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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편리왕 Mar 05. 2023

닫힌 문을 열다보니 나는 나에게로, 영화는 영화에게로

퍼스널 쇼퍼(2017) directed by 올리비에 아사야스

*결말 포함


 불친절한 영화들이 있다. 시청각 매체인 영화가 감추고 침묵하기로 할 때 관객은 당혹스럽다. 정보와 콘텐츠가 범람하는 시대에 이런 전략이 가당키나 하겠냐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도무지 친절한 언어로는 표현할 수 없는 것들이 존재한다. 세상은 보이는 게 다가 아니기 때문이다. <퍼스널 쇼퍼>의 불친절함은 마치 닫힌 문과 비슷하다. 있는 힘껏 열어내거나 열리기만 애타게 기다려야 하는 그런 문. 그런데 이 문 안에는 우리가 원하는 건너편이 존재할지, 어쩌면 문처럼 생긴 벽은 아닐지도 확신할 수 없다. 이러한 비유는 마냥 관념적이기만 한 말은 아니다. 영화는 닫힌 문을 맞닥뜨리며 시작하기 때문이다.


 영화의 가장 첫 시퀀스는 ‘모린(크리스틴 스튜어트 분)’이 자동차가 들어올 수 있도록 저택의 대문을 열어주는 장면이다. ‘모린’이 열어준 문을 따라 영화 안으로 들어온 관객은 약 5분간 ‘모린’이 문을 여는 장면을 반복 감상한다. 영화는 ‘모린은 문을 여는 사람’이라는 하나의 줄기를 상정하고 이를 기점으로 점차 가지를 뻗어나간다. 그녀는 영혼과 소통하는 영매라는 정체성에 유명인의 의류 구입을 대리하는 퍼스널 쇼퍼라는 직업을 가졌다. 분리된 둘 사이를 매개한다는 점에서 영매와 퍼스널 쇼퍼는 둘 다 ‘문을 열어주는 사람’이라는 은유에 포함된다. 이야기가 진행될수록 관객은 ‘모린’이 단순히 ‘문을 열어주는 사람’일 뿐 아니라 문을 열고자 무척이나 애쓰고 있는 상태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그녀는 죽은 쌍둥이 오빠 ‘루이스’의 영혼이 신호를 보내주기를 애타게 기다리며 파리를 떠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처럼 영화 <퍼스널 쇼퍼>는 두 세계 사이를 연결하려는 갈망으로 가득 차 있다.


 이때 영화가 매개하려는 두 세계는 표면적으로는 삶과 죽음에 국한된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우리가 ‘모린’이 열어주는 문으로 이 영화 속에 들어왔다는 사실을 상기할 때, 이 우리는 두 세계를 현실과 영화로 이해할 여지도 있다. 우리말로 ‘내세’라고 번역된 ‘세계 너머의 세계(World beyond world)’라는 원어 표현은 마치 스크린은 염두에 둔 말처럼 느껴지기 때문이다. 감독 ‘올리비에 아사야스’가 ‘카예 뒤 시네마’ 출신의 평론가이며 줄곧 ‘영화에 관한 영화’를 만들어온 감독이라는 배경은 이런 의심을 더욱 합리적으로 만든다. 따라서 <퍼스널 쇼퍼>는 유령과 영매가 등장하는 오컬트부터 영화의 존재를 고찰하는 메타 영화에 이르기까지 여러 장르의 층위를 모호하게 뒤섞어가며 문을 열 듯 전진한다.

 영화의 중반부 ‘모린’은 그녀의 고용주 ‘키라(노라 본 발드스타텐 분)’의 옷을 찾기 위해 런던으로 떠난다. 런던으로 가는 기차 안에서 모린은 ‘Unknown’으로부터 의문의 문자 메시지를 받고 이를 기점으로 영화는 스릴러의 층위를 추가한다. 관객과 ‘모린’은 이 기이한 현상의 범인이 죽은 ‘루이스’의 유령이거나 ‘모린’의 주변 인물 중 하나일 것으로 추측한다. 하지만 용의선상에서 간과된 인물이 하나 더 있다. 바로 ‘모린’, 자기 자신이다. 아이폰으로 주고받는 메시지가 ‘iMessage’라는 점은 이 대화가 바로 ‘나(I)’와 나누는 메시지라고 추측하도록 만드는 뒤섞인 실마리 중 하나다. 이 ‘Unknown’은 ‘모린’을 겁주는 듯 보이지만 궁극적으로는 질문을 던지는 인물이다. 그 질문은 크게 ‘무엇을 두려워하는가?’ 와 ‘무엇을 욕망하는가?’ 로 나뉜다. 매체의 역할이던 ‘모린’은 문자 메시지라는 또 다른 매체를 만나 스스로 내면을 파고든다. 그 결과 ‘모린’은 ‘키라’의 집에서 그녀의 명품 옷을 입고 수음한다. 이는 겉으로 드러난 ‘모린’와 안에 감추어진 ‘모린’이 마침내 통합하는 순간처럼 보인다. 이때부터 영화가 지향하던 ‘두 세계 사이의 연결’이라는 키워드가 모호해진다. 겉으로 드러난 ‘모린’과 내면에 감추어진 ‘모린’을 서로 다른 것으로 볼 것인가, 아니면 하나로 볼 것인가. 그렇다면 영화와 현실 또한 서로 다른 것으로 볼 것인가, 아니면 하나로 볼 것인가.


 기현상은 계속된다. ‘모린’이 액세서리를 전달하기 위해 ‘키라’의 집을 다시 찾았을 때 그녀는 숨진 ‘키라’를 발견한다. 모린은 경찰에 출석해 조사를 받고 ‘Unknown’으로부터 ‘우리가 문자한 내용을 경찰에 말했냐?’는 문자와 함께 당장 호텔로 오라고 협박당한다. 뒤이어 영화는 꼭 닮은 두 시퀀스를 연달아 보여준다. 바로 ‘Unknown’이 언급한 호텔에서 건물 밖으로 나가는 장면이다. 차이가 있다면 첫 번째 시퀀스에서는 마치 유령이 지나간 듯 아무도 없는데 문이 저절로 열리지만, 두 번째 시퀀스에서는 똑같은 경로를 ‘키라’의 애인 ‘잉고(라르스 아이딩어 분)’가 지나가고 건물을 나서자마자 경찰에게 체포당한다는 점이다. 이 영화의 미스터리가 폭발하는 지점이다. 둘 중 어떤 것이 진실인지, 둘 중에 진실이 있긴 한 건지도 확신할 수 없는 채로 사건은 소강하고 ‘모린’은 파리를 떠난다.


 파리를 떠나 오만에 도착한 ‘모린’은 홀로 숙소에 있던 중 마침내 ‘루이스’로 여겨지는 존재와 대화를 시도한다. 그러나 석연찮은 문답이 이어지자 ‘모린’은 ‘이 모든 게 그냥 내 상상이야?’라고 질문하고, 유령의 ‘그렇다’는 대답과 함께 영화는 막을 내린다. 결국 무언가를 찾기 위해, 또는 서로 다른 존재들을 잇기 위해 끊임없이 문을 열던 ‘모린’의 여정은 ‘나’ 하나로 귀결하는 과정이었다. 마찬가지로 <퍼스널 쇼퍼>는 스크린 너머의 세계에 있는 관객들에게 다가가고 그들을 설득하는 영화가 아닌, 영화 그 자체로서 홀로 존재하는 영화가 되어 끝이 난다. 단 하나의 사실만 존재하는 현실과 달리 <퍼스널 쇼퍼>는 영화란 모호하며 상충하는 여러 가지가 서로 동시에 사실일 수도, 또는 사실이라는 게 아예 존재하지 않을 수도 있는 세계라는 명제를 실험하고 증명한다. 두 시퀀스를 이어붙인 것뿐인데 호텔을 가로질러 나간 존재가 유령인 동시에 ‘잉고’ 일수도 있고, 혹은 둘 다 동시에 거짓일 수도 있듯이 말이다. 이렇듯 <퍼스널 쇼퍼>는 다양한 장르를 해체하고 참과 거짓을 실험하며 영화 그 자체를 탐구하는 일종의 구도(求道)적 텍스트이다. <퍼스널 쇼퍼>가 영화 스스로에게 수렴하는 결론은 관객에게도 똑같이 적용할 수 있다. 영화 감상이란 곧 '나' 자신을 반추하기 위한 짧은 여정이기 때문이다. 죽음을 기저에 두지만 동시에 예측할 수 없는 방향으로 움직이며 살아있음을 발산하는 영화, <퍼스널 쇼퍼>다.


아트나이너 17기 강탄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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