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엔니오: 더 마에스트로> directed by 쥬세페 토르나토레
사적인 경험을 곁들이지 않곤 입을 뗄 수 없는 주제들이 있다. 어린 시절 극장에서 감상한 영화, 고등학생 때 야자 시간에 듣던 음악, 군 복무 중 근무 시간에 몰래 읽던 소설 같은 건 도무지 냉정해지기 어려운 대상들이다. 다들 그러하듯, 나에게도 엔니오 모리코네는 무척 사적인 인물이다. 그의 이름과 음악을 오랜 시간 알았지만 그건 단순히 고유 명사를 외우는 지식에 불과했다. 엔니오 모리코네라는 존재를 처음으로 강하게 인식했던 영화는 다름 아닌 존 카펜터의 <더 씽(The Thing, 1982)>이었다. 혹한의 남극 기지에서 괴생명체에게 공격받는 무시무시한 공포영화의 끝에 그의 이름이 걸려 있었다. 영화 속 으스스한 전자음악의 주인이 밝혀지는 대목은 영화의 결말만큼이나 큰 반전이었다. <시네마 천국>, <원스 어폰 어 타임 인 아메리카> 같은 시대의 걸작도 ‘엔니오 모리코네’라는 거대한 코끼리의 일부일 뿐이란 걸 깨달았다. 당시 나는 그 이후 앞서 언급한 영화들에 <헤이트풀8>까지 연달아 감상하며 뒤늦은 코끼리 더듬기에 동참했다.
<엔니오: 더 마에스트로>는 50여 년의 세월 동안 편린으로 엔니오 모리코네를 접했을 대중을 위해 코끼리의 전체를 보여주고자 노력한다. 영화의 시작은 규칙적인 메트로놈 소리, 그리고 거실에 나와 체조하는 엔니오의 모습이다. 몸을 움직이는 엔니오와 그를 향한 주변인들의 찬사를 담은 인터뷰가 화면을 교차한다. 영화는 이 예술가의 위대함을 말하기에 앞서 그가 얼마나 사소하고, 꾸준하고, 정확한 인물이었는가를 포착한다. 큰 기복이나 공백 없이 수십 년을 달려온 거장을 한숨에 표현하기에 이보다 적합할 수 없다. 또한 영화가 바닥을 구르는 거장의 모습에도 스스럼이 없는 까닭은 오랜 세월 함께한 ‘쥬세페 토르나토레’ 감독의 힘이었을 테다. 엔니오는 삶과 예술을 함께한 친구의 카메라 앞에 앉아 이야기를 시작한다. 그의 ‘옛날 옛적’ 이야기는 음악이 하고 싶지 않았지만 아버지에게 등 떠밀려 억지로 시작했던 소년 시절부터 시작한다.
영화는 착실하게 시간 순서대로 엔니오 모리코네를 따라간다. 이 과정은 마치 작용-반작용처럼 이뤄진다. 먼저 어떤 작품에 대해 엔니오가 언급한다. 그리고 그 작품의 참여했던, 또는 수용했던 예술가들이 각자 기억을 꺼내 놓는다. 이 작용과 반작용 사이에 엔니오가 참여한 영화, 공연 장면이 인서트처럼 지나간다. 이때가 바로 관객이 이야기할 시간인 셈이다. 스크린이 작용하면 객석은 엔니오 모리코네에 대해 저마다 갖고 있는 사적인 경험으로 반작용한다. 따라서 <엔니오: 더 마에스트로>는 엔니오의 지휘 아래 각자의 회상을 쏟아붓는 일종의 오선지다. 그 기억과 감상이 서로 맞지 않아도 상관없다. 엔니오 모리코네는 불협화음도 적극 활용했던 음악가이기 때문이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감독인 쥬세페 토르나토레가 직접 화면 안에 출연하여 엔니오 모리코네의 객체를 자처하는 것이 이해된다. 감독은 영화의 전권을 엔니오에게 넘기는 방식으로 그의 다큐멘터리를 만들어 간다.
어떤 이야기에도 모두에게 사랑 받는 인물은 등장하지 않는다. <엔니오: 더 마에스트로>는 엔니오를 따라다녔던 부침에 대해서도 짚고 넘어간다. 당시 예술계는 영화음악을 순수음악의 대척점에 놓고 상대적으로 저열한 것으로 여겼다. 엔니오를 향한 대중과 감독들의 러브콜이 늘어도 그는 스승과 동기들의 인정을 받지 못하는 괴로움을 해소할 수 없었다. 그렇게 배신자 낙인을 등에지고 만든 영화음악 또한 언제나 모든 곳에서 환영 받지 못했다. 혹자는 그의 양질의 작업량에 근거 없는 의혹을 제시했다. 특히 연이은 아카데미 수상 불발은 엔니오의 삶에 큰 콤플렉스가 된다. 양쪽 세계에 발 담군채 최선을 다하지만 결국 어디에도 속하지 못하는 그의 처지는 서부극의 무법자와 꼭 닮았다. 역설적이게도 이런 그의 결핍이 그를 더더욱 주인공으로 만든다. 엔니오 모리코네의 커리어에서 서부 영화가 중요한 축이라는 사실은 모두가 알고 있다. 이렇듯 엔니오의 인생을 톺아 보는 과정은 그가 음악과 한 몸이었듯 영화와도 한 몸이었다고 증언하는 일이다.
막이 내릴 때 쯤엔 엔니오 모리꼬네를 경험했던 이들이 모두 등장해 종교적 열심에 가까운 표현으로 그를 묘사한다. 그러나 관객의 기억에 남는 건 그의 업적이나 수상이 아니다. 영화는 그가 얼마나 음악을 사랑했는가를 표현하는데 훨씬 더 많은 시간을 할애했기 때문이다. 엔니오는 자신의 곡을 설명할 때면 그 음들을 직접 입으로 묘사한다. 수백편에 달하는 영화에 참여했으면서도 그에겐 모든 곡들이 막 떠오른듯 생생하고 신선하다. 우리는 그 천진난만에서 위대함의 비밀을 발견한다. 많은 사람들이 하나같이 엔니오 모리코네가 영화 음악의 패러다임을 바꿨다고 말한다. 그러나 그는 “혁신을 위해 무언갈 한 적은 한 번도 없다. 그저 더 나은 음악을 만들기 위해 고민했다”고 말한다. 우리는 그의 겸손에 의심의 여지가 없듯 그의 불멸에도 이견이 없다. 영화가 막을 내리고 관객들은 저마다 휘파람이나 허밍과 함께 극장 밖을 나선다. 모두가 다른 곡을 부르면서도 한 사람을 떠올리는 놀라운 광경은 영화의 성취이자 연장선상임에 분명하다.
아트나이너 17기 강탄우