 그저 당연한 사실인가? 저자는 죽음이 너무 두렵다. 나라는 사람이 이 세상에서 잊히는 것이 두려운 게 아니라, 죽음을 어떤 방식으로 맞이하든 간에 그에 준하는 고통을 넘어서야만 하기 때문이다. 숨을 조금만 참아도 괴롭고, 조그만 상처가 나도 따갑다. 입 안에 혓바늘이라도 나는 날에는, 반찬이나 뜨거운 국물을 먹을 수도 없다. 그렇다면 죽음의 고통은 도대체 얼마나 광대하단 말인가. 두려움에 압도돼 괜히 생명체의 설계 탓까지 해본다. 애초에 모든 생명이 고통 없이 편안하게 갈 수 있게 만들어졌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고.
죽음은 죽음대로 두렵지만, 또 다른 문제가 있다. 그것은 이런 생각을 하고 있는 나라는 존재의 기원이다. 나는 뭘까. 나는 왜 사는 걸까. 나는 어떻게 살아야 할까. 목적도 방향도 없는 내 삶은, 항상 무료하고 허무했다. 가족의 애틋함에도, 직장 동료의 장난에도, 길을 걷고 있는 노인에게도 '이 생명체는 왜 사는 걸까'하는 동정심만이 가득했다. 이것은 사실 나를 향한 동정심이었지만, 다른 사람에게 전이시킨 것이었다. 그만큼 내 머릿속엔 생명의 유래와 목적만이 간절했다.
그날도 여느 때와 같이, 방에 누워 허송세월을 보내고 있었다. 세상에 흥미를 느끼지 못하고 동공의 초점이 흐릿한 내게, 문득 예상치도 못한 깜짝 손님이 뿅 하고 나타났다.
'내가.. 한번 알아볼까..?'
(...)
'내가 한번 찾아볼까?!'
(...)
'내가 발견하는 거야!!'
이렇게 나를 찾는 여행이 시작됐다. 누군가에겐 '나는 나지, 뭐야'일 수 있지만, 나에게는 인생을 건, 가장 중요한 질문이었다. 여러 책을 읽으며 혼자 사색을 해왔다. 나만의 결론이니, 많은 독자들이 재미로 읽어줬으면 한다.
나는 도대체 왜 사는 걸까. 오랫동안 나를 괴롭혀온 주제다. 내 삶의 목적을 이해하기 위해, 선제적으로 인간이 왜 존재하는지 생각해 본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인간에겐 사는 이유가 없다. 대게는 번식의 본능을 얘기할 테지만, 그것 또한 지구와 함께 언젠간 사라질 것이다. 뿐만 아니라 인간은 지능을 가지고 있으므로, 다른 생물과는 차별되는, 특별한 존재며 우주의 중심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분명히 있을 것이다. 하지만 16세기에 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에 의해 이미 인간은 우주의 중심이 아니란 것이 밝혀졌다. 이렇게 존재론적 회의감에 빠진 나는 항상 우울했고 활력이 없었다. 모든 것이 무의미했기 때문이다.
몇 년을 비관적으로 살았다. 아무리 신나는 노래를 들어도 감흥이 일지 않았고, 어두운 노래에는 슬픔을 초월하여 포근하고 안락한 느낌까지 받았다. 그러던 어느 날 신기하게도 내가 가진 모든 슬픔이 사라졌다. 드디어 의문에 대한 깨달음을 얻은 것일까? 그건 아니었다. 여전히 나는 왜 사는지 티끌도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다. 단지 수년 동안 내가 가진 모든 우울을 소모(?)해, 더 이상 슬퍼할 것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일까? 이제는 이성적으로 접근하기 시작했다. 내가 사는 이 시점을 이해한다면, 조금의 실마리를 얻을 수 있을 것만 같았다. 그 첫 번째 방법은 역사를 공부하는 것이었다. 머나먼 과거부터 시작하면 흥미가 덜할 것 같아, 현재의 나와 가장 근접한 근현대사를 먼저 공부하기로 했다. 꽤나 두꺼운 책 여러 권을 읽었다. 하지만 크게 도움이 되지 않았다. 말 그대로 대한민국 현주소와 민주주의에 대한 이해가 약간 증가했을 뿐이었다.
역사는 단순한 사례에 불과한 것 같아, 근본적인 이유를 알기 위해 과학책을 보기 시작했다. 귀납법 보단 연역법을 선택한 것이다. `총, 균, 쇠', '제3의 침팬지', '이기적 유전자' 등을 읽었다. 이 책들은 꽤나 도움이 되었다. 간단히 정리하면, 빅뱅 이후 무기물만 존재했던 지구에서 우연히 유기물이 탄생했다(실제로 무기물만 들어있는 밀폐 공간에, 인위적인 번개, 풍수, 지진 등 자연 현상을 재현해 봤더니 유기물이 나타났다고 한다). 유기물이 모여 생명으로 재탄생 됐고, 그 생명들은 효율적인 번식을 위해 포식을 시작하며 진화했다. 변이를 통해 여러 종으로 분화됐고, 마침내 최초의 인간인 오스트랄로피테쿠스가 탄생하게 됐다. 그리고 호모 사피엔스를 통해 현대인이 된 것이다. 존재론적 과정에 대한 상당 부분이 이해됐으나, 이것이 존재 이유일 순 없었다.
다음으로, 물리학에 대한 책을 봤다. 세상은 무한했고, 양자는 나의 최소단위였다. 온 우주(양자도 포함된 개념)는 수학과 물리법칙의 지배를 받았다. 이제야 조금씩 이해가 되기 시작했다. 결국엔 무한한 시간과 공간 속에서 우연한 탄생을 통해 지금의 나라는 사람이 이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이었다. 나는 특별하지 않았고, 아무리 확대해도 볼 수 없는 우주의 아주 작은 일부였다. 나는 무의미했고, 아무런 영향을 끼칠 수도 없었다. 사는 이유 따위가 있을 수가 없으며, 난 그저 찰나일 뿐이었다.
(....)
나의 결론이 너무 매정할 수도 있다. 하지만 물리법칙은 우리의 간절함에 눈길조차 주지 않는다. 그저 묵묵히 흐를 뿐이다. 그 무엇의 예외도 없이.
이렇게 나의 존재 기원에 대해 정리를 끝내게 됐다. 꽤나 괜찮은 결론이라 생각한다. 개인적으로 만족스럽기까지 하다. 공부한 보람이 느껴진다. 그렇다면 이제 우연이라는 나의 운명을 받아들여, 의문을 품지 않고 그냥저냥 살면 될까? 그렇지 않다! 이 결론을 통해 연쇄되는 질문이 있다. 그것은 바로 '그렇다면 어떻게 살 것인가'다. 내 인생은 우주에겐 아무 의미가 없지만, 나에겐 전부다. 보잘것없는 나의 간절한 모든 것이다.
남들보다 부지런히 살아볼까? 꿈을 향해 달려볼까? 어려운 사람들을 위해 봉사해 볼까? 과연 어떻게 사는 것이 가장 옳을까. 그 힌트를 플라톤에게서 얻었다.
플라톤의 이데아론을 들어봤는가. 천천히 차근차근 설명해 보겠다.
1. 이데아는 현상 세계 밖의 세상이며, 모든 사물의 원인이자 본질이다.
예를 들자면 반지름이 2인 동그란 물체의 넓이는 4π고, 반지름이 3일 경우에는 9π라고 할 때, 이데아는 '원의 넓이는 반지름 제곱에 비례한다'가 되겠다.
2. 현상 세계에서 모든 것들은 낡고 사라지는 것에 반해, 이데아는 시간이 흘러도 그 모습을 변치 않는다.
동그란 물체는 외력에 의해 크기가 변하거나 사라질 수 있지만, 원의 넓이가 반지름 제곱에 비례한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3. 이데아를 인간의 이성으로 알 수 있다고 해서 이데아가 인간 내에 있는 것이 아니다.
인간이 수학 법칙을 알기 전부터, 원의 넓이는 반지름 제곱 값이었다. 인간이 사라지더라도, 이 본질은 변하지 않는다.
4. 현상 세계의 모든 사물은 이데아의 일부를 가지며, 이데아와 일치하지는 않는다.
인간은 저마다 반지름이 다른 둥그란 물체와 같다. 이데아의 법칙에 철저히 지배되지만, 이데아 그 자체일 순 없다.
조금 더 직관적인 예를 들어보겠다. 이데아를 염색체라고 생각해 보자. 우리는 정자와 난자가 수정되는 순간 23쌍의 염색체가 결정된다. 이 염색체는 나의 설계도와 같고, 이 글을 읽고 있는 나보다 본질적인 나에 더 가깝다. 내가 이성적으로 생각할 수 있다고 해서, 내가 나의 주인이라고 착각하기 쉽다. 위 4번에 적혀있듯이 이 세상은 이데아의 일부이며, 염색체를 지나서 나라는 사람을 인지하기까지 진리와 멀어졌으면 멀어졌지, 더 가까워질 순 없다. 요컨대 새로운 가지를 뻗으면 뻗을수록 본질적인 나와 멀어질 수밖에 없다는 말이다. 마치 우리의 민낯이 있지만, 사회생활을 할 땐 나라는 사람과 좀처럼 다른 모습을 보이는 것처럼 말이다.
우리에겐 저마다 다른 이데아를 갖고 있다. 나는 인생을 각자 자신의 이데아를 찾는 과정이라고 생각한다. 자기만의 아름다운 모습들이 있다. 하지만 뜬구름 잡는 소리로 들릴 것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당장 먹고살 걱정을 하며, 어느 정도 여유가 있는 사람은 명예와 권력을 찾는다. 바쁘디 바쁜 현대사회에서 이해하기도 힘든 이데아 타령이라니. 가볍게 무시하기 딱 좋은 말이다.
하지만 이전에 말했듯이, 우리의 인생은 찰나에 불과하며 아무런 의미가 없다. 돈과 명예를 따르기엔 기회비용이 너무나도 크다. 자신의 본질을 느껴보라. 이것이 인생을 사는 방법이다. 이보다 좋을 순 없다.
이데아의 존재 범위는 어디까지일까? 지금까지 설명한 인간에게만 국한될까? 천만의 말씀, 만만의 콩떡이다. 길을 걷다가 무심코 걷어찰 수 있는 작은 돌멩이를 포함하여, 모든 물체에 존재한다. 만물을 넘어, 눈으로 볼 수 없는 자연환경이 상호작용하는 질서, 우주를 지배하는 수학ㆍ물리 법칙에도 존재한다. 이데아는 온 우주에 존재하며, 이성을 가지지 않은 창조주일 수도 있다.
자기만의 이데아가 있다고 하니, 약간은 설레고 기대되지 않는가? 나의 이데아란 뭘까? 어떤 모습일까? 하지만 안타깝게도 이데아를 한마디로 정의하기란 불가능하다. 이데아는 이상이기에, 인간은 자신의 이데아라 할지라도 결코 완벽하게 이해할 수가 없다. 인간의 머리에 어떻게 온 우주를 담을 수 있겠는가.
좋다. 백번 이해해서 나의 이데아를 알 수 없다고 치자, 그렇다면 도대체 뭐 어쩌란 말인가?
이제부터 각자의 이데아를 찾아 떠나보자. 이전 화에서 말했듯이, 우리는 살아가면서 이데아와 조금씩 멀어지고 있다. 주변에 함정들이 너무 많기 때문이다. 우리는 남들 시선으로 보기에 남부럽지 않게 살아야 하므로, 좋은 직장을 얻어야 하고 잘생기고 예쁜 배우자를 만나야 한다. 돈이 많으면 장땡이고, SNS에는 아닌 척하며 자랑을 해야 한다. 우리의 모습들을 헤치는 것들이지만 이런 요소들은 매우 매혹적이어서, 좀처럼 배기기 힘들다. 우리 몸을 해치는 달콤한 음식을 먹는 것과 같다. 쇼윈도 부부라는 말까지 있지 않은가.
그렇다면 이데아를 어떻게 알 수 있을까. 진리는 단순하고 힌트는 생각보다 멀리 있지 않다. 바로 나 자신을 생각하면 된다. 우리는 이데아의 결과물 중 하나다. 이데아를 토대로 설계가 되어 있기 때문에, 우리에겐 이데아의 작은 숨결이 살아있다. 일상생활을 하면서 내 마음속 작은 목소리에 집중해 보라. 내가 무엇을 할 때 행복감을 느끼는지. 여기서 한 가지 중요한 사실을 강조하고 싶다. 나를 행복하게 만드는 무언가가 사회적으로 '쓸모'가 없더라도, 나의 이데아임을 인정하고 받아 들어야 한다. 나의 경우로 예를 들자면, 나는 현재 심리학과 대학원에 갈 준비를 하고 있다. 하지만 내 직업과 심리학은 전혀 연관이 없다. 앞으로 어떤 쓸모가 있을지도 모르는 심리학과를 굳이 비용을 지불하고, 시간을 투자하고, 에너지를 쓰면서까지 배우려고 하는 것이다. 왜냐? 나라는 사람이 심리학을 배우고 싶고, 공부할 때 행복감을 느끼기 때문이다. 어떠한 사회적 보상을 바라고 하는 것이 아니다. 이것이 나의 이데아에 가까운 모습 중 하나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인생을 살면서 이데아의 숨결을 놓치지 않는 것이다.
물론 누군가에겐 전혀 중요하지 않을 수 있다. 나 역시 현실적인 감각을 살리려면 얼마든지 일깨울 수 있다. 돈을 많이 벌고, 좋은 아파트를 사고, 승진을 하고 싶다. 하지만 우리의 인생은 짧고, 순식간에 생명의 기로에 서게 될 것이다. 이런 당신에게 물어보겠다. 운명을 다 하는 순간, 자기 자신을 얼마나 소중히 여겼는지가 보람찰까, 아니면 좋은 집, 비싼 차, 사회적 대우를 받은 지난날이 더욱 보람찰까.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나에게는 무조건 전자다. 인생 전체를 봤을 때 가장 중요한 것은 나 자신에 대한 이해다. 나 자신을 정말 소중히 여기자.
우리는 인생이라는 소모품을 매초, 매분, 매시간 사용하고 있다. 머지않아 금방 늙고 병들어 생사의 기로에 서게 될 것이다. 그러니 이 순간을 소중히 여기자. 그렇다고 자서전에 등장하는 위인들처럼 순간순간을 치열하게 살자는 것은 아니다. 이게 가능하다면 세상 모든 사람들이 다 공부만 하게? 그렇지 않다. 그저 지금 이 순간과 여기라는 장소를 느끼자.
나의 이데아를 설명하면서 심리학과 대학원을 예로 들었지만, 다른 관심거리도 많다. 첫째로, 어느 날 문득 한국어 능력에 대한 흥미가 생겼다(나는 재외동포가 아니라 100% 토종 한국인이다). 영어 회화에 관심이 있던 나는, 영어를 10년 정도 독학했다. 외국인과 기본적이 대화는 가능한 수준이 됐지만, 생각보다 큰 재밋거리가 되진 않았다. 오히려 두 개의 언어를 할 수 있는 것보다 한국어 하나를 심도 있게 구사하는 것이 훨씬 매력적으로 보였다. 한국에서 가장 논리적인 글이라는 수능 비문학 기출문제집을 구매해 시간 구애 없이 지문을 읽었다. 둘째로, 수학과 물리 법칙을 공부하고 있다. 나는 항상 이 세상에 대한 이해에 목말라 있다. 수학은 우주의 언어이며, 물리는 흥미롭고 알아두면 실생활에 요긴하게 쓰인다고 생각한다. 셋째로, 피아노를 배워보려 한다. 음악은 정말 오묘하고 신비로운 것 같다. 말로는 표현하기 어려운 감정을, 연주를 통해 나타낼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남자는 늙을수록 눈물이 많아진다고 하지 않았던가. 지금 배워두면 10년 뒤, 내 삶의 아주 중요한 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으리라 확신한다.
위 내용들은 전부 내 직업과 전혀 연관이 없는 취미들이다. 어느 직장인이 쓸데없이 비문학 지문을 풀고 수학 공부를 하겠는가. 더군다나 나는 내 나이에 비해, 사회적 지위가 낮은 편이다. 나보다 어린 후배들이 더욱 치열하게 승진을 준비하고, 자격증을 취득한다. 머지않아 나의 상사가 될 후배들이다. 뿐만 아니라 이미 나보다 나이 어린 상사도 한 트럭이다. 주위에서는 나를 안타깝게 보는 면도 없지 않다.
"능력은 좋은데.. 자네도 승진 준비를 좀 해보지 그런가.." 직속 상사가 말한다.
하지만 나는 아무리 생각해도, 승진을 준비할 시간에 책을 더 읽고, 나 자신과 세상에 대한 이해를 넓히는 것에 훨씬 큰 행복을 느낀다.
그렇다고 내가 현실감각이 떨어지는 것은 아니다. 나 역시 나보다 어린 상사를 대할 때, 내 중심을 꽉 잡지 않으면 정신력이 흔들릴 때도 있다. 나도 느끼고 있다. 승진을 해서 나쁠 게 없다. 하지만 온몸이 요동치는 것을 어떡하겠는가.
'책 읽자! 벌써 설레는 걸?'
'비문학 보자! 이번엔 어떤 지문이 있을까?'
'수학 법칙을 이해하고 싶어! 이 세상과 더욱 가까워지는 기분이야!'
'오늘 많이 힘들었지? 내 심정을 음악소리로 표현하고 싶어!'
이제 나는, 내 이데아를 거부할 수 없는 몸이 돼버린 듯하다. 좀처럼 무시할 수가 없다. 무엇보다 너무 행복하다.
이데아를 따르기 위해선 용기가 필요하다. 그럴 수밖에 없겠다. 우리 각자의 이데아는 모두 다른 모습이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사회적으로 남들과 다르다는 것을 열린 마음으로 용납하지 않는다.
이 세상에는 '잘 산다'라는 것을 정형화된 패턴이 있는 것처럼 말한다. 공부를 잘하고, 취업이 잘 되는 대학교를 가고, 높은 연봉을 받는 직장을 구하고, 집안 좋은 사람을 만나 결혼을 하고, 빠르지도 늦지도 않은 시기에 건강한 아기를 낳고, 아이도 사회적으로 성공을 하고, 노후 준비도 남부럽지 않아야 하는 등.. 물론 누군가에겐 이 패턴 자체가 이데아에 가까울 수 있다. 하지만 대부분은 그렇지 않을 것이다.
인생을 두 번 사는 사람은 없다. 모두가 공평하게 딱 한 번이다. 우리가 살고 있는 지금 이 인생이 본경기이자 실전이란 말이다. 이런 조건 속에서 이데아를 찾아 떠난다는 건 쉽지만은 않다. 나 같은 경우처럼 사회적으로 인정을 덜 받을 수 있고, 승진이 느릴 수 있고, 봉급을 덜 받을 수도 있다(혹시 오해의 소지가 있을까 봐 덧붙이자면, 나는 금방 그만 둘 회사에 다니면서 이런 허세를 부리는 것이 아니다. 지금 직장에서 평생 근무할 생각이다). 나라고 이런 환경이 전혀 개의치 않은 것은 아니다. 사람마다 파훼법은 다르겠지만, 나는 이런 식으로 자기 위안을 삼는다. 사회가 나를 인정하지 않아도 내가 나를 인정하면 되고, 승진을 빨리 해도 윗사람은 언제나 있고, 봉급이 적으면 버는 만큼 맞춰 살면 된다.
어렵게 이데아대로 살기로 마음먹었다손 치더라도, 다음 난관이 기다리고 있다. '과연 내가 잘할 수 있을까?' '괜히 이데아니 뭐니 찾으러 떠났다가, 나 자신도 못 찾고, 사회적으로도 인정을 못 받으면 어떡하지?' 이 점에 대해서는 두 가지를 말해주고 싶다. 첫째, 이 세상에 위험부담이 없는 선택이란 없다. 애초에 위험부담이 없는 일들은 모든 사람들이 고민 없이 선택을 하며 살고 있다. 내가 말하고 싶은 것은, 어차피 언젠가는 선택의 기로에 반드시 서게 돼 있다는 것이다. 이데아를 찾는 일만이 위험한 것은 아니다. 둘째, 독자들에게 묻고 싶다. 인생을 살면서 선택의 순간에, 독자적으로 고민하고 선택한 경우가 얼마나 되는지. 예를 들자면 무궁무진하다. 어떤 공부 방식을 선택할 것인지, 어떤 학과에 진학할 것인지, 회사생활을 어떻게 할 것인지, 결혼식을 어떻게 진행할 것인지 등 남의 말만 듣고 따르는 것이 자기 자신에게 부끄럽고 미안하지 않은가. 내 삶에 내가 주체가 되는 것 자체에 의미가 있다.
물론 일반적인 선택을 뒤로하고, 미숙한 나의 판단력을 인해 내 선택이 실패할 수도 있다. 내 선택이 얼마든지 틀릴 수 있다. 하지만 여기서 한 가지 분명히 명심해야 하는 것이 있다. 바로 자기 합리화와 이데아를 찾는 과정을 구분해야 한다는 것이다. 마냥 '내 선택이니까 후회는 없어'하고 쉽게 넘겨선 안된다. 어떤 점이 잘못됐는지, 앞으론 어떻게 하면 좋을지 고민하고 또 고민하며 시행착오를 쌓아나가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내가 우려했던 상황이 생기는 것이다. 나는 찾지도 못하고, 사회적으로도 인정받지 못하는 것이다.
나 스스로 고민하고, 스스로 선택하고, 스스로 후회하고, 스스로 고쳐나가자. 내 선택이 틀려 실패할 수도 있다. 하지만 뭐 어떤가. 후회도 하나의 아름다운 감정 중에 하나다. 처음에는 잘하는 것보다 용기를 내고, 시도하는 것이 더욱 중요하다. 나를 찾아가자. 인생에서 가장 의미 있는 일이다.
자, 드디어 마지막 관문까지 왔다. 그것은 바로 누구도 피할 수 없는 '죽음', '끝'이다. 우리의 인생이 얼마나 행복했던지 혹은 슬펐던지 간에, 결국엔 내 세상과 무의 세계를 잇는 문을 통과해야만 하는 때가 온다. 영원할 줄 알았던 나의 이데아도, 이만 사라질 차례다.
대게는 슬픔을 느낄 것이다. 나의 부모님이, 내가, 배우자가, 자녀가 사라진다는 상상을 하니 이만한 슬픔도 없다. 하지만 우주의 입장에선 너무나도 당연한 순리다. 해가 떴으면, 해가 지듯이 말이다. 그리고 당연한 일에는 기쁨도, 슬픔도 느껴지지 않는다. 우리는 산소가 없으면 죽지만, 숨을 들이마실 때마다 기쁨을 느끼지 못하듯이 말이다. 우주는 슬프지 않다. 그저 흐를 뿐이다.
죽음의 순간. 내가 감히 그 순간을 서술할 수 있을까. 능수능란하고 예리하게 표현하고 싶지만, 죽음이라는 대우주 앞에 압도되어 도저히 표현이 어렵다. 그래서 방법을 바꿔보았는데 독자들도 한번씩 따라 해보길 바란다. 자세를 바르게 교정한 뒤, 심호흡을 천천히 세 번 한다. 천천히 눈을 감고 1분 뒤에 나의 이데아가 명을 다한다고 상상해 본다. 이제 나는 무의 세계로 돌아간다는 뜻이다. 이 문을 통과하는 순간 무슨 일이 있어도 돌아올 수 없다고 생각해 보라. 차분하게 집중하여 1분 간 어떤 생각이 드는지 느껴본다.
(...)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나는 아무 잡념이 들지 않고, 매우 평온했다. 기쁨도, 후회도 없이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았다.
엔트로피 감소라는 기막힌 우연으로 우리는 태어났다. 찰나 같은 이 세상, 순간 번쩍이며 인생이라는 선물을 느끼고 간다.
우주로 돌아가자, 다시 무의 세계로.
개인적으로 새로운 것을 시도할 때, 다른 사람들의 노하우를 참고하지 않는 편이다. 예를 들면 게임을 하기 전에 유튜브에 업로드된 전술을 보지 않고, 피아노를 독학할 때 정형화된 연습법을 참고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혼자서 고민하고 공부하고 연습해야, 나만의 독창적인 전략이나 기술을 구사할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정형화된 패턴을 연습하는 순간, 능력치는 보다 빠르게 오를 수 있겠으나 근본적인 재미가 덜하다고 생각한다. 내 목표는 잘하는 것보다 내가 스스로 무언가를 하는 것이다.
이 버릇은 글을 쓸 때도 그대로 나타났다. 브런치스토리에 업로드되는 게시물들을 보면, 저마다 느껴온 삶의 방식을 표현하는 글들이 많았다. 위와 같은 이유로 삶의 대한 인문학적인 글을 하나도 읽지 않았다. 나는 나만의 방식으로, 나만의 결론을 내고 싶었다. 물론 플랫폼 이외에 책을 읽는다는 행위 자체가 저자의 아이디어를 답습한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하지만 내가 주체적으로 책을 고르고 글로 표현하지 못했던 나의 생각을, 간지러운 곳을 긁듯 시원하게 구사한 글귀를 보고 배웠을 뿐이다.
나도 남들처럼 인생에 대한 글을 적어봤다. 몇 페이지 되지 않지만 약 4년의 고민이 담긴 결과물이다. 지금은 굴뚝같이 맞는 것 같지만, 앞으로 인생을 더 살면서 내 생각이 어떻게 바뀔지도 궁금하다. 아직은 잃을 것도 없고, 사회의 진정한 쓴맛도 덜 봤으니 말이다. 타이슨도 말하지 않았는가. '누구에게나 계획은 있다, 처맞기 전까지는'
아무쪼록 재밌게 읽어준 독자들이 있다면 머리 숙여 감사함을 표한다. 훈훈한 마무리 인사를 생각하고 있으나 이데아론을 쓴 저자로서 '행복이 가득하길 바랍니다', '건강하길 바랍니다' 등 빈 겉치레는 도저히 손길이 가지 않는다. 마무리 인사는 이렇게 하도록 하겠다.
'뭐든 알아서 하시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